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일을 맞아 서울 종로구 세종로 경복궁 내에 위치하고 있는,

국립민속박물관(國立民俗博物館)을 찾았습니다.

 

우리나라 국보의 모습을 본떠 만든 국립민속박물관(國立民俗博物館)은,

국립중앙박물관이 쓰던 건물로 1972년 완공 되었으며,

정면 계단은 불국사의 "청운·백운교"(국보 제23호)를 건물 중앙은 법주사 "팔상전"(국보 제55호)의 모양을 차용해온 것으로,

2013년에는 해방이후 최악의 건물들에 20위 중 15위에 선정되기도 하였으며,

이곳은 조선시대 역대 왕들의 어진들을 모신 건물인 "선원전"이 있었던 곳이며 건물은 지진에도 약하다고 하며  2030년에 철거 예정입니다.

 

 

 

국립민속박물관의 내부 전시관은 따로 올리기로 하고,

박물관의 야외 전시장만 둘러 보기로 합니다.

 

 

 

야외전시장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만나게되는 솟대와 목장승(木長丞)의 군락으로,

장승(長丞)은 우리 나라의 마을 입구 또는 절 입구에 세운 사람 머리 모양의 기둥으로,

민간신앙의 한 형태로서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하며 사찰이나 지역 간의 경계 또는 이정표 구실도 합니다.

 

 

 

장승의 군락을 지나면 만나게 되는 효자각과 효자문으로,

일반적으로 효자비는 비를 보호하기위해 지은 비각은 많이 볼수 있으나,

 효자문 함께 있는 효자각은 보기 힘든 것여서 눈길이 가며,

 

 

 

효자각은 나라에서 허권(許權, 1847~1895)에게 내린 효자정려(孝子旌閭, 효자에게 내린 표창)를 기념한 효자비(孝子碑)를 보호하는 비각(碑閣)으로,

전북 부안에서 이건 하였으며,

이 건물은 원래 허권의 후손(보안면 월천리 고 허방환 씨)의 살림집 안에 있었던 것을,

2008년 이곳으로 옮겨 보존한 것으로 이건 과정에서 기둥 일부를 보수 하였고,

 

 

 

효자각은 연꽃봉우리, 용, 봉황 등을 조각하고 단청으로 화려하게 장식했으며,

효자문에는 효자문(孝子門)이라 쓴 현판이 걸려 있고,

효자각과 효자문을 통해 효를 중시했던 당시의 사회상과 건축기술과 공예문화를 엿볼수 있습니다.

 

 

 

허권(許權)의 본관은 태인(泰仁)이며 성균 생원으로,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 병에 탕약 주선을 정성껏 하였으며 상을 당하여서는 치상범절(治喪凡節)로 예를 다 하였고,

그의 부인 광산(光山) 김씨는 의관(議官) 영찬(永燦)의 딸로 허권에게 시집와서 몇 년이 안 되어 남편이 죽으니,

김씨 부인은 남편을 따라 죽으려 하였으나 아직 너무 어린 두 아이가 있어서 억지로 참고 집상을 하였고,

있는 힘을 다하여 아이를 기르고는 선영을 받들어 나라에서 그 열행을 알고 고종(高宗) 9년에 정려(旌閭)를 내리고 숙부인(淑夫人)을 내렸습니다.

 

 

 

효자각의 오른편에는 경남 창녕의 옥천리 관룡사의 석장승을 비롯한,

다양한 모습의 석장승의 군락을 볼수 있어,

 

 

 

석장승은 돌로 만들어진 장승으로 장승의 한자어 표기는 장생(長生, 長栍)으로 나타나며,

장승의 기능은 지역간의 경계표 역활과  이정표로 쓰였으며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했습니다.

 

 

 

석장승 옆에는 회격묘(灰隔墓)가 있어,

회격묘(灰隔墓)는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택지개발지구에서 출토된 무명의 분묘로,

회격내에서 목곽, 목관, 복식유물, 운삽 등이 양호한 모습으로 나왔으며,

회격묘는 고려시대에 주로 사용되었던 석관을 대체해 조선시대 이후에 권장되었던 장묘 문화로,

이곳에 전시되어 있는 회격과 목곽은 보존처리 과정을 거친 출토품이며 목관과 내부의 운삽(雲翣)은 복제품 입니다.

(운삽(雲翣)이란 발인할 때에 영구의 앞과 뒤에 세우는 구름무늬를 그린 부채 모양의 널판으로 하관할 때 명정과 함께 묻습니다.)

 

 

 

석장승의 군락을 지나면 무인석과 문인석들이 있어,

원래는 능(陵ㆍ왕 왕비 무덤) 앞에 세우는 석물(石物)로 문관 형상으로 만든 석물(石物) 문인석(文人石)과 무관 형상의 무인석(武人石)들로,

고관대작의 경우라면 개수를 줄여 하나씩 세워두는 경우도 있었으나,

조선 후기로 넘어 오면서 사대부와 권문세가는 물론 낮은 벼슬아치의 무덤에까지 세우는게 유행 였다고 합니다.

 

 

 

남오성(南五星) 장군묘 묘비(墓碑)와 석물(石物)로,

2002년 충남 태안군 태안읍 석산리에서 발견된 남오성 장군 묘의 묘비(墓碑)와 문인석, 석물(石物)들을 후손으로부터 기증받아 옮겨놓은 것으로,

장군은 1643년에 출생한 무관으로 1676년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였으며 삼도통제사(三道統制使) 등을 역임하고 1712년에 사망 했으며,

묘비의 앞면에는 남오성 장군과 부인 창녕 성씨의 합장묘임을 밝혀주는 내용의 글이 새겨져 있으며,

뒷면에는 장군의 외손(外孫)인 임박이 남오성 장군의 일생을 기록한 비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민간에서 전승되어온 성숭배(性崇拜) 신앙인 성기 신앙물로,

남녀의 생식기를 인위적으로 조각하여 세우거나 비슷한 형태의 자연암석을 대상으로 하여 기자(祈子)나 풍년·풍어·자손만복 등을 기원하고,

질병이나 악신(惡神)으로부터 자신과 마을을 지켜준다고 믿는 민족고유신앙인 성기숭배의 신앙물 입니다.

 

 

 

"광"이라고도 불리는 창고인 고방(庫房)도 있어,

옛 주택에서 창고의 기능을 하는 나무로 지은 작은 건물이며,

 

 

 

창고 옆에는 연자매라고도 하는 연자방아가 있어,

 

 

 

기계가 없던 옛날에 말이나 소의 힘을 이용하여 한꺼번에 많은 곡식을 찧거나 빻는 데 사용한 도구로,

둥글고 판판한 아랫돌 위에 그보다 작고 둥근 윗돌을 옆으로 세우고 이를 소나 말이 끌어 돌림으로써 곡식을 찧는 방아 입니다.

 

 

 

전래 농기구의 일종인 물레방아간도 있어,

물레방아는 물레와 방아의 복합어 이며 한국 재래농기구 중 탈곡이나 정미 또는 제분에 이용되었던 도구로,

대부분의 물레방아는 물이 떨어지는 힘으로 바퀴가 돌아가게 되어 있으며

 

 

 

물레방아의 작동원리는 바퀴를 가로지른 방아굴대 양쪽에 달린 눌림대가 바퀴가 돌아감에 따라,

집안에 장치된 방아의 한쪽 끝인 살개목을 지긋이 눌러 방아공이를 들어 올리면 1바퀴 돌 때 방앗간의 방아공이가 1번 찧게 되는데,

방아 2개를 나란히 놓았기 때문에 마치 마차를 끄는 2마리의 말머리와 같이 방앗간 속에 장치된 2개의 방아공이가 교대로 오르내리게 되는 장치로,

물레방앗간은 매우 넓어서 방아를 찧는 것 외에 인가에서 거절당한 손님이 하룻밤 머물기도 하였고,

경우에 따라서는 마을의 반허락 아래 걸인들이 당분간 유숙하는 곳으로 소설이나 영화의 한부분으로 등장하기도 하였습니다.

 

 

 

물레방아간 옆에는 전통가옥인 오촌댁(梧村宅)이 있어,

이건 과정에서 1848년에 지었다는 상량문이 확인되어 170년을 넘긴 오래된 집으로,

2010년 영덕  원구마을에서 옮겨와 이곳에 자리 했으며 영남 북부지역의 전형적인 가옥으로,

 

 

 

대문에는 입춘대길(立春大吉)과 건양다경(建陽多慶)의 글이 붙어 있고,

 

 

 

대문을 들어서 왼쪽에는 행랑의 문간방 너머로 사랑방의 마루가 보이고,

 

 

 

마주하고 안채가 보이며,

집은 좁은 마당이 있을 둔 영남 북부지방의 전형인 "ㅁ"자 형의 집으로,

지붕 용마루가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있는 것이 특이하며,

 

 

 

안채의 대청마루가 있고 안방과 건넌방이 마주하고 있으며,

 

 

 

부엌은 아궁이의 모습에서 근대의 모습을 볼수 있고,

 

 

 

대문의 왼쪽에는 외양간이 자리하고 있으며,

 

 

 

안주인이 거처 하는 안방의 모습으로,

조선후기 중상류 계층의 생활을 엿볼수 있으며,

 

 

 

오촌댁(梧村宅)은 영덕  원구마을의 영양남씨(南氏) 난고종파 시암(時庵) 남고(南皐)의 둘째손자 남용진(1887~1912)이,

경북 영덕군 창수면 오촌리(梧村里) 출신의 재령 이씨(李氏)와 혼인하면서,

재령이씨 부인의 출신지인 오촌리에서 붙여진 "오촌댁" 이란 택호(宅號) 입니다.

 

 

 

안방 마루의 천정의 주도리에는,

2010년 이곳으로 이건을 하면서 덧붙여 올려둔 새로운 상량문을 볼수 있고,

 

 

 

건넌방과 작은 고방이 보이고 옆에는 작은 문이 있어 바깓으로 나갈수 있으며,

 

 

 

반대쪽에 안방의 오른쪽으로도 나가는 문이 있으며,

그곳에는 사랑방과 연결되어 있어 바깓주인의 방과 너머로 사랑 마루가 있습니다.

 

 

 

오촌댁의 동편에는 디딜방아간이 있어,

 

 

 

디딜방아는 발로 디뎌서 곡식을 찧거나 빻는 데 쓰는 농기구로,

새총 모양인 굵은 나무의 한 끝에 공이를 끼우고 두 갈래진 다른 양 끝을 발로 디디게 되어 있으며,

한 사람이 딛는 방아를 외다리 디딜방아 두 사람이 딛는 방아를 양다리 디딜방아라고 하며,

공이가 닿는 곳에 돌로 만든 방아확을 땅에 묻어 놓고 여기에 곡식을 집어 넣고 디딜방아로 찧거나 빻습니다.

 

 

 

디딜방아 안쪽에는 토끼나 닭을 기르던 자그마한 우리(장)가 있고,

곁에는 변소가 있어,

 

 

 

집의 뒤편에 있어 뒷간이라고도 하는 재래식 변소는 오늘날의 화장실이며,

 

 

 

집뒤에는 장독대와 겨울의 김장김치를 보관해두는 김장독을 묻어 두거나,

겨울의 채소 등을 보관하는 짚으로 만든 저장고를 볼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전통가옥은 지역에 따라 형태가 조금씩 다르지만,

영남 북부지역의 전형인 "ㅁ"자 형의 가옥이 표본으로 전시되어 있어 많은 이들이 찾아보는 곳 가운데 하나이며,

사대부인 중상류 계층의 한옥 외에도 서민 가옥인 초가집의 유형은 볼수 없어 아쉬움이 있습니다.

 

 

 

조선시대에서 근대기로 넘어 가는가 봅니다.

태흥 활자 인쇄소의 모습으로,

 

 

 

인쇄소에는 1930년대부터1970년대에 이르는 시기에 사용되었던,

활판 인쇄기와 제본 압축기, 자동활자 주조기 등 인쇄관련 도구들을 전시해두어 근대 인쇄 기술을 살필수 있고,

 

 

 

1970~1980년대 거리를 그대로 재현한 "추억의 거리"는,

사진으로 남기는 추억 등으로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많은 곳으로,

 

 

 

어릴적 구멍가게로도 불리었던 가게가 있어,

1970년 대 근대화의 물결을 타고 등장한 상점인 근대화연쇄점으로,

대형마트와 편의점이 등장하기 전 우리 일상에서 친숙한 상점의 하나 입니다.

 

 

 

증명사진과 가족사진 등 기념사진을 위해 찾았던 사진관이 있고,

 

 

 

옛날 장터에서 많이 보았던 국밥집이 있어,

 

 

 

막걸리나 소주와 함께하는 추억의 국밥집도 들여다 볼수 있고,

 

 

 

함석 지붕의 이발소는 남자들들 머리 단장의 전유물로,

 

 

 

화개이발소는 실제로 종로구 소격동에 2007년 8월 말까지 약 50년 이상 영업했던 곳이라 하며,

 

 

 

가게 뒤편의 벽면에는 추억의 영화 포스터가 붙여져 있습니다.

 

 

 

고바우라는 이름의 만화방도 있어,

 

 

 

불편한 의자와 연탄 난로의 70~80년대의 만화가게로,

돈을내고 볼수 있었던 흑백 T.V가 옛날 만화방의 추억 이기도 합니다.

 

 

 

만남의 장소 다방으로 다방의 이름은 약속다방으로,

당시 가장 많이 썼던 이름 중의 하나이며 음악다방의 경우에는 많은 젊은이들이 모여 문화를 공감하고 즐기는 공간 였으며,

추억의 거리에서 안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아 즐길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도 합니다.

 

 

 

도시생활에서 접하기 힘든 고택과 비각을 비롯하여,

목장승과 석장승등 다양한 석조물과 70~80년대 근대화의 바람속에서 볼수있었던,

거리의 풍경과 함께하는 추억의 사진을 담아갈수 있으며,

가족 동반이나 어린이들에게 들려주는 교육의 장으로도 좋은 곳으로,

국립민속박물관(國立民俗博物館)의 야외전시장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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