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영천을 여행하면서,

영천시 창구동에 있는 고려 말의 누각인 조양각(朝陽閣)을 찾았습니다.

 

금호강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위에 자리하고 있는,

영천 조양각(永川朝陽閣)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4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조양각(朝陽閣) 주변에는 소공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영천출신의 일제 강점기 조선의 배우 왕평(王平, 본명 이응호)이 지은 "황성옛터" 노래비가 있어,

이곡은 1927년 어느 여름날 황해도 백천 여인숙에는  순회 악극단의 연극사들이 장마속에 갇혀 오도가도 못하고 있을때,

허물어진 옛 궁터인 개성의 만월대를 연상하며 잡초만 무성한 찾는이 없는 무너진 왕조의 애잔함과,

민족이 처한 일제하의 역사적 상황과 개인적 처지를 비관하며 만들어진 "황성옛터"로,

그해 가을 서울 공연에서 가수 "이애리수"를 통해 발표했을 때 관객들의 반응은 대단 하였다고 하며,

그러나 가사를 지은  왕평(王平)은 일본 경찰에 끌려가 모진 고초를 당하고  공연 금지곡이 되고 말았으며,

1943년 평북 강계에서 "돌아온 아버지"란 연극 공연중 사십고개를  넘기지 못하고 요절(夭折)하고 말았습니다.

 

 

 

산남의진비(山南義陳碑)가 있어, 

산남의진산남의진비(山南義陳)은 고종의 밀지로 영천에서 조직하여 청송, 포항 일대에서 활약한 의병으로,

대장 정환직(鄭煥直), 정용기(鄭鏞基) 부자 순국 기념비로 비석에는 수 많은 의병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으며,

1907년 1대 아들 정용기 대장은 입암 전투에서 순국 하였고,

2대 아버지 정환직 대장은 청하 동대산 뿔밭(각전)에서 체포되어 대구로 끌려가다 영천 감옥에 투옥되고,

이 곳 조양각 아래에서 총살 당하였는데 정환직이 감옥에서 남긴 절명시가 전하고 있습니다.

身亡心不變(신망심불변)    몸은 죽으나 마음은 변하지 않으리

意重死猶經(의중사유경)    의리는 무거우나 죽음은 오히려 가볍도다

後事憑誰託(후사빙수탁)    대의의 뒷일은 누구에게 부탁할꼬.

無言坐五更(무언좌오경)    뜻을 못전하고 임종이 다가왔네

 

 

 

소공원의 한쪽에는,

조선시대에 영천을 거쳐갔던 군수나 관찰사의 공덕비 등의 많은 비석을 볼수 있으며,

 

 

 

조양각 일원은 조선시대 때에 부산에서 한양에 까지 이르는 영남대로의 중간지점으로,

금호강변의 조양각에서 왜의 조선통신사가 기점으로 이용 했던 곳으로,

조선통신사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침략전쟁을 사과하며 국교 재개를 요청한 후인,

1607년부터 200여년간 12차례에 걸쳐 일본을 다녀온 외교 사절단 입니다.

 

 

 

조양각(朝陽閣)은 고려 말 부사 이용(李容)이 건립한 관속 누각으로 서세루(瑞世樓)라고도 하며,

1368년(공민왕 17) 고려 말에 명원루(明遠樓)로 창건되어 여러 차례 시대의 변란에도 지금까지 우뚝 서있는 영천을 상징하는 유적으로,

 조양각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누각으로 손꼽히는 경상남도 밀양의 영남루·진주의 촉석루 등과 함께 영남 3루라고도 전하며,

안동의 영호루·울산의 태화루·양산의 쌍벽루·김천의 연자루와 합쳐 영남 7루라고 기록하기도 합니다.

 

 

 

조양각(朝陽閣)의 현판이며,

조양각 내부에는 정몽주(鄭夢周) 등 112명이 쓴 120여 편의 한시와,

서거정의 명원루기(明遠樓記)와 6편의 중수기(重修記), 2편의 상량문(上樑文)등,

많은 시문(詩文)과 기문(記文)의 편액이 있다고 하나 안으로 들어갈수 없어 볼수는 없습니다.

 

 

 

기록을 통하여 조양각(朝陽閣)의 연혁을 살펴보면,

고려 말 부사 이용(李容)이 1368년(공민왕 17)에 창건 했다고 하며,

1482년 군수 신윤종(申允宗)이 동서별실을 고쳐 동실을 청량당(淸凉堂), 서실을 쌍청당(雙淸堂)이라 이름을 고쳤으며,

1485년에도 명원루를 중수하고 포주(苞廚)·구영(九楹)을 별도로 지었다고 하며 1592년 7월 27일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1638년 군수 한덕급(韓德及)이 명원루 터에 현재의 규모인 누각 15칸과 협각 3칸을 지어 조양각이라 했으며,

1676년 군수 이만봉(李萬封)이 중수했고 1702년 군수 권영경(權寧經)이 중창 하였습니다.

1742년 군수 윤봉오(尹鳳五)가 중창 하였고 누를 서세루(瑞世樓), 내문을 남덕문(覽德門), 외문을 곤구문(昆邱門)이라 했으며,

1762년 군수 조재득(趙載得)이 다시 중수하였고 1804년 군수 이의교(李義敎) 때,

외문인 곤구문이 5월에 화재로 소실되어 같은 해 10월에 중건하고 내의루(來儀樓)라 했으며,

중건된 외문 내의루는 고루로 사용되었다고 하며 그 후 1870년과 1886년에 각각 중수 되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인 1921년 가을에 군수 장윤규(張潤圭)가 수선했고,

그 후 일본인들이 조양심상소학교를 건립하면서 누각의 내외문을 비롯한 부속건물을 모두 철거 했습니다.

해방후인 1947년과 1956년, 1983년에도 군수 최효경, 군수 박돈양, 시장 마용수가 중수 했으며,

가장 최근인 2006년 손이목 시장때 초석 일부 교체, 방의 창호와 벽을 복원하고,

서까래 교체, 번와, 단청 등의 전면 해체를 통해 중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어

이처럼 조양각은 건립된지 640여 년이 지나도록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중창·중건·중수·수선 등이 이루어져 지금의 모습으로 서있습니다.

 

 

 

조양각(朝陽閣)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오른쪽 협칸의 뒷열과 중간열 칸에 방을 두고 나머지는 마루로 구성한 단순한 평면이며,

건물 가장자리 전체에 계자각난간을 두른 헌함을 두었고 그 하부를 누하공간으로 처리 하였고,

진입은 일반적으로 강에 면한 누각의 특성상 배면진입으로 처리 했으며,

구조는 암반 위를 정지하고 큼직한 자연석 초석 위에 건물전체를 원형기둥을 세워 오량가의 가구를 완성하였습니다.

 

 

 

영천을 대표하는 인물로 월원루(明遠樓) 낙성식 때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1337~1392)의 시(詩) 청계석벽(淸溪石壁) 입니다.

淸溪石壁抱州回(청계석벽포주회)    맑은 시내 돌벼랑은 고을을 안고 도는데

更起新樓眼豁開(갱기신루안활개)    다시금 새 누각 이룩하니 눈이 활짝 트이네

南畝黃雲知歲熟(남묘황운지세숙)    남쪽이랑 누른 벼는 풍년이 왔음을 알리고

西山爽氣覺朝來(서산상기각조래)    서산의 서늘한 기운은 아침이 되었음을 깨닫네

風流太守二千石(풍류태수이천석)    풍류를 좋아하는 태수는 녹봉이 이천석인데

邂逅故人三百杯(해후고인삼백배)    옛 벗을 우연히 만났으니 술이 삼백 잔이라

直欲夜深吹玉笛(직욕야심취옥적)    곧바로 밤이 깊어 옥피리를 불면서

高攀明月共徘徊(고반명월공배회)    밝은 달 높이 휘어잡아 함께 배회하고자 하네

 

 

 

조양각(朝陽閣)은 보현산에서 발원한 자호천과 고현천 두개의 강이 양쪽으로 흘러,

조양각 일대에서 다시 하나로 합해지는 지점인 현 위치에 세워진 영천의 상징적 고적 건축물로,

금호강변 북쪽 벼랑인 청석바위 위에 남동향으로 앉아 있는 조양각은 현재 정면 5칸, 측면 3칸의 중층 누각으로,

현재의 모습은 1638년에 이루어진 것으로,

조양각 주변으로 협각·내문·외문 등은 일제강점기인 1921년에 소실 또는 철거되어 지금까지 복원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조양각(朝陽閣)의 마루에 올라보지 못한 아쉬움을 접고서,

금호강변으로 내려가 봅니다.

 

 

 

강변으로 내려가는 길은 나무계단으로 다니기 편하게 해두었고,

내력을 알수 없는 정자가 자리해 있습니다.

 

 

 

조양각(朝陽閣)에는 영천의 지형을 봉황새의 형국으로 파악한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이 내재되어 있어,

봉황은 오동나무에만 앉는 새이므로 오동이 자라는 "조양(朝陽)"이 필요로 하고,

봉황새가 조양의 오동나무에만 앉아 있는 세상은 상서로운 세상이므로 바로 서세루(瑞世樓)가 되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112명이 쓴 120여 편의 한시의 시액(詩額)이 남아있을 정도로,

수많은 관료와 시인묵객이 다녀간 영남을 대표하는 3대 누각으로,

개인이나 문중의 누정이 아님에도 문을닫아 관리하는 것이 아쉬웠던 곳으로,

경북 영천의 금호강변의 누각 조양각(朝陽閣)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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