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칠곡의 문화재 탐방에서,

칠곡군 지천면에 있는 칠곡 사양서당 강당(漆谷 泗陽書堂 講堂)을 찾았습니다.

 

칠곡 사양서당 강당(漆谷 泗陽書堂 講堂)은 경상북도의 문화재자료 제11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안으로 들어가는 대문은 안으로 닫혀 있지만,

 

 

 

담장을 따라 왼쪽으로 돌아가면,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야 하는 협문은 열려있어 들어갈수 있으며,

 

 

 

협문을 통하면 사양서당 강당(泗陽書堂 講堂) 뒤편으로 들어오게 되어,

칠곡 사양서당 강당(漆谷 泗陽書堂 講堂)은 대문채와 강당 그리고 담장으로 일곽을 이루고 있으며,

 

 

 

사양서당(泗陽書堂)은 조선 중기의 유학자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가,

일생 동안 학업을 닦던 칠곡군 지천면 사수동(泗水洞)에 1651년(효종 2)에 창건 되었으며,

그 후 1694년(숙종 20)에 지금의 장소 웃갓마을 발암(鉢巖) 아래로 이건하여,

한강(寒岡)을 주벽으로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를 배향하고 송암(松巖) 이원경(李遠慶)을 별사에 모셨습니다.

 

 

 

사양서당(泗陽書堂)의 중심 건물인 강당은 북동쪽을 향해 자리잡고 있으며,

강당인 경회당(景晦堂)은 정면 5칸 측면 1칸 반의 규모로 단정한 형태의 이익공계 맞배지붕으로,

평면은 가운데 3칸의 넓은 우물마루 대청을 두고 그 좌우에 온돌방을 둔 형태인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 구조이며,

전면에는 반칸 규모의 툇간을 두었습니다.

 

 

 

사양서당(泗陽書堂)에서 주벽으로 배향하는 정구(鄭逑,1543~1620)는 조선 중기 문신으로,

자(字)는 도가(道可)이고, 호(號)는 한강(寒岡)이며, 시호(諡號)는 문목(文穆)이다

5세에 이미 신동으로 불렸으며 10세에 "대학"과 "논어"의 대의를 이해 했다고 하며,

1555년 성주향교 교수인 오건(吳健)에게 수학하고,

1563년에 이황(李滉)을, 1566년에 조식(曺植)을 찾아 뵙고 스승으로 삼았으며 성리학(性理學)을 배웠고,

1563년 향시(鄕試)에 합격했으나 이후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 연구에 전념 했는데,

1573년(선조 6) 김우옹(金宇顒)이 추천해 예빈시참봉(禮賓寺參奉)에 임명됐으나 나가지 않는 등 여러 번 관직에 임명 되어도 사양 하다가,

1580년 비로소 창녕현감(昌寧縣監)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통천군수(通川郡守)로 재직하면서 의병을 일으켜 활약 했으며,

 

 

 

생사군(生祠君)의 옥사가 일어나자 관련자를 모두 용서하자고 상소하고는 고향으로 내려 갔으며,

1593년 선조의 형인 하릉군(河陵君)의 시체를 찾아 장사를 지낸 공으로 당상관으로 승진한 뒤,

우부승지, 장례원판결사·강원도관찰사·형조참판 등을 지냈습니다.

1613년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구하고자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으며,

전체적으로 중앙 관직보다는 지방의 수령으로 더 많이 활약 하였고,

향리에서 유생들을 가르쳤는데, 경학(經學)과 산학(算學), 병학(兵學), 풍수(風水)에 이르기까지 정통 하였습니다.

특히 예학(禮學)에 밝았으며 당대의 대학자요, 명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던 인물로,

인조반정 후 이조판서로 추증 받고 영의정에 증직 되었으며,

회연서원(檜淵書院), 천곡서원(川谷書院), 운곡서원(雲谷書院), 관산서원(冠山書院) 등과 통천(通川)의 경덕사(景德祠)에 제정(祭亭) 되었습니다.

 

 

 

사양서당 강당(泗陽書堂 講堂)은 조선 중기 칠곡군 지역 서원 강당의 건축적 특성을 잘 보여 주고있어,

단정하고 간결하고 견실한 건축 형태와 3칸의 넓은 대청과 온돌방이 대칭적으로 구성된 평면,

이익공 양식의 구조 등이 돋보이는 건물로 서원 건축 연구의 좋은 자료로,

전반적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한 편이며 근자에 창호 및 서까래 등을 수리 하였습니다.

 

 

 

강당의 전면에는 사양서당(泗陽書堂)의 현판이 있고,

 

 

 

강당(講堂)은 막돌 허튼층쌓기 기단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원기둥을 세웠으며,

기둥 등의 재목은 비교적 굵고 견실 합니다.

 

 

 

3칸의 넓은 우물마루 대청을 과 왼쪽의 온돌방이 보이고,

 

 

 

방으로 들어가는 문위에는 경회당(景晦堂)이 현판이 올려져 있고,

 

 

 

마루에서 방으로 향하는 크고 작은문이 2개가 있어,

작은 문은 문이라기 보다 창의 용도에 가까워 보입니다.

 

 

 

1칸 규모의 방은 깨끗하게 관리되어 있고 밝은편이며,

 

 

 

다시 마루 건너에는 같은 구조의 방이 있어,

 

 

 

문위에 현판이 없는것 외에는 왼쪽의 방과 같은 모습이며,

 

 

 

서당 강당(書堂 講堂)이다 보니 넌출문인 분합문은 찾을수 없고,

오른쪽의 방도 밝고 깨끗합니다.

 

 

 

사양서당(泗陽書堂)은 창건 당시에는 강당 외에,

묘우(廟宇)와 강당, 폄우제(貶遇齋), 정완재(訂頑齋), 봉하문(鳳下門), 양현청(養賢廳), 주고(廚庫) 등이 있었으나,

1868년(고종 5)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헐리고 강당인 경회당(景晦堂)만 남아 있어,

지금의 사양 서당에는 강당인 경회당을 비롯하여 솟을대문과 최근에 지은 변소 등 3동의 건물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상부 구조를 살펴보면 기둥 위의 공포는 출목이 없는 이익공 형식으로,

대들보 방향으로 초익공 쇠서를 끼우고 그 위에 주두와 이익공 쇠서를 올린 형태며,

이익공 쇠서와 직교되게 두공을 결구하고 그 위에 툇보를 올려 서까래와 도리를 받게 했으며 대들보와 종보를 겹쳐 올린 5량가 입니다.

 

 

 

강당(講堂)의 마루에서 보이는 대문채로,

대문채는 5칸 규모의 맞배지붕의 구조이며 대문 곁에 방과 고방 등을 두었으며,

 

 

 

대문채와 연이어 있는 좌,우의 담장 모서리 안쪽에는,

노거수 나무가 한그루씩 양쪽으로 서있습니다.

 

 

 

사양서당(泗陽書堂)에 배향 되었던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는 한강 선생의 고제(高弟)로서,

연산 혼조시 관직에서 물러난 뒤 만년(萬年)에 스승 주위에 머물면서 스승인 한강(寒岡)을 도우다가,

한강(寒岡)이 세상을 떠나자 이윤우는 호상(護喪)이 되어 장례를 주관하였으며 그의 언행록을 집필하고 유교와 유적을 모았으며,

한강(寒岡)의 유명(遺命)이기도 한 "오선생례설(五先生禮說)"을 간행 하였습니다.

이윤우는 공조참의지제교를 거처 가선대부이조참판이 증직(贈職)되고 사제문(賜祭文)이 내려 졌으며,

사후에는 회연(檜淵), 사양(泗陽) 등 서원(書院)에 단독 배향되고 오산서원(鰲山書院)에 봉향(奉享) 되었습니다.

 

 

 

강당(講堂)은 기단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원주를 세웠으며,

대들보 위에는 도리방향 첨차와 보 방향 화반을 ‘十’자형으로 짜 맞춘 받침을 놓고 종보를 결구 하였고,

종보 위에는 꽃모양의 장식과 구름 모양으로 꾸민 판대공을 놓고 종도리와 장여를 받게 했습니다.

 

 

이윤우(李潤雨)와 함께 사양서당(泗陽書堂)에 배향 되었던 송암(松巖) 원경(遠慶)은,

진락당(眞樂堂) 김취성(金就成)에게 사사하였고 그 후 경학 공부에 전심하였으며,

당대의 석학 오건(吳健), 강유선(康惟善), 여암(呂巖), 송사이(宋師㶊) 등 제현(諸賢)과 도의(道義)로 교유(交友)하고,

높은 뜻을 함양하기 위해 스스로 면려하여 고상한 인격과 학식을 이루었으며,

1651년(효종 2)에 향인(鄕人)들이 한강 선생의 숭고한 업적을 받들어,

일생 동안 학업을 닦았던 사수(泗水)에 서원을 세워 한강(寒岡)을 주벽(主壁)으로 봉안 하였습니다.

 

 

 

서당(書堂) 이라기 보다 서원(書院)에 가까웠으며,

칠곡 지천지역의 유풍과 건축양식을 살펴볼수 있는곳으로,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유허가 있는,

경북 칠곡의 문화재, 사양서당 강당(泗陽書堂 講堂)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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