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경주 여행에서,

경주시 강동면 다산리에 있는 경주 귀래정(慶州 歸來亭)을 찾았습니다.

 

경주 귀래정(慶州 歸來亭)은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94호로 지정 되었으며,

정문은 닫혀 있으나 담장의 오른쪽을 따르면 뒤편으로 들어가는 문은 개방이 되어 있어,

 

 

 

문을 열고 들어서면,

너른 마당과 함께 초가지붕의 3칸으로 방이 딸린 창고로 보이는 건물이 마주하게 되고,

 

 

 

오른쪽에는 6칸의 긴 와가의 건물이 있어,

구조로 보아 살림채인 안채나 행랑채로 여겨 지기도 하며,

 

 

 

왼쪽에는 토석담장을 두른 일각문이 있어,

귀래정(歸來亭)의 뒤편으로 들어갈수 있으며,

 

 

 

일각문을 들어서면 "ㄱ"자 형태로 건물을 따라 연당이 있어,

 

 

 

정자의 남쪽과 동쪽 둘레를 인공 연못으로 조성하여 연꽃을 심었고,

전면에 있는 연못은 북두칠성의 형상에서 가져왔으며 신선사상을 추구 한다고 하며,

연당의 물은 가뭄이 와도 마르지 않고 일정한 수위가 유지 된다고 합니다.

 

 

 

정자로 오르기전 연당을 따라 한바퀴 돌아 봅니다.

 

 

 

귀래정(歸來亭)은 조선 영조 31년(1755년)에 여강이씨(驪江 李氏)  천서문중(川西門中)에서 집안에서 경영하는 글방으로 세웠으며,

원래 이름은 건물 형태가 눈꽃처럼 육각형이라 하여 육화정(六花亭)이라고 하였으나,

1938년에 문중에서 예조정랑을 지낸 지헌(止軒) 이철명(李哲明, 1477~1523)을 추모해 당호(堂號)를 귀래정으로 바꾸었다고 하며,

 

 

 

260년을 넘긴 귀래정(歸來亭)은 사랑채와 안채가 별도의 공간을 구획하여 전후로 배치되어 있는데,

귀래정은 전면에 있는 사랑채의 당호(堂號)로,

사랑채로서는 이례적으로 정육각형의 평면을 채택하여 정자와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육각형 평면의 정자에는 내부에 온돌방을 두는 경우가 거의 없으나,

이 건물에는 평면의 교묘한 분할로 육각의 평면 내에 방형의 온돌방을 설치하여 사랑채로서의 기능을 하게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는 "귀래정"으로 이름 지은 정자가 여러곳에 있어 경북 영천과 안동에 있고,

전북 순창에서도 찾을수 있는데 귀래정으로 불리는 정자는,

대개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자연과 더불어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긴 중국 동진시대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따온 이름으로,

이철명(李哲明)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귀향부(歸鄕賦)"를 지은 것에 근거 했다고 하며,

그는 기묘사화로 사람들이 화를 당한 것을 개탄해 낙향을 결심한 뒤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모방해 이 시를 지었다고 합니다.

 

 

 

귀래정(歸來亭)의 현판이며,

 

 

 

정자 앞 좌우에는 2개의 괴석이 서 있어 계수나무를 상징 한다고 하며,

 

 

 

주춧돌은 자연석을 이용하였고,

 

 

 

귀래정(歸來亭)의 난간은 안상문양과 연꽃 봉오리 문양으로 장식하였는데,

원래의 난간은 지금보다 훨씬 더 화려하고 섬세 했다고 하여 굽이치는 듯한 구름 문양을 하였다고 하나,

난간을 보수 할 당시는 문화재 지정 이전이어서 문중에서 자비로 하였기 때문에 지금처럼 되었다고 합니다.

 

 

 

귀래정은 동편 옆면으로 오르게 되어 있어,

마루로 오르는 곳에는 신발을 벗어두는 선반이 있어 특이하며,

 

 

 

마루의 전면은 문살 창호를 집의 형태와 같은 육각형으로 하여 멋을 내었으며,

옛이름인 육화정(六花亭)을 떠올리게 하고,

 

 

 

귀래정(歸來亭)의 천정에서는 육각의 건물답게,

주상(柱上)에는 2익공으로 장식하였으나, 일반적인 예와는 반대로 외부에는 제공(諸貢)의 뿌리를 단절하였고 내부에는 초각(草刻)을 하였고,

서까래가 보이는 연등천정과 빗천정, 그리고 우물천정까지 골고루 볼수 있어 구조가 독특합니다.

 

 

 

마루 위에는 2기의 귀래정기(歸來亭記)의 기문(記文)과 2기의 현판을 볼수 있어,

귀래정기에 따르면 "귀래정의 원래 이름은 '육화정(六花亭)' 또는 '육각정(六角亭)'이다.

정자는 규모가 크지 않으면서 앞이 트였고, 야단스럽지 않으면서 그윽하다.

여섯 모서리가 되도록 집을 짓게 된 것은 마주 보고 있는 설창산의 산세가 설화(雪花), 즉 모양이 육각인 눈꽃을 연상시켜서이며,

그래서 '육화정'이라는 편액을 붙이게 되었다." 라는 내용으로 귀래정(歸來亭)의 내력을 살필수 있고,

 

 

 

귀래정(歸來亭) 육각형을 전후로 크게 나누어 두 개의 사다리꼴로 만든 후,

전면에는 대청을 꾸미고 후면에는 사다리꼴에 내접하는 4각형의 방 2개를 들이고 ,

나머지 삼각 부분은 출입공간과 반침으로 꾸몄습니다.

 

 

 

귀래정(歸來亭)의 온돌방은 대체로 깨끗하게 관리가 되어 있어,

 

 

 

방과 방사이에는 서로 연결이 되도록 4짝의 미닫이 문을 두었고,

미닫이 문에도 가운데 문양을 두어 장식성을 더 했으며,

 

 

 

온돌방의 천정은 나무판재로 우물천정을 두었으며,

 

 

 

귀래정(歸來亭)의 마루에서 주변 풍광을 내어다 봅니다.

 

 

 

북두칠성의 형상으로 물이 마르지 않는다는 연당은,

물이 고여 있는듯 하나 맑아서 여러마리의 물고기가 살고 있을 정도이며,

 

 

 

귀래정(歸來亭)의 이름이 있게한 이철명(李哲明, 1477~1523)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유학자로,

본관은 여주(驪州)이며 자는 지지(知之)이고 호는 지헌(止軒)으로,

연산군 1년(1495년)에 진사시에 급제했고, 10년 뒤에 문과에 급제해 병조좌랑, 예조정랑을 거쳐 경주훈도, 홍문관 검교를 역임 하였고,

중종 14년(1519년)에 기묘사화가 일어나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와 충암(沖菴) 김정(金净) 등,

여러 현인들에 대하여 여러 차례 무고를 상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귀향부(歸鄕賦)"를 짓고 1520년(중종 15)에 낙향하여 모친을 봉양하며,

옛 선현들의 서적을 탐독하면서 성리학에 힘써 스스로 "수분명(守分銘)"을 지어 자신의 경계로 삼았으며,

1522년(중종 17) 모친상을 당하여 3년상을 지내던 중 지나친 슬픔이 건강을 해쳐 이듬해 생을 마감 하였고,

문집으로 후손 이화영(李和榮), 이계원(李啓源), 이장원(李長源)이 편집 간행한 지헌일고(止軒逸稿)가 있습니다.

 

 

 

정자의 마루에서 내려와 뒷면에도 한단을 높이고 쪽마루를 두어,

온돌방의 뒷쪽으로도 출입할수 있을뿐 아니라 방을두고 바깥에는 마루로 통할수 있게 해두었고,

 

 

 

쪽마루 아래에는 온돌방에 불을 넣는 아궁이의 모습도 들어 옵니다.

 

 

 

정자로는 드물게 건물 형태가 정육각형을 이루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육각형 건물에는 온돌을 두는 예가 드문데,

이곳에서는 앞뒤로 나누어 앞은 마루로 하고 뒤는 온돌로 하였고,

마르지 않은 북두칠성형의 연당을 둔 특이한 곳으로,

경북 경주의 문화재, 귀래정(歸來亭)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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