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근교의 문화재 탐방에서,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대학리에 있는 경산 상엿집(喪輿庫)을 찾았습니다.

 

자천리 동사(慈川里 同舍)는 국가 중요민속문화재 제266호로 지정된 경산 상엿집으로,

옛날 상엿집은 마을 공동의 상여나 그 제구를 보관하는 건물로 주로 마을에서 떨어진 외딴 산 밑에 두었는데,

경산 상엿집 역시 무척 외진곳에 자리하고 있어 비포장길을 따라 제법 올라야 하며,

 

 

 

상엿집 아래에는 '나라얼 연구소"가 자리하고 있어,

나라얼연구소는 일제강점기 때인 1930년대 경남지역에서 중국 연변으로 집단이주한 조선족 마을에서 오랫동안 사용하던 상여를 구입해 들여 왔으며,

매월 한 차례 명사 초청 특강을 주최하고 2009년부터 매년 자인단오제에서 상여행렬 시연을 하는 것을 비롯하여,

경주시와 경주문화재단 초청 이스탄불 in 경주 2014에서 시연 등 일반인들에게 상여 문화를 보여주기 위한 활동을 하고 있는곳으로,

 

 

 

연구소 건물 벽면에는 장례문화와 관련한 다양한 사진들이 있어,

전통 상복을 입는 방법부터 만정을 든 외국인의 사진과,

 

 

 

국가 무형문화재인 장영민님의 남해 별신굿이 경산 상엿집 앞에서 펼쳐진 모습과,

 

 

 

별신굿 외에 망자의 혼을 모셔오기 위한 작은 가마인 요여의 다양한 모습을 볼수 있으며,

이밖에도 지금은 볼수 없는 장례와 관련한 다양한 사진들을 살필수 있습니다.

 

 

 

연구소 위에는 3개의 크고작은 건물이 있어,

 

 

 

300여년의 역사를 이어오는 자천리 동사(慈川里 同舍)로 불리는 "경산 상엿집"으로,

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 자천리 1533번지에 있던 상엿집은 2009년 3월 15일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대학리 산 144-10번지로 이전 하였는데,

 

 

 

이전하게 된 이유는 영천 자천리 주민이 마을 중간 국유지에 마을 공동소유로 외딴 곳에 두고 사용하던 상엿집이 마을의 확장으로 중심지가 되었고,

오랫동안 상여 등을 사용하지 않음에 따라 2009년 마을 공동의 상엿집을 철거하려 하여 ,

현 소유자인 조원경 목사가 우연히 이 사실을 알고 구입하여 현 위치로 이전한 것으로,

그 후 복원하는 과정에서 상여 관련 물품과 문서(14종 19점)를 비롯 모두 250여 점에 달하는 귀한 자료가 발견되어,

상엿집 1동, 상여 2습, 관련 문헌자료 14점 등이 건축 및 민속학적으로 높은 가치를 인정받아,

2010년 8월 30일 국가 중요민속문화재 제266호로 지정 되었습니다.

 

 

 

자천리(慈川里) 상엿집은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으로, 

위엄을 갖춘 누각형의 건물로 건축학적 으로도 가치가 높은데,

상량문에 "上之 二十八年 辛卯 十九日 立柱 二十五日 午時 上梁"이라고 적혀 있어 고종 28년(1891년)에 건립된 건물로 여겨 졌으나,

해체 복원하는 과정에서 마루 밑에 “본래의 건물을 3번이나 중수했다”는 내용이 발견되어,

초창은 1731년 이전으로 추정하며,

마을 사람들이 구전으로 전하는 바에 따르면 “지은 지 한 3백 년 쯤 되었다”고 하여 구전이 증명 되기도 한 건물 입니다.

 

 

 

아쉽게도 상엿집의 문은 닫혀 있어 내부를 전부 볼수 없으나,

 

 

 

옆면의 트여진 공간과 창살틈으로 들여다 보며 부분적인것만 볼수 있는데,

 

 

 

상엿집의 마루에는 상두꾼(상여를 메는 사람) 16명씩 총 32명이 드는 대형 상여와,

요여(상여 앞에 앞서 가는 작은 가마로 죽은 이의 혼백을 담는다), 상여를 올려 두는 7m60㎝짜리 방틀, 방상씨, 청룡·황룡 용마루를 모셔 놓았으며,

상여엔 전통매듭과 오방색 천이 곰삭아 있습니다.

 

 

 

상엿집은 지역에 따라 다양한 명칭으로 나타나는데,

경상북도 북부 지역에는 "곳집", "상여집", "상엿집"이라 부르고,

영천 자천리와 그 주변 마을은 "행상집", "생이집", "고새이집", "고생이집" 등으로 다양하게 부르고 있어,

 

 

 

지금은 상여집이 흉가로 변하거나 허물어지고 사라져 찾아볼수도 없지만,

예전 상여집은 주로 산 아래 후미진 곳이나 마을의 외진 곳에 있었는데 흉물스럽다며 또는 귀신 붙었다며 가까이 접근하는 것조차 꺼렸는데,

저 세상으로 떠나는 길에 망자에게 쓰였던 상여가 있는 곳이니 그럴 만도 했습니다.

 

 

 

전통 상여는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후 거의 사라 졌는데,

전통 상여는 이후 합판, 플라스틱, 쇠 등으로 간편하게 만들다가,

나중엔 하관 직후 그 자리서 태워버리는 당시 20만~30만원짜리 꽃상여로 대체 되었는데,

이제는 현대화의 물결로 그마저도 사용하지 않고 관만 옮겨 매장 또는 화장해 버리게 되었습니다.

 

 

 

자천리 동사(慈川里 同舍) 건물은 자연석 기단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우협칸 전면에만 네모 기둥을 세우고,

나머지는 두리 기둥을 세워 기단 상면에 바닥을 높여 누마루처럼 꾸미고 창호와 판벽으로 구체부를 구성 하였고,

전면을 제외한 삼면의 고멕이에는 토석조로 막음 하였습니다.

 

 

 

맞배지붕의 용마루 양단을 수키와를 세워 머거불로 장식한 모습으로,

경산 상엿집은 이전 복원하는 과정에서 상여 관련 물품과 문서(14종 19점)를 비롯하여 모두 250여 점에 달하는 귀한 자료가 발견 되었는데,

관련 문서를 살펴보면 1890년 어간(於間)으로 추정되는 상여 제작 시 지출 내역 기록과,

정유년(1897년) 상여계와 관련하여 경비를 거둔 내역을 적은 기록과 상여를 만들고 제를 지내는 과정에서 술과 안주 등 물자 지원 기록이 있으며,

경자년(1900년) 정월 십오일 상여계에서 계금을 분배하여 이자를 받은 기록과,

임인년(1902년) 정월 십일월 초팔일 상여계 지출기록부 등 역사적인 사료까지 뒷받침 해 주고 있습니다.

 

 

 

경산 상여집은 흙벽을 사용한 일반상여집과는 달리 목부재를 사용하고 있어,

외형은 목재벽인 판벽과 널빤지를 마루 귀틀에 끼워만든 바닥이 특이하며 지붕은 기와로 얹어져 있어 건축학적 가치가 높다고 합니다.

 

 

 

상엿집의 문도 허술하게 해두지 않아,

 

 

 

창호는 정면 어칸 및 좌협칸에 각기 상부에 통둔테 하부에 선둔테를 설치해 판벽에 여닫이 띠장널문을 달아 출입하도록 했고,

우협칸은 어칸에서 들어 갈 수 있도록 판벽에 쌍여닫이 띠장널문으로 설치하여 실을 구분 하였고,

 

 

 

상엿집의 어칸 및 좌협칸의 좌측 면과 후면 벽체는 하부에 판벽, 상부는 살창을 처리했으며 실내 바닥은 어칸 및 좌협칸은 우물 마루를 깔았으나,

우협칸은 장마루이며 장마루 역시 근대 장마루와는 달리 자귀로 치목한 흔적이 선명히 남아 있으며,

주상부는 우주의 경우에 창방을 걸고 주두를 올리고 하부에 초각된 보아지를 설치한 반면,

평주는 주두를 생략하고 초각 없는 보아지를 직교로 결구시켰으며 각 주칸의 창방과 처마도리 받침 장혀사이에는 소로 3개씩을 끼웠고,

상부가구는 3량가로 약간 만곡된 대량 위에 화반대공, 제형판대공의 2종류로 종도리를 받쳤고,

지붕은 홑처마 맞배지붕에 한식 기와를 이었고 건물 배면에는 상여에 사용되는 방틀을 보관하기 위한 거치대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상여집 옆에는 3칸의 맞배지붕으로 또하나의 건물이 있어,

 

 

 

이곳은 옆의 상엿집과는 다르게,

나무판의 거친 부분을 밖으로 하여 벽면에는 문없이 판벽으로 둘러 놓았는데,

 

 

 

이곳은 별도의 문을 두지 않고 옆면의 작은 판재의 문으로 사용한듯 하고,

 

 

 

바닥을 띄운 상엿집과는 달리 하부는 기와와 토석으로 막아두어 특이 하며,

 

 

 

이곳에는 흙을 퍼 나를 때 쓰는 들 것, 삽, 무덤 터다지는 망께 같은 각종 산역(山役) 도구와,

햇볕을 가리기 위해 치는 천막 등 부속품을 보관하는 창고와 같은 역할을 하는곳으로,

상엿집과 엄격하게 구분하여 격을 달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창고 동편에는 또하나의 작은 건물이 자리하고 있어,

 

 

 

돌을 쌓아 올린 기단위에 1칸반 규모의 맞배지붕 구조의 건물로,

사당이나 제를 올리는 곳으로 보여지며,

 

 

 

건물 앞에는 2개의 작은 석등과 음각된 입석송덕(立石頌德)의 입석이 한기 서 있어,

"입석송덕(立石頌德)"은 돌(비석)을 세워 덕업(德業)을 기린다는 의미이며,

 

 

 

여재실(如在室)의 현판이 올려져 있습니다.

 

 

 

상엿집의 공간에서 서편으로 나오면 앞에 사주문을둔 우물이 보이고,

 

 

 

우물 안쪽에는 작은 불상인듯 석조물을 올려두어 눈길이 가며,

 

 

 

우물 윗쪽에는 노거수 소나무 아래에 전각으로 보이는 작은 건물이 있어,

 

 

 

비각으로 보이는 1칸규모의 건물로 어딘지 모르게 허술해 보이는데,

 

 

 

안쪽이 아닌 앞면에 효부와 열부를 모두 갖춘 여성을 정려하는 효열부(孝烈婦)의 글귀가 보이고,

공부자 탄강(孔夫子 誕降) 2479년이라 기록되어 있어 서기 1928년에 세웠슴을 알수 있으며,

 

 

 

작은 정각(旌閣) 안에는 받침없이 2기의 비석이 흙 위에 세워져 있어,

 

 

 

일반적으로 충신, 효자, 열녀에게 나라에서 정표하여 세운 정려각(旌閭閣)으로 여겨 지는데,

처음부터 이곳 산중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 않으며,

이건하여 이곳에 둔것으로 여겨지는데 원래 모자랐는지 옮겨 오면서 부재가 줄었는지 알수 없으나,

원래는 단청이 있는 제법 번듯한 정려각 였으나 지금은 허술하게 쓰러질듯 서있어 안타깝기도 합니다.

 

 

 

내려오면서 주차장의 서편에는 새로지은듯 사각의 정자가 서있고,

 

 

 

곁에는 대형 맷돌의 아랫부분의 석물이 놓여 있습니다.

 

 

 

2000년대 초반 까지만 하더라도 ,

전통 상여는 아닐지라도 시골이나 섬지역에서는 상여의 모습을 볼수 있었는데,

이제는 그나마 찾아볼수 없는 현실이 되어 우리의 옛 풍습중 중요하게 여겼던 제레의 한부분으로,

옛 장례의 모습은 주변에서 찾을수 없게 되었습니다.

장례와 관련한 상엿집 또한 문화재로 지정된 상엿집은 경북도문화재자료 384호인 안동시 일직면 망호리에 있는, 

150년 전인 19세기 초에 건립된 "안동상여집: 1곳 뿐여서,

"자천리 동사(慈川里 同舍)"로 불리는 "경산 상엿집(喪輿庫)"의 가치는,

우리 옛생활의 일부를 보존 하는데 거다란 값어치가 있다고 여겨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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