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안동으로의 문화재 탐방에서,

와룡면 오천리에 있는 광산김씨 예안파 종택의 별당인 후조당(後彫堂)을 찾았습니다.

 

안동 군자마을은 조선조 초기부터 광산김씨 예안파(光山金氏 禮安派)의 세거지로,

오천동에 자리를 잡고 있던 시절 "오천 7군자"라 불리며 높은 명망을 받는 인물들이 있어,

이들은 후조당 김부필, 읍청정 김부의, 산남 김부인, 양정당 김부신, 설당 김부륜, 일휴당 금응협, 면진제 금응훈을 이르는데,

이들은 김효로의 친손과 외손들로 모두 퇴계 이황의 제자들 였으며 당시 안동부사였던 한강 정구가,

"오천 한 마을에는 군자 아닌 사람이 없다" 라고 선성지에 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는데,

그들의 유적을 1974년 안동댐 조성에 따른 수몰로 새로 옮겨 놓은 오천유적지 입니다.

 

 

 

후조당(後彫堂)은 국가민속문화재 제227호로 지정되었으며,

 

 

 

건물의 배치도를 통해 후조당과 사랑채의 위치를 확인합니다.

 

 

 

사주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후조당(後彫堂)이 자리하고 있어,

 

 

 

후조당(後彫堂)은 광산김씨(光山金氏) 오천종택(烏川宗宅)에 부속된 별당(別堂)으로,

조선 선조(宣祖, 1552~1608) 때 임진왜란 이전에 후조당(後彫堂) 김부필(金富弼, 1516~1577)이 건립하였고,

그 뒤 여러 차례 중창되었으며 종택(宗宅)의 정침(正寢)은 근년에 중건(重建)되어 후조당과 사당만이 옛 격식(格式)을 유지하고 있으며,

원래는 경상북도 안동군 예안면 오천동에 있었으나 안동댐 건설로 인하여 1974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지었습니다.

 

 

 

후조당(後彫堂)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ㅡ"자형에 오른쪽으로 2칸 마루와 방을 달아 "ㄱ"자형을 이룬 큰 규모의  별당으로,

6칸 대청 오른쪽으로는 2칸의 온돌이 있으며 연이어 앞으로 돌출한 마루 1칸과 온돌 1칸이 있어 독립된 별당의 모습을 띠고 있는데,

이와 같은 구조는 경상북도 안동 지역에서 흔하지 않은 형식이며,

 

 

 

후조당(後彫堂)의 대청은 민가에서 지을 수 있는 가장 큰 공간이라는 이른 바 "육간대청"으로,

퇴계(退溪)가 선비의 집으로서는 너무 호화롭다고 할 정도이니 당시로서도 흔치 않은 큰 규모로 여겨지며,

대청에는 칸마다 넌출문인 분합문(分閤門)이 있는데 이렇게 큰 대청에 분합문을 온전히 갖추고 있는 예는 매우 드물다 하며,

세월의 무게가 담겨있는 듯 묵직한 분합문을 들어올리면 정남향의 탁 트인 풍경이 시원하게 열리고,

대청과 맞닿은 큰 방의 벽면 역시 위로 들어올릴 수 있는데,

집안 모임 때 방의 벽면까지 들어올려 한 자리에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일수 있도록 했다고 합니다.

 

 

 

방과 방이 이어진 쪽마루에는 동쪽으로 작은 문이 하나 있는데 계단이 없어 출입할 수 없는 문으로,

사람이 드나들 수 없는 곳에 굳이 문을 만든 이유는 아침에 쪽마루로 비치는 햇살을 한지를 통해 부드럽게 즐기기 위해서 였다고 하며,

 

 

 

쪽마루와 연결된 방은 크기는 작지만 삼면으로 큰 창이 달려있어 전망과 채광이 매우 좋으며,

대대로 종손이 거처하던 곳이었는데 삼면으로 큰 창을 낸 것은 자신의 집안과 마을을 한눈에 널리 둘러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방아래에 조그맣게 나있는 온돌발의 아궁이도 들여다 보고,

 

 

 

마루방은 마침 문이 닫혀있어 들어가지 못하고,

뒷면도 쪽마루로 연결된 후조당(後彫堂)의 뒷모습을 들여다 봅니다.

 

 

 

후조당 서편에는 사당이 있어,

사당은 후조당과 더불어 옛 격식(格式)을 유지하고 있으며,

 

 

 

사당(祠堂)은 1칸의 맞배지붕으로 아담한 규모 입니다.

 

 

 

사당에서 후조당을 거처 처음 들어온 사주문으로 되돌아 오면,

 

 

 

동편에 사랑채가 자리하고 있어,

 

 

 

후조당(後彫堂) 종택(宗宅) 사랑채는 본래 영남 북부지역의 전형인 "口"자형 구조의 종택이었으며,

김부필(金富弼, 1516~1577)에 의해 다시 지어진 것으로 전해지며,

본래 안동 예안면 오천동 외말에 있던 광산김씨 예안파의 종택이 안동댐으로 수몰되게 되자 후조당 등과 함께

1974년 이곳으로 일부를 옮긴 것으로,

안방을 포함한 일부 구조물은 안동시 태화동으로 옮겨져서 현재 종택으로 사용 중이며,

유적지 안에는 후조당 대종택의 사랑채만 남아 있어,

 

 

 

후조당 대종택(後彫堂 大宗宅)을 지은 김부필(金富弼, 1516~1577)은 안동 예안 출신으로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언우(彦遇) 호는 후조당(後彫堂)이며,

1537년(중종 32)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유학하면서 김인후(金麟厚)와 교유 하였고,

1556년(명종 11) 41세의 나이로 이황의 문하에 나아가 제자로서의 예를 올렸으며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지만 사양하고 학문에 정진 하였으며,

이에 이황이 “후조주인(後彫主人)은 깨끗한 절개를 굳게 지켜, 임명장이 문전에 이르러도 기뻐하지 않는구나 …….” 라는 시를 지어,

그의 지조와 절개를 높이 평가 하였습니다.

평소 효제를 학문의 근본으로 삼았으며, 일생 "심경(心經)"을 애독 하였다고 하며,

1571년(선조 4) 스승 이황이 사망하자 소의(素衣)·소대(素帶)·소식(素食)하며 심상(心喪) 1년을 행 하였고,

아우 김부의(金富儀), 4촌형 김부인(金富仁), 4촌아우 김부신(金富信)·김부륜(金富倫), 고종 금응훈(琴應壎)·금읍협(琴應夾)과 한 동네에 살면서,

학문을 토론하고 덕업을 권장하여 향리에서는 "오천칠군자(烏川七君子)"라 칭송되었으며,

김부필은 7군자 가운데 대표적 인물로 1570년 이황이 역동서원(易東書院)을 건립할 때 적극적으로 협조하였으며,

1574년에는 조목(趙穆)과 함께 도산서원 건립을 주도 하였고,

구봉령·권호문·조목 등 동문들과 두루 교유하였으며 학문과 행실로서 사림들 사이에 신망이 높았던 인물로,

사후 1822년(순조 22)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문순(文純)의 시호를 내려졌고 예안의 낙천사(洛川祠)에 위패가 봉안되었으며,

저서로는 후조당문집(後彫堂文集)이 있습니다.

 

 

 

군자마을의 후조당(後彫堂) 종택(宗宅)  일원은 고택체험도 가능하여,

장판을 깔고 전기를 놓은 것 외에는 모든 것이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조선시대 양반가에서 하루 밤을 보내는 멋진 경험을 해볼 수 있는데,

고택이다보니 화장실과 세면실은 건물 밖 별도의 공간에 마련되어 있으며,

문화재로 지정된 품격높은 고택에서의 가족과 함께하는 하룻밤도 의미가 있을듯 합니다.

 

 

 

후조당(後彫堂) 종택(宗宅)은 종가의 사랑채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나누어져,

좌 후조당, 우 읍청정의 모습을 갖추고 있어 사랑채의 좌측 담장에는 사주문을 두었는데,

사랑채와 내당을 출입하는 중문 등이 고택의 규모와 다르게 작고 아담하게 지어졌으며,

 

 

 

읍청정(揖淸亭)은 사랑채 옆에 있는 정자로,

후조당 김부필의 아우인 읍청정(揖淸亭) 김부의(金富儀,1525~1582)가 지었으며,

사랑채와 비슷하게 양쪽에 방을 두고 대청이 있는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의 구조로, 

안동 지역의 정자는 휴식이나 놀이보다는 학문을 위한 공간 이었기에 대체로 정자에 방이 마련되어 있으며,

이전되기 전에는 청량산 자락이 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있었다고 전하며,

 

 

 

읍청정(揖淸亭)은 정자를 지은 김부의 호를 그대로 썻으며,

스승인 퇴계(退溪)가 명명하여 친필로 쓴 해서체의 현판으로 "청량산을 바라보며 마음의 때를 씻어 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정자를 이곳으로 이전하면서 뜰 아래 연못을 만들었는데 좁은 터에 만들다 보니 밀려난 느낌이지만 화려하게 꾸미지 않았고,

장방형의 연못으로 선비사상의 표현으로 보이며,

 

 

 

읍청정(揖淸亭)은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의 "ㅡ"자형 건물로 높은 대좌 위에 자리 잡고 있어 앞쪽은 높고 뒤쪽은 낮은 대좌이며,

산비탈의 기울기를 어느 정도 그대로 이용한 것으로 앞면은 들어 올려 낮은 누각 형식의 마루를 삼고 뒷면은 바닥에 닿게 하여 방들을 앉혔고,

높은 대좌의 중간 부분에는 계단이 있어 계단을 통해 뜰에 이르고 뜰 위에서 두 단의 섬돌을 밟고 마루에 오르도록 되어 있으며,

 

 

 

읍청정(揖淸亭)을 지은 김부의(金富儀,1525~1582)는 조선 중기 안동 출신의 유생으로,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신중(愼仲) 호는 읍청정(挹淸亭)으로 아버지는 대사헌 김연(金緣) 형이 후조당을 지은 김부필(金富弼)이며,

안동부 예안현(현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형 김부필과 함께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 하였고,

이황의 신뢰를 입어 역동서원(易東書院) 초대 원장으로 추대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황이 덕성의 함양을 목적으로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에게 제작하도록 했던 혼천의(渾天儀)와 선기옥형(璇璣玉衡)의 수리와 보완 작업을 맡았으며,

1555년(명종 10) 생원시에 합격 하였고 이듬해에 모친상을 당하여 탈상을 마치고 나서 성균관에 유학하여,

성암(省庵) 김효원(金孝元), 파곡(坡谷) 이성중(李誠中)과 교유 하였으며,

1575년 사섬시낭관(司贍寺郎官)에 제수되었으나 형 김부필이 눈병을 앓고 있어서 부임하지 않았고,

1577년에 다시 집경전참봉(集慶殿參奉)에 제수되었으나 풍비(風痺)로 부임하지 못하였습니다.

인품은 전반적으로 소박하고 단정한 것으로 평가되었으며 평소 남을 대할 때에도 공손한 자세를 견지하며 규각(圭角)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문집인 읍청정유고(挹淸亭遺稿)가 오천세고(烏川世稿) 안에 포함되어 전하고 있습니다.

 

 

 

정자의 마루는 정면 4칸 측면 반 칸 규모로 건물의 앞쪽에 나와 있어,

동쪽 끝에는 정면 1칸 측면 1칸 반이 조금 안 되는 규모의 방을 앉혔으므로 이 방의 앞부분 마루는 다른 곳에 비해 폭이 아주 좁은 쪽마루의 형상이며,

쪽마루는 건물의 동쪽 벽과 서쪽 벽으로도 이어지고 앞쪽 마루 면은 "ㄷ"자 형태로 돌아가며 난간을 세웠고,

마루 면 위로 아래에 두 쪽의 판재를 붙이고 위로 오리다리를 올려 위에 엎어 놓은 주발과 같은 모양으로 다듬은 횡목을 올린 난간이며,

아래 쪽 판자의 위 판에는 안상을 배치 하였고 마루 앞으로 나선 기둥은 동쪽의 방 영역은 각재이고 서쪽의 마루 부분은 원주로 되어 있습니다.

 

 

 

읍청정 뒷쪽에는 장판각(藏版閣)이 자리하고 있어,

장판각은 광산김씨(光山金氏) 오천종택(烏川宗宅)의 문집 등의 목판본을 보관하던 수장고이며,

 

 

 

장판각 동편에는 현대식 유물 전시관인 숭원각(崇遠閣)이 있어,

숭원각에는 이 가문 출신들이 남긴 고서와 문집류, 교지, 호적, 토지문서 등이 전시되어 있어,

20여 대 600여 년의 세월 속에서도 매우 중요한 문헌과 유물들을 온전히 보존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고려 초기의 호구단자와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전통요리책으로 선비 대갓집의 음식문화를 적은 수운잡방(需雲雜方),

임진왜란 때 의병장의 진중일기인 향병일기(鄕兵日記) 전투지휘관의 복무지침서인 행군수지(行軍須知) 등을 찾을수 있습니다.

 

 

 

경상북도 안동에서 찾은 종택(宗宅)으로,

고려말 조선초의 건축 양식을 볼수있으며 화려하게 초각한 파련대공(波蓮臺工)은 건물의 품격을 높여 주고 있는 곳으로,

영화 관상, 드라마 광해, 드라마 공주의 남자에서 세조의 별채로 촬영하는등 촬영지로도 인기있는 고택이며,

오천칠군자(烏川七君子)를 대표하는 김부필(金富弼)의 광산김씨(光山金氏) 종택(宗宅) 후조당(後彫堂)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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