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청도군 금천면 임당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특별한 고택(故宅),

청도 임당리 김씨고택(淸道 林塘里 金氏 故宅)을 찾았습니다.

 

임당리 김씨고택(林塘里 金氏 故宅)은 마을안에 위치해 있어,

마을로 들어서면 담장에 고택(故宅)으로 가는길을 안내 해주고 있으며,

 

 

 

청도 임당리 김씨고택(淸道 林塘里 金氏 故宅)은 국가 민속 문화재 제24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운림고택(雲林古宅)으로 불리기도 하는 곳으로,

조선 후기의 궁중 내시주택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는곳 이기도 합니다.

 

 

 

마을 전체의 지세에 어울리게 서남서향으로 자리 잡은 5간(間) 대문간채를 들어서면,

사랑마당의 왼쪽에는 큰 사랑채가 남향으로 배치되어 대문간과 사랑마당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하였고,

 

 

 

큰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홑처마의 팔작지붕으로,

2개의 방을 들이고 나마지는 마루를 둔 큰 규모이며,

큰 사랑채는 남향으로 배치되어 대문간과 사랑마당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하였고,

집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살필 수 있는 자리를 절묘하게 차지 하고 있습니다.

 

 

 

김씨고택(金氏 故宅)의 초창기의 규모가 어떠한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조선 후기에 궁중 내시(宮中 內侍)로 정3품 통정대부에 올랐던 김일준(金馹俊)[1863∼1945]이 낙향(落鄕)하여,

19세기 후반에 중창한 주택으로,

임진왜란 전부터 400여 년 동안 16대에 이르는 내시 가계(內侍 家系)가 이어져온 곳으로,

 

 

 

김씨고택(金氏 故宅)의 내시 가계(內侍 家系)는,

1500년대 시조부터 16 세(世)까지 양자를 들이고 부인을 맞아 들인뒤 궁중으로 들여보내 내시생활을 하도록 했다고 하며,

17대 부터는 직첩만 받고 내시는 생활은 하지 않았으며,

18대때부터는 정상적인 부자관계가 이루어져 가계가 이어져 오고 있다고 합니다.

 

 

 

큰사랑채와 마주하는 곳에 안채의 뒤편이 보이고,

안채로 들어가는중문이 있으며 중사랑채와 사당의 모습이 들어 옵니다.

 

 

 

대문채와 대향(對向)으로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간과 중사랑채가 있어,

뒤쪽으로 안채와 두채의 고방채가 중사랑채와 함께 튼"ㅁ"자 형(子形)의 몸채를 이루고 있으며,

 

 

 

중사랑채는 홑처마 맞배지붕에 정면 4칸 측면 2칸인데 왼쪽 1칸이 중문이 되어 있으며, 

방 3칸에 마루 3칸으로 되어 있어 전면에는 절반만 보이며 통과하는 이들을 살필 수 있게 배치에서 유의 하였고,

그리 높지않은 중사랑채의 "ㄱ"자의 토담에는 눈높이로 구멍 세 개가 뚫려 있어,

주인이 내시(內侍)인 만큼 항상 부녀자의 안위를 고려함과 동시에,

출입이나 행동을 규제할 목적에서 의도된 것으로 보여져 내관가 배치의 한 전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중사랑채 앞에는 작은 연못이 있고 주변에는 나무를 심어 정원으로 가꾸어 두었는데,

참고로, 원래 내시와 환관은 다르다고 하는데, 

고려시대에는 거세한 남자를 "환관(宦官)"이라 하고 왕실 최측근 관료를 "내시(內侍)"라 했으며 고려 중기까지 내시(內侍)는 왕의 비서관을 뜻 했으며,

내시부는 젊은 엘리트 관료 집단으로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 또한 내시 였습니다.

환관은 왕실의 허드렛 일을 맡았서 하였는데,

환관 가운데 고려 18대 의종(1146~1170) 눈에 든 "정함"이라는 자가 내시부에 발령 나면서 환관이 내시 임무를 맡게 되었고,

이후 환관은 소멸되고 내시가 왕의 가까이에 있게 되면서 왕실의 한부분을 맡게 되었습니다.

 

 

 

튼 "ㅁ"자 형(子形)의 몸채에서 안채를 중심으로 안마당과 뒷마당등의 외부공간은 건물들과 높은 토담들로 폐쇄되어 있고,

안채로의 출입도 중문을 통해야만 가능하도록 되어 있는데,

이는 반가(班家)에서 중문외에도 별도의 일각문들이 출입동선을 갖는 것과 비교할 때 보다 강한 폐쇄성을 보여주는 것이며,

중사랑채 옆의 안채로 들어가는 중사랑채의 반벽에서도 담장 높이로 3개의 구멍을 볼수 있으며,

대문채와 중문간을 마주보게 배치하여 사랑대청에서 바로 보이도록 되어있어,

부녀자들의 출입을 반가(班家)에 비해, 보다 엄격하게 규제하고 있음을 볼수 있습니다.

 

 

 

안채는 북향하다 시피 자리해 있고,

중사랑채가 왼쪽을 자리하고 안채와 작은 고방채 서쪽 산기슭 쪽으로 큼직한 큰 고방채가 가로막고 있어,

결국 영남 북부지방의 전형인 "ㅁ"자형의 배치 구성이 되었습니다.

 

 

 

"ㄱ"자 형태로 길게 자리하고 있는 2채의 고방채로,

임당리 김씨고택은 특히 곳간의 규모가 일반 가옥과 비교하여 확연히 큰것을 알 수 있으며,

 

 

 

큰고방과 작은 고방이 이어지는 곳에는 담장이 막고 있고,

 

 

 

큰고방의 북쪽 끝에는 내측(內厠)이 있어,

 

 

 


내측(內厠)은 안채에서 사용하는 측간으로,

주로 여성용 옛 화장실을 의미 합니다.

 

 

 

남,북으로 길게 서있는 수장 전용 공간인 큰 고방채로,

다른 고택에 비해 곳간의 규모가 확연히 큰것은,

시집을 와도 남편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하는 이집 여인들에게 재물로써 인생의 줄거움을 주기위한 하나의 위안으로 보이며,

 

 

 

내시(內侍)의 여인들은 한번 시집을 오면 부모상을 당히기전에는 바깥출입이 허락되지 않았다고 하니,

이집안의 특별한 규범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2칸 규모의 맞배 기와집으로,

앞에서 부터 건넌방, 대청, 안방, 부엌 순으로 연접되어 있으며,

안채의 마루는 다른곳과 달리 전면에 문이 달려 있어 이것 또한 폐쇠성이 엿보이고,

 

 

 

제법 큰 규모의 안채의 부엌을 들여다 보고,

 

 

 

안채의 방가운데 건넌방을 들여다 봅니다.

 

 

 

전체적인 구조가 일반 고택(故宅)과 달리 화려하고 장식이 많은 편이며,

안채를 중심으로 앞마당과 뒤마당등 외부공간은 건물들과 높은 토담들로 폐쇄 되어있고,

안채로의 출입은 중문을 통해서만 가능하도록되어 있으며 사랑대청에서 대문채와 중간문을 마주보게 배치 하는 등,

이는 일반 반가에서보다 훨씬 여성들의 출입에 폐쇠적인 공간임을 보여주고 있는데,

집주인이 내시인만큼  항상 부녀자의 안위를 고려함과 동시에 출입이나 행동을 규제할목적에서 의도된 것으로 보여져,

내관주택의 전형이라 할수 있습니다.

 

 

 

중문과 연해있는 중사랑채의 안채쪽에서의 모습이며,

 

 

 

고택(故宅)을 지은 김일준(金馹俊)은 일제강점기 민족교육에도 힘써,

1920년 7월 경성 안국동 윤치소(尹致昭,1871~1944 - 윤보선 전 대통령의 부친)의 집에서 열린,

조선교육회(朝鮮敎育會) 발기총회에 참석하여 당시의 거금 100원을 희사하였고,

 

 

 

1924년 1월에는 그의 손자 김진우(金振宇)가 재학 중인 경성 기독교청년회 학관 고등부에,

생리학 표본용 인체모형 구입을 위해 금 130원을 희사하기도 했으며,

1926년 1월 22일 자 동아일보에는 그가 소작인에게 소작료를 감면하는 선행을 베푼 기사가 실리기도 했습니다.

 

 

 

안채에서 나와 중사랑채의 남쪽에 있는 사당으로 향합니다.

 

 

 

사당은 토담으로 별곽(別廓)을 구성하여 사당을 서북향으로 배치 하였고,

정면 3칸 측면 간 반통으로 앞퇴가 열린 맞배지붕의 사당의 통상적 구조이며,

원래 큰사랑 뒤쪽의 광과 사당 동쪽에 행랑채가 있었다 하나 지금은 없어 졌으며,

 

 

 

사당의 지붕에 올려진 여러장의 막새에는,

"강희이십오년병인윤사월(康熙二十五年丙寅閏四月)"의 명문이 새겨져 있어 명문의 연대는 1686년 으로,

집을 처음지은것이 오래된것임을 짐작할 수 있지만,

건물의 구조수법이나 양식으로볼때 1800년대에 현대와같은 규모와 형태로 확장하여 중건 하였슴을 짐작할수 있으며,

 

 

 

1988년 사당 마루 밑에서 발견된 "내시부통정김일준가세계(內侍府通政金馹俊家世系)"에,

내시 가문의 세계가 기록되어 있어 16대까지는 내시로 봉직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들은 말년에 퇴임 후 낙향해 이 곳에 머물다가 사망하면 이곳 인근에 묘를 쓰곤 하였다고 합니다.

 

 

 

대대로 내시가 살았던 내관가(內官家)로,

운림고택(雲林古宅)은 안채의 노출을 꺼리는 공간구성 등이 일반 고택과 다른 특성을 찾아 볼수있고,

궁궐 주변이 아닌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여러대에 걸쳐 내시가 살던 가옥이며,

여러 고택을 다녔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접하는 내관가(內官家)의 고택(故宅)으로,

특별한 고택을 찾으신다면 추천 할만한 곳으로,

경북 청도의 내시계보의 고택인 임당리 김씨고택(林塘里 金氏 故宅) 입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