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한옥마을을 다녀 오면서,

한벽당을 돌아보고 오목대(梧木臺)와 함께 있는 이목대(梨木臺)를 찾았습니다.

 

전주 한옥마을은 한국의 전통 건물인 한옥(韓屋)이 800여 채나 밀집되어 있고,

전동성당, 경기전, 풍남문, 전주향교, 한벽당등의 문화재가 있으며,

현대의 빠르게 변화하는 도시화 속에서 옛 것을 그대로 간직한 전주한옥마을은,

한국의 옛 전통을 맛보고 즐길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여 많은 이들이 찾는곳이기도 합니다.

 

 

 

오목대(梧木臺)와 이목대(梨木臺)는,

전주 한옥마을에 위치한 경기전(慶基殿)에서 동남쪽으로 약 500m 떨어진 곳에,

흙으로 성을 쌓았던 흔적이 남아 있는 언덕에 자리하고 있어 나무계단을 따라 조금 올라야 하며,

 

 

 

나무계단을 따라 오르다 뒤돌아 보면,

전주 한옥마을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는 정경을 즐길수 있고,

 

 

 

언덕을 오르면 조선왕조의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고려의 3도도순찰사(三道都巡察使)로 있을 당시 군사를 이끌고 잠시 머물렀던 장소인 오목대(梧木臺)와,

비각인 이목대(梨木臺)가 자리하고 있어 전라북도 기념물 제1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목대(梨木臺)는 조선 태조의 5대조인 목조(穆祖)이안사(李安社)의 출생지로 전하여 오는 곳으로,

목조(穆祖)가 어릴 때 이 곳에서 진법놀이를 하면서 살았던 유적지로 알려져 있으며,

그러한 내용은 용비어천가에도 나타나 있으며,

 

 

 

이목대(梨木臺)에는 비석이 있어,

고종의 글씨인 "목조대왕구거유지(穆祖大王舊居遺址)"라는 제액이 기록되어 있는데,

비각(碑閣)은 원래 오목대의 동편 높은 대지 위에 있었으나 도로확장공사로 이곳에 옮겨 세웠으며,

전하는 바에 의하면 전주 이씨의 시조 이한(李翰) 공 이후 목조(穆祖)이안사(李安社)에 이르기까지 누대에 걸쳐 이곳에서 살았으나,

목조대에 이르러 전주부사와의 불화로 이곳에서 함경도로 옮겨간 것이,

이성계로 하여금 조선조를 건국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으므로 이를 하늘의 뜻이라고 여겼다고 합니다.

 

 

 

이목대 옆에는 정면 5칸 측면 4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의 거대한 누각인 오목대(梧木臺)가 있어,

고려 우왕(禑王) 6년(1380년) 금강으로 침입한 왜구가 퇴로를 찾아 남원으로 내려오자,

이성계(李成桂)가 이들을 맞아 운봉(雲峰)싸움에서 대승을 거두고 돌아오는 길에,

목조(穆祖)가 살았던 이 곳 오목대에서 친족을 불러모아 야연(野宴) 을 베풀었다는 곳으로,

 

 

 

오목대(梧木臺)의 현판으로,

악필(握筆)의 독특한 필체로 유명한 고창군 출신의 서예가 석전(石田)  황욱(黃旭 1898-1993)의 91세에 쓴 좌수서(左手書)로,

석전(石田)  황욱(黃旭 1898-1993) 전주에서 주로 활동하였고 호는 석전이며,

금강산인,백련산방,태평노인, 평화노인,칠봉거사, 모악산인의 필명으로,

1980년대 이전인 70세까지는 해서와 행서 초서를 썼지만 70세 이후 손떨림 현상인 수전증이 악화되어,

송곳을 감아쥐듯 붓을 쥔 악필로 바뀌어 일체의 기교가 배제된 마음과 손이 일치되어야 되는 심법의 글씨체로 바뀌어,

90세 이후 많은 작품을 남긴 서예가 이기도 합니다.

 

 

 

태조 이성계는 조선왕조를 개국하고 나서 여기에 정자를 짓고 이름을 오목대(梧木臺)라 했으며,

이곳에 오동나무가 많았기에 언덕의 이름을 오목대라는 설이 있으며,

 

 

 

지금의 오목대(梧木臺)는 1988년에 다시 지어진 누각으로,

 

 

 

옆면의 돌계단을 통하여 오목대(梧木臺)의 누마루로 오릅니다.

 

 

 

고려 말기에는 일본의 정치·정세가 극도로 혼란하여 일본이 변경지방민을 통제하지 못했던 탓으로 노략질이 더욱 극심해 졌으며,

고려말엽에는 전국적으로 피해를 입었는데 경상도·전라도·충청도 지역의 내륙지방이 피해가 가장 심했고,

특히 심산유곡인 지리산 근처에서 까지 노략질을 당하여,

1380년 지리산 근방의 사근내역(沙斤乃驛 : 함양)에 집결하고 있던 왜구의 잔당을 섬멸하기 위해서,

고려는 이성계를 최고 지휘관으로 삼아 운봉을 넘어 황산 서북쪽의 정산봉(鼎山峰)으로 나아가 왜구를 크게 무찌르게 되어,

 

 

 

고려의 이성계는 왜구 아지발도(阿只拔道)의 무리를 정벌하고,

말 1,600여 필을 얻고 기타 무기도 많이 노획 했는데 이를 황산대첩(荒山大捷) 이라고 하며,

황산대첩에서 승리하고 개선하던 이성계 장군은 돌아 오는 길에 자기의 뿌리가 있는 이곳에 들러,

전주이씨 종친을 모아 놓고 승전을 축하하는 연회를 열었는데 술에 거나하게 취한 이성계는 춤을 추면서,

중국의 한고조 유방이 불렀다는 대풍가(大風歌)를 불러 역성혁명을 통한 천하제패의 흉중을 드러 내었습니다.

 

 

 

오목대(梧木臺)의 마루 위에는 "대풍가(大風歌)"의 편액이 있어,

유방이 항우를 물리치고 천하를 평정한뒤 고향 패현으로 돌아가 친척과 친지들을 모시고 잔치를 베풀고 스스로 이노래를 지어 불렀으며,

그후 유방은 한고조가 되었으니 대풍가(大風歌)야 말로 "야심가(野心歌)"가 되어 버렸으니,

大風起兮雲飛楊(대풍기혜운비양)          큰 바람이 일어나서 구름이 날아 오르다

威加海內兮歸故鄕(위가해내혜귀고향)    위세가 해내에 떨치고 고향으로 돌아도다

安得猛士兮守四方(안득맹사혜수사방)    어디서 용맹한 무사를 얻어 천하를 지킬거나

 

 

 

오목대(梧木臺)와 이목대(梨木臺)는 경기전과 더불어,

조선왕실의 위엄을 상징하는 유적으로 구한말 국운 쇠퇴기에 고종에 의해 한층 더 성역화 되었다고 하며,

 

 

 

1988년에 다시 지어졌으나,

화려하고 웅장한 조선후기의 왕실 누각의 모습을 찾을수 있으며,

 

 

 

조선중기의 호조참판(戶曹參判) 등을 지낸 문신 저헌(樗軒) 이석형(李石亨 1415~1477)의 "연상 즉차감사운(宴上 卽次監司韻)"으로,

完山今日故人三 邂逅相逢盛宴參   오늘 완산(完山:전주)의 좋은 벗 셋이 있어서/ 모처럼 서로 만나 성대한 연회를 가졌네

召伯棠陰春已早 楚王宮畔興初酣   소공의 아그배나무 그늘에 봄빛 벌써 푸르렀고/ 초왕의 궁정 뜰엔 흥취 한창 무르녹네

盤中白雪堆魚膾 案上黃金擘乳柑   소반 위엔 백설 같은 생선회가 쌓였고/탁자 위엔 황금 같은 유자가 고여놓았네

飮盡千杯萬杯酒 平生行樂數湖南   천만 순배 술잔에 진창으로 취해서/한평생 향락을 여기 호남에서 만끽하네

 

 

 

가람 이병기(李秉岐)가 노래한 오목대(梧木臺)의 글이 있어,

뒤에 오목대를 나는 매양 오른다

허술한 주필각(駐驊閣)은 외로이 서 있으며

즐비한 몇만 가옥이 내려다 다 보인다.

그 옆의 자만동(滋滿洞)은 목조(穆祖)의 고적지요

그 뒤의 발산(鉢山)은 이르노니 발이산(發李山)

과연 그 오백 년 왕기가 여기 결인(結因) 하였던가

 

 

 

오목대(梧木臺)의 마루에서,

이목대(梨木臺)의 비각과 주변 풍경을 돌아보고,

 

 

 

나무 계단을 따라서 전주한옥마을로 내려가는 길을 잡습니다.

 

 

 

조선왕조의 뿌리인 목조(穆祖)이안사(李安社)의 유허가 있는 곳으로,

전주한옥마을의 언덕에 자리하고 있어 한옥마을을 내려다 보는 풍경이 있는 곳으로,

전북 전주의 오목대(梧木臺)와 이목대(梨木臺)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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