경상북도 청도군 매전면 금곡리에 있는 조선 시대의 별장,

청도 삼족대(淸道 三足臺)를 찾았습니다.

 

삼족대(三足臺)는 어분산에서 내려온 개천이 동창천과 합류하는 지점의,

 

 

 

학일산의 지맥이 동창청(東倉川)으로 내려오는 능선에 동남향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삼족대(三足臺)로 오르려면 나무계단을 해두어 편하게 오를수 있으며,

 

 

 

청도군에서 지었다는 8각정의 정자를 먼저 만나게 되고,

 

 

 

삼족대(三足臺) 앞에는 "삼족당김선생신도비(三足堂金先生神道碑)"가 있어,

삼족대의 한단 낮은 대지에 자리한 이곳은 원래 삼족대의 관리사가 있던 곳으로,

2칸의 방, 부엌과 방앗간이 "ㄱ"자로 배열된 하당(下堂)이 있었던 곳이라 하며,

삼족대의 언덕 아래 벼랑에는 물에 떠있는 강정(江亭)도 있었다고 전하나,

지금은 하당(下堂)과 강정(江亭) 모두 흔적을 찾을수 없습니다.

 

 

 

삼족대(三足臺)는 경상북도 민속 문화재 제17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사방에 토담을 쌓고 문을 두어 그 안에 정자를 배치하여 일곽을 이루고 있으며,

 

 

 

청도 삼족대(淸道 三足臺)는,

김대유(金大有,1479∼1552)가 관직을 그만두고 우연(愚淵)이 있는 운문산 아래 별장을 지어 살았던 곳으로,

김대유의 본관은 김해이고 자호(自號)를 삼족당(三足堂)이라 하였는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면서,

벼슬도 현감을 지냈으니 벼슬로도 만족하고, 항상 밥상에 반찬이 부족하지 않으니 먹는 것도 만족하고,

나이도 환갑을 넘겼으니 수명(壽命)도 만족한다 하여 삼족(三足)이라고 이름 지었다 합니다.

 

 

 

정자의 뒤편 토석담장의 일부는 암반위에 올려져 있어,

삼족대(三足臺)가 암반위에 자리해 있슴을 알게 해주고,

 

 

 

삼족대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네모진 자연석에다 초석(礎石)을 놓고 건물의 바깥 기둥은 모두 두리기둥을 세웠으며,

북쪽 2칸은 통으로 된 방이며 반 칸 정도는 전퇴를 물려 마루를 놓았고 남쪽에 있는 전면 1칸 앞뒤로 두 칸은 통마루로 되어 있으며,

마루의 남쪽 면과 뒷면에는 두 쪽으로 열수 있는 판문을 내었고 온돌방 앞쪽에는 양쪽으로 열수 있는 두 개의 문으로 만들어져 있고,

마루에서 방으로 들어가는 문은 일반 양반집의 문처럼 두 짝의 열 개 팔모 불발기가 있는 살문을 달았습니다.

 

 

 

삼족대(三足臺)의 현판(懸板)으로,

김대유(金大有)의 호를 따라 삼족대라 이름 지었다고 하며,

 

 

 

전면의 마루위에는 9점의 시문(詩文)과 기문(記文)의 편액이 있어,

삼족대중수기(三足臺重修記),삼족대중수발(三足臺重修跋), 삼족대지감(三足坮志感), 경차삼족대운(敬次三足臺韻),

삼족당기(三足堂記) 등의 편액을 볼수 있으며,

 

 

 

삼족대(三足臺)를 지은 김대유(金大有,1479∼1552)는,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1507년(중종 2) 현량과의 정시에 장원급제하여 진사가 되고,

1519년(중종 14)에 현량과의 병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 호조 좌랑 겸 춘추관 기사관에 이어 정언, 칠원 현감을 지냈으며,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모든 직을 사임하고 향리(鄕里)에 은거하면서 후진들의 교학과 휼민 사업에 힘 썻으며,

1552년 향년 74세로 졸 하였으며 청도의 자계서원(紫溪書院)과 선암사(仙巖祠)에 祭享(제향)되었고 저서로는 탁영연보(濯纓年譜)가 있습니다.

 

 

 

삼족대(三足臺)는 김대유(金大有)의 장구지소(杖屨之所)이며 만년에 생활 하던 곳으로,

유천강삼현(三賢)의 한 사람인 그는 주세붕(周世鵬,1495~1554),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

소요당(逍遙堂) 박하담(朴河淡,1479∼1560) 등과 교류하며 후진들을 교육 하던곳 입니다.

 

 

 

정자의 온돌방은 트여 있고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으며,

 

 

 

단청한 흔적이 있는 기둥 위에는 조선후기의 장식적인 모습도 보입니다.

 

 

 

정자의 마루에서 보이는 모습으로, 

동창청(東倉川)과 주변 풍광이 한눈에 들어와 풍취가 뛰어난 곳으로,

 

 

 

김대유의 삼족당집 (三足堂集)에 있는 시(詩)  "우흥(寓興, 흥을 붙이다)"을 가져 옵니다.

어눌한 못(눌연,訥淵)이 어리석은 못(우연,愚淵)에 다다른다

옛 성인도 어리석은 듯 어눌하려 했다 하네

낚시하며 이곳을 내왕하길 십년

이젠 인간사에 어리석고 언사도 어눌해졌네

 

 

 

또한 김대유(金大有)는 이곳에 은거하며,

중종 15년(1520)에 벗 소요당(逍遙堂) 박하담(朴河淡)과 더불어 사창(社倉)인 동창(東倉)을 창설하여 휼민사업을 이끌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옛 별장 모습을 볼 수 있는 청도 삼족대(淸道 三足臺)는 한옥 건축가들이나 별장 연구가들이 많이 찾는 곳으로,

조선 초기에 세워 졌으나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허물어졌다 다시 세워지기를 여러 번 하였다가,

김대유의 13대손 김용희에 의해 새롭게 단장된 건물입니다.

 

 

 

동창청(東倉川)의 푸른물을 내려다 보며,

세월의 흐름으로 그 옛날의 정취는 모두 찾을수 없지만,

그나마 한적한 곳에 자리하여 빼어난 풍광을 보여 줍니다.

 

 

 

삼족대(三足臺)를 돌아보고 내려오는 길을 잡습니다.

 

 

 

빼어난 풍광을 보여주는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벼슬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자기수양과 후진양성에 힘썻으며,

나아가 휼민사업을 이끌었던 김대유(金大有)의 행적을 통해 조선 선비의 진면목을 찾을수 있는곳으로,

경북 청도의 빼어난 정자, 삼족대(三足臺)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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