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주진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정자,

안동 삼산정(安東三山亭)과 곁에있는 침산정(枕山亭)을 찾았습니다.

 

안동 삼산정(安東三山亭)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64호로 지정 되었고,

 

 

 

삼산정(三山亭)은 사주문과 정자, 그리고 방형의 토담으로 일곽(一廓)을 이루고 있으며,

 

 

 

정자 앞에는 커다란 바위가 자리하고 있고,

 

 

 

사주문을 들어서면 삼산정(三山亭)이 자리해 있어,

삼산정(三山亭)은 1750년(영조 26)경 삼산(三山) 류정원(柳正源)이 후손들의 도덕계승과 학문정진을 위해 창건하였다고 하며,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평면을 보면 어칸은 대청이며 좌협칸은 앞쪽 1칸 마루 뒤쪽에 1칸 온돌방이 있고 우협칸은 온돌방 2칸이 배치되어 있으며,

대청과 온돌방 전면에는 기둥 밖으로 마루를 조금 내밀어 계자각 헌함(軒檻 : 대청 기둥 밖으로 돌아가며 깐 좁은 마루)을 돌렸고,

누하주와 누상주는 별주를 사용하였으며 온돌방이 있는 누 하부의 일부는 벽체로 막아 구들을 두었습니다.

 

 

 

류정원(柳正源)의 호 삼산(三山)에서 가져온 삼산정(三山亭)의 현판이며,

 

 

 

정자로 오르는길은,

왼쪽의 계단에 올라 판벽에 있는 나무문을 통하여 들어갈수 있으며,

 

 

 

삼산정(三山亭)의 가구는 측면 가운데 주열에서 합보(合梁 : 두 부재를 결합시켜 한 개의 보로 만든 것)로 처리하고 위치에 따라 장여를 놓았으며,

측면 중앙 기둥에서 뻗어나온 충량은 퇴량과 함께 주두(柱頭) 위에서 결구 되었으며,

온돌방을 넓히기 위해 종대공과 측면 중앙기둥을 동일선상에 두지 않고 서로 어긋나게 배치하며,

전체적으로 볼 때 건물의 평면 구성방식과 상부 가구수법, 특히 누마루집이면서 기둥은 모두 평주를 사용하여,

대량과 퇴량을 합보로 처리한 것이나 종대공과 중앙기둥을 동일선상에 두지 않은 점 중대공의 세부수법 등은 드문 예 라고 하며,

 

 

 

합보로 이루어진 대량위에는 동자주(童子柱 : 세로로 세운 짧은 기둥)를 세워 종량을 받았는데,

동자주상에 공포를 짜아 종량의 보아지와 중도리 장여를 받게 하였으, 종량 위에는 동자주를 두어 종도리를 받고 있습니다.

 

 

 

좌협칸에는 앞에 1칸짜리 마루를 두고 뒤쪽에 1칸짜리 온돌방이 있어,

 

 

 

1칸의 방은 그리 밝지 않은편이며,

 

 

 

우협칸에는 2칸의 온돌방 트이게 배치되어 있으며,

천정은 우물반자의 눈섭천정을 하고 있는데 정교하게 구성 하였습니다.

 

 

 

삼산정(三山亭)을 세운 류정원(柳正源, 1702~1761)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순백(淳伯) 호는 삼산(三山)이며 조선 후기 안동 출신의 문신으로,

1735년(영조 11) 증광문과에 급제급제하였으나 부친상을 당하여 오랫동안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고,

1749년(영조 25) 성균관전적을 거쳐 자인현감이 되어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이듬해 홍문록에 올랐고,

1751년(영조 27) 3월 고향인 안동으로 돌아와 윤광소(尹光紹)와 함께 향음주례(鄕飮酒禮)를 시행하였고 여강서원(廬江書院)에서 회강(會講)하였으며,

1752년 정우량(鄭羽良)의 천거로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1754년(영조 30) 세자시강원필선이 되어 장헌세자(莊獻世子)의 보도에 능력을 발휘하여 영조의 신임을 받았으며,

같은 해 홍문관수찬과 사간원사간을 거쳐 교리에 임명되었다가 통천군수로 나가서는 백성들의 진휼에 힘썼습니다.

1756년(영조 32) 원인손(元仁孫)과 채제공(蔡濟恭)의 추천으로 홍문관부교리가 되어 조정에 돌아온 뒤,

왕의 특명으로 승정원동부승지에 임명되었으나 사직 하였다가,

1758년(영조 34) 춘천현감에 부임 하였고 그 뒤 사간원대사간과 호조참의에 임명 되었습니다.

류정원(柳正源)이 지방관으로 있을 때에는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그의 치적을 다루기도 하였으며,

삼산집(三山集)과 역해참고(易解參攷) 하락지요(河洛指要), 역전팔칙양생설(易傳八則陽生說) 등 많은 저술을 남겼습니다.

 

 

 

정자에서 내려와 마루 아래를 보니, 

왼쪽 1칸의 온돌방에 불을 넣는 아궁이는 마루아래 깊숙히 자리해 있고,

 

 

 

정자의 뒤편은 마루가 있는 부분에만 그리 크지않은 판문이 있고,

방의 뒷부분은 모두 벽으로 막혀 있으며,

 

 

 

2칸의 방이 있는 오른쪽 방이있는 외부 벽면에는,

기둥과 옆을 가로지르는 목재에는 자연스러움이 보이고,

 

 

 

2칸방의 동측 창문은 마치 문짝하나를 뉘여서 달아둔듯 눈길이 갑니다.

 

 

 

삼산정 옆에는 복원해둔 독립운동의 산실인 침산정(枕山亭)이 있어,

1894년 갑오경장(甲午改革)과 이듬해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 되자,

서파 류필영은 만산 류창식, 동산 류인식과 더불어 청량산에 의병부대를 만들어 의병활동 하였고,

류인식은 김동삼과 함께 1907년 내앞마을에 협동학교를 세워 계몽교육을 시작해,

삼산마을에 삼산학교와 삼산야학을 이끌어 신학문 계몽활동을 벌리는 등,

 

 

 

삼산(三山) 류정원(柳正源)의 후예들은 의병운동을 구국운동으로 민족계몽 의병운동으로 전개하여  왔으며,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온문중이 해외기지건설에 앞장서 서간도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경학사 경영의 주측이 되어 독립운동사의 빛나는 일들을 하였으며,

삼일운동 당시 류만식은 월곡장터에서 군중을 모아 만세시위를 하였고 전국유림대표 137명의 서명을 받은 독립청원서를 상해임시정부에 가져가,

전 세계에 호소하는등 류정원(柳正源)의 후예들은 구국운동의 주역들 였습니다.

 

 

 

정약용의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목민관의 표본이 되었고,

학문을 닦고 후진양성을 하던곳이며 그의 후손들의 독립운동의 산실인 침산정(枕山亭)이 함께 있으며,

인근에 있는 안동 전주류씨 삼산 종택(安東全州柳氏三山宗宅)과 함께 찾아 볼만한 곳으로,

경북 안동의 정자 삼산정(三山亭)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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