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안동을 여행하면서,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의 군자마을에 있는 침락정(枕洛亭)을 찾았습니다.

 

안동의 군자마을은 조선조 초기부터 광산김씨 예안파(光山金氏 禮安派)가,

20여 대에 걸쳐 600여 년 동안 세거해 온 외내에 있었던 건축물 중 문화재로 지정된 것과 그 밖의 고가들을,

1974년 안동댐 조성에 따른 수몰을 피해 새로 옮겨 놓은 오천유적지로 많은 문화재가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군자마을에 있는 침락정(枕洛亭)은,

경상북도의 유형문화재 제4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침락정(枕洛亭)의 외문을 들어서면 수직사(守直舍)가 있고,

 

 

 

수직사(守直舍)는 정면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잡석기단(雜石基壇) 위에 세워진 납도리집으로,

간소한 양식으로 지은 중앙에 마루를 두고 좌우 양쪽에 방을 둔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의 구조이며,

 

 

 

수직사(守直舍)를 지나면 다시 협문과 건물이 보여,

 

 

 

중문으로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는 협문을 들어서면,

 

 

 

침락정(枕洛亭)이 자리하고 있어,

침락정은 의병대장이던 김해(金垓)의 아들인 매원(梅園) 김광계(金光繼, 1580~1646)가 1608년에 건립한 누정으로,

일명 운암정사(雲巖精舍)라고도 하는데, 대청 뒤쪽 벽에 지금의 당호와는 다른 운암정사(雲巖精舍)라는 편액이 걸려 있어,

후진을 모아 강론하는 데도 사용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는 곳으로,

원래 정자가 있던 곳은 배산임수의 강안(江岸) 대지였으며 근처에는 수직사(守直舍)를 비롯한 초가 3~4동이 있었다고 하며,

김광계는 대암(大庵) 박성(朴惺)·한강(寒岡) 정구(鄭逑)·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에게 사사하였으며,

광해군(光海君, 1575~1641)의 난정을 멀리하고 침락정에 은거 하였다고 하며,

1974년 12월 안동댐 건설로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에서 탁청정(濯淸亭)·후조당(後彫堂) 등의 건물과 함께 현재의 위치로 이건 되었습니다.

 

 

 

침락정(枕洛亭)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정자로,

왼쪽에 4칸통 대청을 두고 오른쪽에 2칸통 온돌방을 배치한 구조로 되어 있으며,

대청은 전면에 분합문(分閤門)을 달아 마루방으로 꾸미고,

배면을 제외한 세 면에는 쪽마루를 설치하여 동선의 편의를 도모 하였으며

건물의 구조 양식은 자연석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전면에 원주를 세운 5량가 홑처마 팔작지붕 입니다.

 

 

 

침락정(枕洛亭)의 현판이며,

안으로 들어가는 문은 모두 닫혀있어 내부는 들여다 볼수 없습니다.

 

 

 

침락정(枕洛亭)을 세운 김광계(金光繼, 1580~1646)는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이지(以志)이며 호는 매원(梅園)으로  안동(安東) 오천(烏川) 출생으로,

어려서부터 예법에 밝았고 사리가 분명 하였고 박성(朴惺), 정구(鄭逑), 장현광(張顯光)에게 수학 하였으며,

광해군 때는 시국의 혼란함을 싫어해 심성 공부를 필두로 학문에만 전념하였으며,

인조반정 후에도 역시 시류에 편승하여 출세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아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는데,

경상감사 김시양(金時讓)의 천거로 동몽교관(童蒙敎官)과 재랑별감(齋郞別監)을 제수받았으나 사양하였고,

그의 학덕에 감복한 감사 이경여(李敬輿)가 도내의 선비들을 가르치는 도훈장(都訓長)에 임명하기도 하였으나 받아 들이지 않았고,

낙동강 변에 정사(精舍)를 짓고 후진을 양성하는 데에만 오로지 매진 하였으며,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장현광(張顯光)이 격문을 보내 의병장에 추대 하였는데,

이 때 김광계(金光繼)는 상중이었는데 임금이 욕을 당하고 신하들이 죽임을 당하는 때를 맞아 신하된 사람으로서 결코 보고만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또한 고례(古禮)에는 상중에도 관직에 등용하기도 했다는 주위 사람들의 권유를 받아들여 이를 수락하여 군사를 일으키려고 할 즈음,

곧 난이 평정된 관계로 불발에 그쳤으며,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일으켜 다시 대장으로 추대 되었으며,

군사를 이끌고 한양으로 진격하던 중 풍기를 지나 죽령을 넘으려는 차에,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쪽을 향해 통곡하며 군사를 해산 하였습니다.

청에 굴복한 치욕이 있은 뒤 자신의 서재인 침락정(枕洛亭)에 은거하며 말년을 보냇으며 저서로는 매원유고(梅園遺稿)가 있습니다.

 

 

 

정자(亭子) 이름을 지니고 있으나 수직사(守直舍)를 비롯한 초가 3, 4동이 있었다고 하며,

학문을 강론하고 시(詩)를 짓기 위한 모임을 열기도 하였고,

의병출신 유사(儒士)들의 문도수학소(聞道修學所)로도 쓰였을것으로 추정 할수 있는 곳으로,

경북 안동의 군자마을에서 찾은 매원(梅園) 김광계(金光繼)의 정자, "침락정(枕洛亭)"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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