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칠곡의 문화재 탐방에서,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에 있는 동산재(東山齋)를 찾았습니다.

 

동산재(東山齋)는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 이암(耳巖)이라 불리는 귀바우 동쪽에 위치하며,

재사(齋舍)로 들어가는 입구는 홍살문을 높이 세워 두었고,

 

 

 

입구 옆에는 커다란 연지가 조성되어 있으며,

 

 

 

동산재(東山齋)로 들어가면서 배치도를 보고 건물의 위치를 보아 둡니다.

 

 

 

홍살문을 지나면,

가장 먼저 광주이씨(廣州李氏) 문중의 비석을 만나게 되고,

 

 

 

안쪽에는 비각이 있고 귀암(歸巖) 이원정(李元禎)의 신도비가 있어,

비문은 1796년(정조 20) 영의정 번암 채제공(蔡濟恭)이 찬(撰) 하였다고 하며,

 

 

 

이원정(李元禎)의 신도비(神道碑)의 모습으로,

비석의 받침돌인 귀부가 아주 독특한 표정을 보이고고 있습니다.

 

 

 

동산재(東山齋)는 경상북도의 문화재자료 제50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광주이씨(廣州李氏) 석전문중(石田門中)의 대표 재사(齋舍)로,

동산재(東山齋)는 낙촌(洛村) 이도장(李道長, 1603-1644)을 비롯하여 장자(長子)인 귀암(歸巖) 이원정(李元禎, 1622-1680),

그리고, 장손(長孫)인 정재(靜齋) 이담명(李聃命, 1646-1701)으로 3대의 재사(齋舍)를 통칭하는 이름 입니다.

 

 

 

동산재(東山齋) 앞에는 가운데 둥근섬을둔 연지가 있어,

 

 

 

연지의 형태는 완전한 장방형은 아니지만,

선비사상을 나타내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표현으로 보이고,

 

 

 

동산재(東山齋) 담장앞에는,

수령 350여년의 보호수로 지정된 돌배나무가 있으며,

 

 

수령 350여년의 돌배나무는 지금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흔적을 볼수 있습니다.

 

 

 

동산재(東山齋)의 정문인 무실문(懋實門)은 닫혀 있지만,

 

 

 

왼쪽에 세운지 오래지 않아 보이는 관리사쪽은 트여 있고,

 

 

 

관리사 옆에는 협문이 개방되어 있어,

재사(齋舍)로 들어갈수 있게 해 두었으며,

 

 

 

협문을 들어서면 가장먼저 만나게되는 소암재(紹巖齋)로,

소암재는 1750년 낙촌 이도장의 장손이며 귀암 이원정의 장자인 정재(靜齋) 이담명(李聃命, 1646-1701)의 별사(別祠) 봉향을 위하여 세운 재사로,

소암재(紹巖齋)라 현판하게 된 것은 부친인 귀암 이원정의 덕업을 이어받았다 하여 유림에서 지은 재호(齋號) 입니다.

 

 

 

소암재(紹巖齋)는 정면 4칸, 측면 1칸 규모이며,

평면 구성은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양측으로는 방 1칸씩을 둔 전형적인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의 구조로, 

양측 방 전면에는 쪽마루를 두었고 방 뒤에는 반침을 두어 수장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마루앞 처마아래에는 소암재(紹巖齋)의 현판이 있고,

 

 

 

소암재(紹巖齋)의 기둥은 자연석 초석 위에 대청 전면 중앙 기둥에만 두리기둥을 사용했고 그 외는 네모기둥을 세웠으며,

주상부는 별 다른 장식이 없는 간략한 민도리식으로 꾸몄고 각 방의 앞쪽 쪽마루 밑에 난방을 위한 아궁이가 설치되어 있고,

상부 가구는 3량가로 간략하게 결구했으며 지붕은 골기와를 이은 홑처마 팔작지붕집 입니다.

 

 

 

마루 안쪽에는 동산재(東山齋)의 현판이 있으며,

 

 

 

재사(齋舍)의 내력을 알려주는 소암재기(紹巖齋記)의 기문(記文)을 볼수 있습니다.

 

 

 

소암재(紹巖齋)의 주인 이담명(李聃命, 1646-1701)의 자는 이로(耳老) 호는 정재(靜齋)로,

왜관읍 석전리 출신으로 미수 허목에게 사사하여 1666년(현종 7)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670년 24세에 대과에 아원(亞元)으로 급제하여,

수찬, 교리, 도승지, 공조참판, 예조참판, 영남관찰사, 대사헌, 대사성, 부제학, 이조참판 등을 역임 하였으며,

경신환국(1680)으로 부친인 이원정(李元禎)이 참화를 당하는 것을 보고,

너무나 원통하여 부친의 피묻은 적삼을 기사환국(1688) 으로 복권될 때까지 10년동안 입고 지냈다고 하며,

1694년(숙종 20) 갑술옥사로 창성으로 6년간 유배되었는데,

"생사는 두렵지않으나 늙으신 어머니를 모시지 못하고 멀리 떠나니 간장이 끊어지는 것 같다"고 하며,

유배지에서 팔순 노모를 그리며 읊은 사노친곡(思老親曲) 12장을 한글로 짓기도 하였습니다.

경오년 영남지방에 심한 가뭄이 들어 수확기에도 거둘 곡식이 없게되자 조정에서는 이담명(李聃命)이 경상도관찰사로 나가게 되어,

큰 흉년을 만나 부역을 모두 면제해 주고 죽을 끓여서 굶주린 백성들을 진휼(賑恤)했으며 선정을 베풀음에,

도민들이 그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영사비를 세웠습니다.

저서로는 진정총람(賑政總攬), 도안기(道眼記), 서전차의(書傳箚疑), 기뇌홍(記雷虹)등의 많은 잡저(雜著)를 남겼고, 정재문집(靜齋文集) 8권이 있습니다.

 

 

 

소암재의 오른쪽에는 동산재의 정문인 무실문(懋實門) 안쪽에 이르게 되어,

무실문을 마주하고 낙촌정(洛村亭)이 자리하고 있어,

 

 

 

낙촌정(洛村亭)은 1913년 낙촌(洛村) 이도장(李道長)의 휘행(徽行)과 의덕(懿德)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재사(齋舍)로,

그는 종친간 친목과 후진계도를 위한 목적으로 입춘회(立春會)를 창설하여 매년 1회 모임을 가져 여러가지 행사를 하였으며, 

이도장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자손들이 그 유지를 받들어 계승해왔으며,

낙촌정이 세워진 후에는 이 재사를 종친간 친목과 강학의 장소로 활용함과 아울러 유림제현들을 초빙하여 경서를 강(講)하기도 하고,

시문(詩文)을 낭송하며 상호 인격도야와 미풍양속의 유지발전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낙촌정(洛村亭)의 주인 이도장(李道長, 1603-1644)은 왜관읍 매원리 출신으로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태시(泰始) 호는 낙촌(洛村)으로, 

종숙(從叔) 이영우(李榮雨)의 양자로 입계(入系) 하였고 한강 정구(鄭逑)와 여헌 장현광(張顯光)에게 사사하였으며,

1630년(인조 8) 28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에 보임되고 사근찰방, 성균관박사로서 주서(注書)가 되었으며,

병자호란 때 사관(史官)으로서 어가를 따랐으며 그 뒤 지제교, 수찬, 합천군수를 지낸 뒤,

병환으로 집에 머무르는 동안 임금이 어의와 약을 여러 번 내리기도 하였고 조정에서 뒤에 응교와 사간으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고,

관직을 사임하고 향리에 머무르는 동안 흉년으로 어려운 인동, 선산 고을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상소를 올렸으며,

"잉진시폐소(仍陳時幣疏)"를 올려 백성을 위한 제왕어세지도(帝王御世之道)를 강조하였는데,

이는 당시 서원 및 형교의 폐단과 지방관속들이 백성을 수탈하는 작폐를 근절시키고,

바른 사풍진작을 위해 참신하고 덕망높은 분으로 교관을 가려 뽑아 써야한다는 실상을 건의하여 시정하도록 한 것이며,

1644년(인조 22)에 향년 42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저서로는 낙촌집(洛村集)과 남한일기(南漢日記) 등이 있으며,

아들인 귀암(歸巖) 이원정(李元禎)으로 인해  의정부 좌찬성 양관 대제학으로 추작(追爵) 되었습니다.

 

 

 

낙촌정(洛村亭)의 현판이며,

 

 

 

낙촌정(洛村亭)의 건물 구성은 정자가 입지한 지형은 얕은 경사지이며 건물은 이런 지형에 맞춰 건립되어,

지대가 낮은 전면은 기단을 반 층 가량 높여 축조하고 방과 마루를 꾸몄고,

기단이 높아 전면 기단 우측에 7단 시멘트 계단을 설치해 오르내리도록 했으며,

 

 

 

평면 구성은 다소 독특하여 중앙에 온돌방 2칸을 배치하고 그 좌우 마루 1칸씩을 대칭되게 배열시킨 평면 구조를 취하고 있고,

온돌방과 마루 전면으로는 반칸 규모의 퇴칸에 툇마루를 놓아 온돌방 좌우에 놓인 마루와 연결되도록 했으며,

퇴칸 툇마루 앞에는 간단한 구조의 난간을 세워 돌렸는데 일반 정자보다 바닥구조가 높은 관계로 난간이 설치된 마루는 마치 누마루처럼 보여지며,

 

 

 

낙촌정(洛村亭)은 정면에 방 앞에 설치하여 접어 열 수 있게 만든 큰 문인 사분합문(四分閤門)을 두었고,

 

 

 

전퇴 주상부는 주칸의 창방과 장혀 사이에 소로를 끼워 보강한 소로수장집으로 꾸몄고,

가구는 간략한 3량가이며, 지붕은 홑처마에 골기와를 이은 팔작지붕으로,

경상북도 지역의 일반적인 정자의 구조와 형태를 취하고 있으나 평면 구성에서 다소 특이하여,

중앙에 온돌방을 배치하고 좌우로 대청을 대칭 배치한 것은 다소 드문 평면 구성으로 호남지역의 정자 양식과 닮아 있습니다.

 

 

 

낙촌정(洛村亭)은 중앙에 있는 방의 옆면도 사분합문(四分閤門)을 설치하여,

건물의 명칭도 "낙촌정(洛村亭)"여서 재사(齋舍)라기 보다는 정자에 가까운 건축양식을 보여 주며,

 

 

 

마루에는 낙촌정기(洛村亭記)의 기문(記文)이 있고,

 

 

 

낙촌정(洛村亭)의 가운데에 위치한 2칸의 방은 트여 있고,

 

 

 

실내는 3면을 넌출문인 사분합문(四分閤門)을 두어 아주 밝은 편이며,

 

 

 

온돌방 뒤로는 반칸 규모의 벽장이 시설되어있고,

방안에는 이도장(李道長)의 유지를 이어 오는듯 후손들이 친목과 강학의 장소로 활용하고 있는 흔적이 보입니다.

 

 

 

동산재(東山齋)는 낙촌정을 중심으로 좌(左)에는 경암재,

우(右)에는 소암재가 위치하고 있는 그리 흔치않은 품(品)자형의 재사(齋舍)를 이루고 있어,

 

 

 

품(品)자형의 건물배치 가운데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낙촌정(洛村亭)은,

마루에서 내어다 보는 풍광은 가장 뛰어난듯 합니다. 

 

 

 

낙촌정의 왼쪽에는 경암재(景巖齋)가 자리하고 있어,

 

 

 

경암재(景巖齋)는 1903년에 귀암(歸巖) 이원정(李元禎)의 유덕과 공적을 기리기 위해 유림들이 뜻을 모아 세웠으며, 

재사(齋舍)는 홑처마 팔작 지붕의 좌측 2칸은 온돌방, 우측 2칸은 마루가 대칭되게 배열된 좌실우당형이며,

 

 

 

건물 구성은 좌측 2칸은 온돌방, 우측 2칸은 마루로 서로 대칭되게 배열하고 전면 전체에 퇴칸을 둔 좌실우당형으로,

구조는 사고석 쌓기한 기단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전퇴칸에만 두리기둥 나머지는 네모기둥을 세워 심벽으로 마감한 뒤 창호를 달았고,

대청은 전면으로만 벽 없이 개방시키고 나머지는 판자벽에 울거미띠장 널문을 달았으며,

 

 

 

주상부는 간략한 구조인 민도리로 꾸몄고 상부 가구는 5량가이며,

온돌방 창호는 세살문이고 방 뒤로는 수납공간인 반침이 있으며,

대청은 전면으로만 벽 없이 개방시키고 나머지는 판자벽에 울거미띠장 널문을 달았습니다.

 

 

 

경암재(景巖齋)의 현판으로,

이원정(李元禎)의 호가 "귀암(歸巖)"이라 경모(景慕)한다는 뜻에서 경암재(景巖齋)라 하였으며,

 

 

 

기문(記文)인 경암재기(景巖齋記)의 편액이 마루에 있고,

 

 

 

마루에서 온돌방으로 향하는 문은 3분합문을 달아 두었으며,

 

 

 

문위로 지나가는 보는 휘어진 나무를 그대로 사용하여,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건물이지만 자연스러움이 묻어 납니다.

 

 

 

2칸의 방은 하나로 트여 있고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으며,

뒷벽에는 벽장을 둔 모습이 보이고,

 

 

 

경암재(景巖齋)의 방에서는,

광주이씨(廣州李氏) 석전문중(石田門中)의 종친간의 회합의 장소로 쓰이는지 벽에 걸린 가계보를 볼수 있으며,

 

 

 

동산재(東山齋)를 돌아보고 나오면서,

재사(齋舍) 권역의 처음으로 마주했던 관리사의 아궁이가 들어 옵니다.

 

 

 

광주이씨(廣州李氏) 석전문중(石田門中)을 대표하는 재사(齋舍)로,

재사(齋舍)의 배치 구조로는 특이하게 흔치않은 품(品)자형을 이루고 있으며,

가까이에 광주이씨(廣州李氏)종택인 귀암고택(歸巖古宅)있어 함께 찾을만한 곳으로,

경북 칠곡의 재사(齋舍) 문화재인 동산재(東山齋) 입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