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영천으로의 유적지 답사에서,

영천시 임고면 양항리에 있는 정몽주(鄭夢周)를 배향하는 서원인,

임고서원(臨皐書院)을 찾았습니다.

 

임고서원(臨皐書院)은 경상북도 시도기념물 제62호 로 지정 되었으며,

 

 

 

이곳에 임고서원이 들어서게 된 것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부모 묘가 서원 뒤편 부래산에 있기 때문으로,

부래산 기슭에는 포은(圃隱)의 부 일성부원군 운관(云瓘) 묘와 어머니 변한국부인 영천 이씨 묘가 함께 있으며,

서원 바로 옆에 묘소를 지키는 계현재(啓賢齋)가 자리해 있는데,

이곳은 19세인 1355년(공민왕 4년) 부친이 세상을 뜨자 정몽주는 묘 옆에 여막을 짓고 3년 상을 치렀고,

29세인 1365년에는 어머니가 별세했을 때도 똑같이 3년간 시묘를 살았던 곳으로,

고려의 상례와 제례는 불교 의식에 따랐는데 당시 습속은 사대부도 100일이면 상복을 벗었는데,

당시 생소하기도 했던 성리학에 따른 극히 드믈었던 3년 상의 효행이 있는 유허지 이기도 합니다.

 

 

 

서원의 권역은 너른편 여서,

안내문에 있는 임고서원(臨皐書院) 일원의 배치도를 미리 보아 둡니다.

 

 

 

거대한 자연석으로 비를 세워두어,

"동방이학지조(東方理學之祖)"를 크게 써두었는데,

글씨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유묵 중에 집자(集字)를 하였으며,

 

 

 

후면에는 조선시대 어제어필(御製御筆) 시(詩)를 각자(刻字) 하였는데 내용을 살펴보면,

조선 제19대 숙종(肅宗,1661~1720)의 어필(御筆) 시(詩)

절의천추고(節義千秋高)    절의가 천추에 높으니

평생아경중(平生我敬重)    평생에 내가 존중하도다

열조누포숭(列朝屢褒崇)    열조께서 여러 번 포숭하였거니와

사림숙불용(士林孰不聳)    사림의 누구인들 높이지 않으리오

 

조선 제21대 영조(英祖,1694~1776)의 어필(御筆) 시(詩)

도덕정충긍만고(道德精忠亘萬古)    도덕과 정충은 만고에 뻗치니

태산고절포은공(泰山高節圃隱公)    태산같은 고절의 포은공일세

 

조선 제21대 고종(高宗,1852~1919)의 어필(御筆) 시(詩)

위충대절광우주(危忠大節光宇宙)    높은 충선 큰 절의가 우주에 빛나니

오도동방뢰유공(吾道東方賴有公)    동방의 오도는 공에게 힘입었네

 

 

 

서원(書院)앞에는 돌다리가 놓여 있고,

수령 500여년의 노거수 은행나무가 서있어 경상북도기념물 제6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 나무는 본래 임고서원이 부래산에 있었을 당시 그 곳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임고서원을 이곳에 다시 지으면서 옮겨 심은 것이라고 전해오고 있습니다.

 

 

 

임고서원을 복원하면서 세운 개성의 선죽교(善竹橋) 본떠서 만든 다리로,

한석봉(韓石峯)이 쓴 선죽교 돌비석 또한 탁본하여 세웠으며,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 159호로 지정된 선죽교(善竹橋)는 개성 자남산 남쪽 개울에 있는 다리로,

고려 태조 왕건이 919년 송도(개성)의 시가지를 정비할 때 축조한 것으로 추정되는 길이 8.35m, 너비 3.36m의 화강석으로 축조된 전형적인 널다리로,

정몽주가 귀가 도중 이방원의 부하 조영규 등에게 격살 당한 곳이으로,

원래는 선지교라 불렀는데 포은이 피살되던 날 밤 다리 옆에서 참대가 솟아났다고 해서 선죽교로 고쳐 불렀다고 하며,

고려시대에는 돌난간이 없었으나 1780년(정조 4) 정몽주의 후손 정호인이 개성 유수로 부임하여,

선조의 유적에 우마차가 다님을 안타깝게 여겨 난간을 설치하여 통행을 제한하는 대신 행인을 위하여 바로 옆에 좁은 돌다리를 가설 하였다고 합니니다.

 

 

 

서원(書院) 앞에는 포은선생 숭모기념비(圃隱先生崇慕紀念碑)가 있어,

2011년에 세운 기념비로 파평인(坡平人) 윤사순(尹絲淳)의 글 이며,

 

 

 

구서원을 먼저 찾았으나 문이 닫혀있어 새로이 조성한 서원으로 향합니다.

 

 

 

서원(書院)앞 담장 아래에는 작은 비석이 있어,

"증통정대부공조참의최선매기적비 (贈通政大夫工曹參議崔善梅紀績碑)"로,

최선매(崔善梅 : 1554~1626)의 자는 의수(毅叟), 호는 긍와이며,

부래산(浮來山) 아래에 살던 포은(圃隱)의 원우(院宇)로 옛 임고서원(臨皐書院)의 유생(儒生)이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 서원이 소실될 위기에 있을 때 포은(圃隱)의 영정(影幀)과 위판(位版)을 받들어 기룡산(騎龍山) 석굴속에 피안(避安)시켰으며,

난리가 평정된 후에 서원을 중건하여 다시 안치한 공을 인정 받아 유림의 상소로 1891년에 공조참의로 추증되었습니다.

 

 

 

중층 누각의 임고서원(臨皐書院) 문루인 영광루(永光樓)이며,

 

 

 

문루를 들어서면 서원(書院)의 전형적인 배치형식을 그대로 느낄수 있으며,

임고서원(臨皐書院)은 1553년(명종 8)에 노수(盧遂), 김응생(金應生), 정윤량(鄭允良), 정거(鄭琚) 등,

향내 유림들이 임고면 고천리 부래산(浮來山) 아래 창건을 시작하여,

1554년에 "임고(臨皐)"라 사액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3년(선조 36)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고 이듬해에 다시 사액 되었으며,

1643년(인조 21)에 장현광(張顯光)과 1787년(정조 11)에 황보 인(皇甫仁)을 추가 배향 하였습니다.

그후,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1871년(고종 8)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로 훼철되었으며,

1919년 존영각(尊影閣)을 건립하여 정몽주의 영정을 모시고 향사를 지내 왔습니다.

 

 

 

서원을 들어서면 왼쪽에 비각이 있어,

 

 

 

1999년 성역화 사업의 일환으로 세운 신도비(神道碑)와 비각(碑閣)으로,

신도비는 임금이나 종이품 이상의 벼슬을 한 사람들의 무덤 또는근 유허지 인근에 세워 업적을 기리는 비(碑 입니다.

 

 

 

비각 윗쪽에는 서재인 함육재(涵育齋)가 있어,

서재는 정면 3칸 측면 1칸반 맞배지붕의 아담한 규모이며,

 

 

 

함육재(涵育齋)는 능력과 품성 등을 기르고 닦는다는 의미로,

 

 

 

강당의 동편에는 제사를 준비하거나 제기등을 보관하는 전사청(典祀廳)이 자리해 있고,

 

 

 

전사청 아래에 서재와 마주하는 곳에는 동재인 수성재(修省齋)가 있어,

같은 형태로 마주하고 있는 동재와 서재는 서원(書院) 유생들이 거처하면서 공부하는 건물로 쓰이는 곳이기도 합니다.

 

 

 

동재인 수성재(修省齋)는 주역(周易)의 "두렵기에 마음을 가다듬고 반성한다" 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문루인 영광루(永光樓)를 마주하고 서있는 강당인 흥문당(興文堂)이 있어,

흥문당은 정면 5칸 측면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중앙 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방을 둔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의 구조로 웅장하게 지어져 있으며,

 

 

 

서원(書院)의 중심건물인 강학 공간인 강당은,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강론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임고서원(臨皐書院)의 현판으로 원래의 사액 현판은 없어지고,

당시 명필이었던 영천군수 윤봉오(尹鳳五)의 글씨이며,

 

 

 

강당의 마루 안쪽에는 전서체(篆書體)로 쓴 흥문당(興文堂)의 편액이 있고,

 

 

 

강당의 마루에는 "중용(中庸)"에서 인용한 전서체의 명성협(明誠夾)의 현판과 함께,   

많은 시판(詩板)과 기문(記文)의 편액들을 볼수 있으며,

 

 

 

강당의 마루를 가로지르고 있는 대들모의 모습에서,

흥문당(興文堂) 건물의 웅장함이 느껴 집니다.

 

 

 

정몽주는 1337년 12월 영천 우항리에서 태어 났는데,

모친인 영천이씨 부인이 임신중에 난초화분을 안고 있다가 땅에 떨어뜨리는 꿈을 꾸어 낳았기에 "몽란"이라 이름지어 졌다가,

9살 되던해에 어머니가 물레질을 하다 깜박 잠이 들었는데,

검은 용이 뜰가운데 있는 배나무에 올라 황금빛 비늘을 번쩍이며 배를 따먹기에 깨어나 뒤곁으로 가보니,

포은이 배나무에 올라 배를 따먹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꿈속에서 본 용의 모습과 너무나 닮아 이름을 "몽룡"이라 고쳤다고 하며,

관례를 치를 즈음에 이번에는 아버지 운관이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 신선이 나타나기에 무릎을 꿇고 "어디서 오신 어른입니까? " 하고 물으니,

"나는 주공(周公)이다. 그대 아들은 후세에 이름을 남길 소중한 사람이니 잘 길러야 할것이다" 하고는 홀연히 사라 졌다고 하며,

꿈을 깬 운관공이 곧 관례를 치를것이니 아명을 버리고 꿈속에서 주공을 만났다하여 "몽주"라 고쳐 부르게 하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강당인 흥문당(興文堂)의 서편에는 심진각(尋眞閣)이 자리하고 있어,

 

 

 

유물보호각 심진각(尋眞閣)에는 임고서원의 유물들을 보관하는 곳으로,

임고서원의 유물들은 아래에 있는 "포은 유물전시관"에서 보실수 있습니다.

 

 

 

흥문당(興文堂) 뒤편에는 사당인 문충사(文忠祠)가 자리하고 있어,

제향 공간인 문충사로 들어가는 내삼문에는 "유정문(由正門)"의 현판이 보이고,

 

 

 

묘우인 문충사(文忠祠)는 1980년 정부의 보조로 현재의 위치에 이건 하였으며,

1553년(명종 8)에 창건되어 고려말(高麗末)의 충신(忠臣)인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1643년(인조 21) 장현광(張顯光)을, 1727년(영조 3) 황보인(皇甫仁)을 추가 배향 하였고,

2001년 지봉(芝峰) 황보인(皇甫仁)을 다시 배향 하였다고 합니다.

 

 

 

고려가 망하자 끝까지 지조를 지키며 후진을 육성하고 학통을 계승 시킨 고려의 세 忠臣(충신)이 있어,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년(충숙왕 15)∼1396(태조 5)과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년(충숙왕 복위 6)∼1392년(공양왕 4),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년(공민왕 2)∼1419년(세종 1) 이들의 호가 모두 은(隱) 자가 들어 있어,

흔히 삼은(三隱)이라 부르며 삼은(三隱) 중 한 분이신 정몽주 선생의 위패를 모신 곳이 임고서원(臨皐書院) 입니다.

 

 

 

임고서원을 나와 "포은 유물전시관"으로 향합니다.

 

 

 

포은유물관(圃隱遺物館)의 현판은 전 국무총리 조순(趙順)의 글씨로 전하며,

 

 

 

포은 유물전시관은 정면 7칸 측면 10칸의 공(工)자형 평면으로 면적 419㎡ 단층으로 되어 있으며,

 

 

 

전시관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초상화로,

정몽주(鄭夢周 1337~1392)의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으로 영천(永川)에서 태어나,

1389년(창왕 1) 예문관대제학 문하찬성사가 되어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옹립 하였고,

이성계의 위망(威望)이 날로 높아지자 그를 추대하려는 음모가 있음을 알고 이성계 일파를 숙청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1392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황주(黃州)에 드러눕자 그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방원(芳遠:太宗)의 기지로 실패하였으며 이어 정세를 엿보려고 이성계를 찾아보고 귀가하던 중에,

선죽교(善竹矯)에서 방원의 부하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격살 되었습니다.

포은은 시문에도 뛰어나 시조 단심가(丹心歌) 외에도 많은 한시가 전해지며 서화에도 뛰어 났으며,

고려 삼은(三隱)의 한 사람으로 1401년(태종1) 영의정에 추증되고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에 추봉 되었으며,

중종 때 문묘(文廟)에 배향되었고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 등 11개 서원에 제향 되었으며 문집으로 포은집(圃隱集)이 있습니다.

 

 

 

포은유물관은 포은(圃隱)의 일생과 임고서원(臨皐書院)의 소장유물을 전시실을 나누어 볼수 있어서,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일대기와,

이름에 얽힌 설화, 포은 선생 문집, 임고서원 연혁과 소장 전적 등을 차례로 보실수 있습니다.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우항리의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72호 "포은 정몽주 유허비각(圃隱 鄭夢周 遺墟碑閣)"의 모형으로,

19세인 1355년(공민왕 4년) 부친상을 당해 여묘 삼 년(廬墓三年) 그로부터 10년 후인 1365년 모친상을 당하여 역시 여묘 삼 년(廬墓三年)을 하였는데,

그의 출생지인 우항리에 1389년(공양왕 원년) 당시 영천 군수인 정유(鄭宥)가 효자리(孝子里)라 새긴 비를 세워,

포은 정몽주의 효행을 기리고 있습니다.

 

 

 

유물관에는 보물 제1109호로 지정된 임고서원(臨皐書院) 전적이 전시되어 있어,

임고서원에 소장되어 있는 전적들은 명종 8년(1553)에서 조선 후기까지 있는데 임고서원에 소장되어 있는 전적은 약 200여 책으로,

이 중에서 지정된 것은 10종 25책이며 임고서원에 관련된 책으로 임고서원이 창건한 명종 8년(1553)에서 조선 후기까지의 사정을 알 수 있는 자료로,

서원의 운영과 구성 등 서원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 되고 있습니다.

 

 

 

보물 제1110-1호로 지정되어 있는 "정몽주 초상"은,

1390년(공양왕 2) 공양왕을 추대한 공으로 정몽주가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책록되었을 때 처음 그려 졌다고 하며,

이후 이 원본을 바탕으로 이모(移模)한 초상이 영천의 임고 서원, 개성의 숭양 서원에 전해 졌으나,

임진왜란을 계기로 임고 서원에 봉안되었던 초상만 남게 되었는데 임고 서원 본도 1555년(명종 10)에 이모된 것으로,

현존하는 임고 서원의 "정몽주 초상"은 1555년 본을,

1629년(인조 7) 유림들의 공의에 따라 화사 김식(金埴)에게 다시 그리게 했다고 전하며,

지금의 초상화는 동강(東江) 권오창(權五昌) 화백이 1629년 김식(金埴)의 모본을 저본으로 하여 다시그린 초상화 입니다.

 

 

 

개성 선죽교(善竹矯)에서 이방원의 부하 조영규(趙英珪)에게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디오라마로 재현해 두었고,

 

 

 

성역화가 이루어진 임고서원(臨皐書院)의 모형으로 전시 해두어,

임고서원의 전경을 한눈에 볼수 있습니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을 배향하는 서원으로,

그의 효행과 충절의 일생을 살필수 있는 곳이며,

서원(書院)의 규모와 주변에 조성한 선죽교와 비석 등에서 "성역화"라는 단어에 어울리게,

많은 공을 들여 조성해두어 포은(圃隱)의 유허를 살필수 있는곳으로,

경북 영천의 임고서원(臨皐書院)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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