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전주를 여행 하면서,

호남지역 명승의 하나인 전주의 "한벽당(寒碧堂)'을 찾았습니다.

 

한벽당(寒碧堂)은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한벽당은 전주 8경의 첫 번째로 손꼽히는 곳으로,

한 여름 더위를 피할 수 있는 피서지로 유명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벽당의 아래에는 옛 철길였던 터널이 있어,

일제강점기의 옛 전라선 열차가 다니던 철길로 1981년 철도 이설사업으로 새 노선이 놓여져,

황인성 북전주역에서 신리역까지 시내 중심가를 지나던 13.7km의 철길은 사라지고 철길로서는 그 생명을 다하게 되었습니다.

 

 

 

한벽당(寒碧堂)으로 오르는 초입에는,

한벽당 사적을 적은 한벽당기적비(寒碧堂紀跡碑)가 있어,

1957년에 김문옥(金文鈺, 1901~1960)이 비문을 지었으며,

 

 

 

한벽당(寒碧堂)은 1404년(태종 4) 월당(月塘) 최담(崔霮)이,

71세에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하여 세웠다고 하며 처음의 이름은 월당루(月塘樓)였다고도 하며,

그 뒤 사람들이 깎아 세운 듯한 암벽과 누정 밑을 흐르는 물을 묘사한 "벽옥한류(碧玉寒流)"라는 글귀에서,

한벽당(寒碧堂)이라 이름한 것으로 보여 집니다.

 

 

 

한벽당(寒碧堂)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겹처마의 팔작지붕이며,

배면을 제외하고 삼면이 개방되어 있으며 마루 주위에는 머름과 계자난간(鷄子欄干)만이 둘려져 있어,

자연과 일체를 이루려는 누정건축의 특성이 잘 나타내어 주고 있으며,

 

 

 

한벽당은 흔히 한벽루라고도 하는데,

이곳은 예로부터 한벽청연(寒碧晴煙)이라 하여 전주8경의 첫 번째로 손꼽히는 곳으로,

"한벽청연(寒碧晴烟)"은 내가 갠 맑고 청아한 한벽당의 풍경을 가리키는 말이며,

건물은 1683년(숙종 9)과 1733년(영조 9) 등 여러 차례 중수되었으며,

지금의 건물은 1828년(순조 28)에 크게 중수 하였습니다.

 

 

 

정자의 입구에 있는 한벽당(寒碧堂) 현판으로,

월당(月塘) 최담(崔澹, 1346~1434)의 본관은 전주이고,

1362년(공민왕 11) 사마시에 합격하여 임금을 모시는 내시(內侍)의 참관(參官 6품의 관원)에 제수 되었고,

1377년(우왕 3) 문과에 급제했으나 홀로 계신 노모를 모시기 위해 낙향 하여 20여년을 지내다가,

조선 건국후 1398년(태조 7) 중훈대부 지진주사(知珍州事)등을 역임하다 1400년(정종 2)낙향 하였으며,

1404년(태종 4) 전주 팔경의 한 곳에 한벽당(寒碧堂)을 지어 시인묵객들과 어울려 즐기던 중

1416년(태종 16) 71세 되던 해 통정대부 호조참의 겸 집현전 제학에 제수 되었고,

1434년(세종 16) 향년 89세로 일기를 다 하였습니다.

 

 

 

강을 바라보는 정자의 정면에 있는 한벽당(寒碧堂)의 편액으로,

호남의 명핑 강암(剛菴) 송성용(宋成鏞 1913~1999) 선생의 글씨로 전하며,

한벽은 벽옥한류(碧玉寒流)를 뜻하는 것으로 정자 아래로 흐르는 전주천이,

바위에 부딪쳐 흰 옥처럼 흩어지는 물이 시리도록 차고 푸른 기운을 발한다고 해서 유래한 것이라 합니다.

 

 

 

정자 아래의 암벽에는 여러곳에 암각서들이 있어,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1770년~1847)은 조선후기의 3대 명필의 하나로,

이곳 바위 위에 글씨 연습을 하다 잘 써진 글씨는 직접 바위에 새겼는데,

"취리한중" "건곤일월" "수풍(水風)" "백화담" "연비어약" "옥류암" 등이 있었으나 현재는 일부 땅속에 매몰되거나 유실된 것도 있으며,

 

 

 

창암(蒼巖)이 명필로 그의 이야기 중에 한벽당 근방에서의 부채장수 이야기가 전하고 있어,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이 어느 날 초라한 몸차림으로 한벽당 산마루에 걸터앉아 삼복의 찌는 듯 한 더위를 피하고 있는데,

때마침 그곳을 남루한 옷차림을 한 부채장수가 등짐을 짊어지고 누각에 올라 짐을 내려놓고 시원한 냇바람에 잠이 들고 말았는데,

“부채는 여름이 한철인데 부채의 원선(圓扇)이 저렇게 밋밋해서 쓰겠는가” 혼자 이렇게 중얼거린 창암(蒼巖)은,

때마침 더위를 피할 겸 모든 부채에다 글을 써 해두었고 이윽고 잠에서 깬 부채장수는,

자기 부채에 먹칠을 하듯 가득가득 글씨를 써 놓은 것을 보고 아연 실색(失色)하여,

“그나마 이 생업마저 망쳐 놓으려는 당신은 도대체 무슨 속셈이오”라고 대들자,

창암(蒼巖)은 “임자 몰래 글을 쓴 것은 실례로되 그냥 밋밋한 원선보다는 졸필(拙筆)이나마 기왕 쓴 것이니 갖고 나가보오”라고 말하여,

부채장수가 부채를 들고 남문 쪽으로 들어갔는데 사람들이 명필 이삼만(李三晩)의 글씨라 하여 부채가 그 자리에서 다 팔려 버렸다 합니다.

 

 

 

정자 바로 앞의 바위에는 최월당(崔月塘)과 한벽당(寒碧堂)의 암각서가 있고,

 

 

 

정자의 바닥은 우물마루를 두었고 3면은 계자난간(鷄子欄干)을 돌렀으며,

공포는 2익공식의 구조이며 쇠서(牛舌)에는 당초문을 초각(草刻)하였으며 연꽃모양의 주두가 특이 하고,

 

 

 

한벽당(寒碧堂)에는 수많은 시문(詩文)과 기문(記文)의 편액을 볼수 있어서,

 

 

 

정자의 안쪽에서는 또하나의 한벽당(寒碧堂) 현판을 볼수 있어, 

김예산(金禮山)이 9세에 썼다는의성김예산구세근서(義城金禮山九歲謹書)의 낙관이 보이고,

 

 

 

한벽당(寒碧堂)에는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찾아와 시를 읊고 풍류를 즐겼던 곳으로,

이곳의 경치를 찬양한 23개의 시문(詩文)이 시판(詩板)으로 올려져 있고,

 

 

 

2기의 한벽당 중수기(寒碧堂重修記)가 있어,

1897년 한벽당을 중수할 때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1833~1906)이 쓴 중수기와,

1932년 18대손 최민열(崔敏烈)의 중수기 기문(記文)이 있습니다.

 

 

 

1815년 초의선사(草衣禪師)는 서울 가던 길에 명필 이삼만(李三晩)을 이곳에서 교우하며 남긴 등한벽당(登寒碧堂)의 시(詩)로,

전의당수사(田衣當水樹)    농사꾼차림으로 물가 정자에 다다르니

운시고왕주(云是故王州)    이곳은 왕이 태어난 고을이라 하지

곡정수성원(谷靜수聲遠)    계곡은 고요한데 새 소리 멀리 들리고

계징수영유(溪澄樹影幽)    맑은 시냇물에 나무 그림자 그윽히 비치네

체상최만일(遞商催晩日)    바쁜 장사치는 저문 길을 재촉하고

적우세신추(積雨洗新秋)    흠뻑 내린 비에 씻은 듯 산뜩한 가을

신미개오토(信美皆吾土)    진실로 아름다운 우리 땅이여

등임녕부루(登臨寧賦樓)    누각에 올라 어찌 노래하지 않으리

 

 

 

또한, 이곳을 노래한 옥담(玉潭) 이응희(李應禧,1579∼1651)의 시(詩)가 있어,

屢策羸驂作遠遊 晩登寒碧騁雙眸   누차 여윈 말 채찍질해 먼 길 나서 / 저물녘 한벽루에 올라 경관을 조망하노라

孤帆逆浪看漁艇 萬玉隨風見水鷗   물결 거슬러 오르는 외로운 돛단배 어선을 보고 / 바람 따라 나는 만 점의 옥 같은 백구가 보이네

十里瓊沙明落照 千重翠峀挹淸幽   십리 고운 백사장에는 낙조가 환하고 / 천 겹 푸른 산봉우리는 맑고 그윽하여라

黃流十酌難成醉 正値賢東禮客秋   막걸리 열 잔 마셔도 좀처럼 취하지 않으니 / 바로 어진 주인이 손님 대접하는 때 만났구나

 

 

 

정자는 불규칙한 암반에 맞추어 높낮이가 다른 돌기둥으로 전면 기둥을 세우고,

뒤쪽은 마루 밑까지 축대를 쌓아 누각을 조성 하였으며,

 

 

 

호남의 명승으로,

시인 묵객 뿐만 아니라 길 가던 나그네도 이곳에서 쉬어가던 곳으로,

세월의 흐름으로 옛날의 모습을 찾기는 어렵지만,

주변과 조화를 이룬 단아한 모습과 탁 트인 시야로 사람들의 눈길을 잡고 잇습니다.

 

 

 

한벽당 옆에는 아담한 규모의 요월대(邀月臺)가 있어,

 

 

 

정자 앞에는 한벽당(寒碧堂)과 요월대(邀月臺)의 각자를 볼수 있으며,

 

 

 

요월대는 최담(崔霮)의 후손이,

일제강점기인 1920년에 추가로 곁에 지은 정자로,

6.25동란으로 파손되어 1986년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으며,

 

 

 

이름 그대로 요월대(邀月臺)라면,

달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동향(東向)이어야 하는데 남향으로 지어 놓아 사람들의 지적이 있으나,

 

 

 

1칸 규모의 맞배지붕의 정자를,

"동향으로 세운다면 곁에있는 한벽당(寒碧堂)과 어울릴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달을 맞이하는 다락"이라는 의미의 요월대(邀月臺) 현판으로,

왼손 악필법으로 유명한 석전(石田) 황욱(黃旭)의 왼손 글씨 이며,

 

 

 

정자 입구의 후면 암반에서도 요월대(邀月臺)의 암각서를 볼수 있습니다.

 

 

 

한벽당(寒碧堂)과 요월대(邀月臺)는,

앞으로 흐르는 전주천과 정면의 남고산을 바라보는 풍광은,

운치 있는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듯 합니다.

 

 

 

호남의 명승이며 전주8경의 첫 번째로 손꼽히는 곳으로,

조선초에 월당(月塘) 최담(崔澹)이 세워 수많은 시인 묵객이 찾았으며,

600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아름다운 한벽청연(寒碧晴煙)의 정자인,

전북 전주의 한벽당(寒碧堂)과 요월대(邀月臺)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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