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칠곡군 약목면 남계리에 있는 신유 장군을 기리는 유적지인,

신유장군 유적지(申劉 將軍 遺蹟地)를 찾았습니다.

 

신유장군 유적지(申劉 將軍 遺蹟地)는 경상북도 기념물 제38호로 지정 되었고,

약목면 소재지에서 두만지로 가다 보면 두만지 200~300m 못 미쳐 길 오른쪽에 자리해 있으며,

 

 

 

유적지의 정문으로 외삼문인 북정문(北征門)을 들어서면,

 

 

 

전면에 내삼문인 선위문(宣威門)과 함께 사당인 숭무사(崇武祠)가 자리해 있어,

신유장군 유적지(申劉 將軍 遺蹟地)는 조선 효종 때 무신인 신유(申瀏,1619~1680)장군을 기리는 곳으로,

사당과 경역은 1979~1981년에 보수·정화 하였습니다.

 

 

 

좌측에는 존성재(存誠齋)가 자리하고 있어,

정면 5칸 측면 2칸 홑처마의 팔작지붕으로 가운데 마루를 두고 양쪽에 방을 두었으며,

방의 전면에는 반칸의 마루를 내었고 왼쪽의 방폎에는 다시 마루를 둔 구조로,

 

 

 

복원한 존성재(存誠齋)는 제를 준비하는 곳인 재사(齋舍)로 보이며,

 

 

 

중앙의 마루 안쪽에는 존성재(存誠齋)의 현판이 올려져 있고,

 

 

 

존성재중건기(存誠齋重建記)의 기문(記文)이 있으며,

 

 

 

존성재(存誠齋)는 행사때 오른쪽의 방은 헌관들이 기거하는 곳으로,

왼쪽의 방은 상방이라 불리며 나이 많은 어른들이 사용하는 방으로 여겨 집니다.

 

 

 

존성재를 마주하고 비각(碑閣)이 있어,

신도비각(神道碑閣)에는 두개의 신도비(神道碑)가 있으며,

 

 

 

1680년(숙종 6)에 장군이 62세로 생을 마감하자 왕이 제문을 내리고 예관을 보내 제사하게 하였으며,

그 후 약목면 남계리 숭무사에 제향하고 경내에 묘도비(墓道碑)를 세웠는데 판서 이현일(李玄逸)이 비문을 짓고,

글씨는 교리 이동적이 전액하고 이재익이 음기를 썼으나 6·25전쟁 때 포격으로 파손 되었고,

 

 

 

원래의 비(碑)가 파손되어,

다시 세운 비석으로 글씨는 이상건이 썼다고 합니다.

 

 

 

중앙의 계단을 오르면 사당인 숭무사(崇武祠)가 있어,

 

 

 

숭무사(崇武祠)로 들어가는 내삼문은 선위문(宣威門)이며,

 

 

 

사당인 숭무사로 들어가는 문은 닫혀있어 들어갈수 없어 대문 사이로 보아야 합니다.

 

 

 

숭무사(崇武祠)에는 신유 장군의 영정과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고 하며,

신유 장군은 약목면 복성리 출신으로 1658년(효종 9) 청국의 원병 요청으로,

당시 함경북도의 병마우후로서 제2차 나선정벌의 영장으로 북병영의 정예 포수 2백여 명을 주축으로,

총병력 265명을 이끌고 만주의 헤이룽강까지 출병하여 우수한 전투 능력을 발휘하여,

남하하는 러시아의 스테파노프(Stepanov)이하 부대 270여 명을 전멸 시킴으로써 빛나는 전공을 세웠습니다.

 

 

 

신유장군 유적지(申劉 將軍 遺蹟地)는,

1980년에 부지 1,000평을 매입하여 기존 건물 3동(존성재, 삼문, 관리사)을 해체하고,

경역(境域)을 조성하여 숭무사와 외삼문 그리고 비각을 신축하고 존성재를 복원하여 주위를 정비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으며,

 

 

 

유적지(遺蹟地)를 나와 오른쪽 담장을 따라 오르면,

300m 정도에 신유장군(申劉 將軍)의 묘소가 있다고 안내되어 있어 올라 봅니다.

 

 

 

안내문에는 300m로 표기 되어 있지만 산길여서 제법 오르는듯 하고,

묘소로 오르는 길은 산길이지만 아주 너른 편이며,

 

 

 

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길옆 오른쪽에 묘소가 있어,

 

 

 

묘비는 "정부인 남양홍씨 지묘(貞夫人 南陽洪氏 之墓)"로,

남양홍씨(南陽洪氏)는 신유장군(申劉 將軍)의 후취로 3남 2녀를 낳았다고 합니다.

 

 

 

남양홍씨 묘에서 길을 따라 조금더 오르면 신유(申劉) 및 정부인묘(貞夫人墓)가 있어,

 

 

 

세운지 오래지않아 보이는 비석이 있어,

정부인 문화류씨 합 부 건좌(貞夫人 文化柳氏 合 祔 乾坐)와,

포도대장 삼도수군통제사 평산신공 휘유지묘(捕盜大將 三道水軍統制使 平山申公 諱瀏之墓)의 비문이며,

 

 

 

신유(申瀏,1619~1680)는 조선 중기 칠곡 출신의 무신으로,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경숙(景淑) 호는 봉하(鳳下) 장절공(壯節公) 신숭겸(申崇謙)을 시조로 하는 평산신씨이며,

1619년(광해군 11)에 태어 났으며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문인 였으며,

1645년(인조 23) 27세로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 등 여러 무직을 거쳐,

1658년(효종 9)에 함경북도 병마우후로 있을때 청나라의 요청을 받아 소총부대를 이끌고 흑룡강 영고탑(寧古塔)에 출병하여,

러시아의 스테파노프 함대를 섬멸 시켰는데,

이를 나선정벌 이라 하며 이 원정의 전말을 북정일기(北征日記) 라는 기록으로 후세에 남겼습니다.

전공으로 가선대부로 특진(特進) 되었으며,

경상좌도병마절도사, 황해도병마절도사를 거쳐 경상우도병마절도사 겸 삼도수군통제사, 포도대장을 지냇습니다. 

관직에 있으면서 청렴과 근면, 위엄과 덕이 병행하여 여러 내·외직을 두루 거쳐 명성과 공적이 있었으며,

1680년(숙종 6)에 향리인 약목에서 사망 하였습니다.

 

 

 

합장한 전처 문화류씨(文化柳氏)는 2녀를 낳았고,

묘소는 송노골 유좌로 두었으나 2011년에 지금의 자리로 합폄(合葬)하였다고 합니다.

 

 

 

유적지(遺蹟地) 뒤편의 시묘산 중턱에 자리한 신유장군 묘소에서 내려다 보이는 풍경으로,

가까이는 호암지의 주변과 멀리로는 칠곡 왜관의 모습이 아스라이 들어 옵니다.

 

 

 

그의 후손들은 구한말까지 약 40여 명의 무과 출신자를 배출하여 무문(武門)으로 "영남무반 제일가"로 명성을 얻었으며,

러시아군과 접전였던 제 2 차 나선정벌(羅禪征伐)의 영장으로,

북정일기(北征日記)를 남겨 당시의 기록을 알수 있는 자료가 되었던 신유장군(申劉 將軍)을 기리는 곳으로,

경북 칠곡의 신유장군 유적지(申劉 將軍 遺蹟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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