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근교의 문화재 탐방에서,

대구광역시 중구 미대동에 있는 서당인 "성재서당(盛才書堂)"을 찾았습니다.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9호로 지정된 성재서당(盛才書堂)은,

파군재에서 동화사로 가는 길을 따라 약 2km정도 거리에 있는 미대 마을에서,

북쪽의 三麻山(삼마산)을 향해 1.5km 가량 올라가면 동쪽을 팔공산 계곡물과 접하고,

사방이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산속에 깊숙한곳에 남서향으로 서당과 부속건물이 배치되어 있으며,

 

 

 

서당 입구에는 일각문을 두고,

"양전헌채선생유허비각(兩傳軒蔡先生遺墟碑)"이 자리하고 있어,

 

 

 

이 비(碑)는 성(城)이 완공(完工)된 그 이듬해인,

1737년(영조 13)에 원래의 위치(位置)인 대구남문(大邱南門) 영남제일관(嶺南第一關) 밖에 건립(建立)되었던 것을,

1906년(고종 10) 대구군수(大邱郡守) 박중양(朴重陽)에 의해서 핵(核)이 훼철(毁撤)된 후,

구 달성군청(達城郡廳,현 대구백화점 옆) 부근에 방치(放置) 되었다가,

1932년에 대구 향교 경내로 옮겼고 다시 1980년 영남제일관문(嶺南第一關門)이 중건(重建)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 왔습니다.

 

 

 

방형일랑(方形一廊)의 토담으로 둘려쌓인 비각 안에는,

"양전헌채선생유허비(兩傳軒蔡先生遺墟碑)"가 있어,

비신(碑身)은 규형(圭形) 오석(烏石)으로 높이 259㎝, 폭 90㎝, 두께 44㎝이며,

비개(碑蓋)는 원래 없으며,

비부(碑趺)는 장방형(長方形) 황백색(黃白色) 화강석(花崗石)으로 높이 15㎝, 가로 156㎝, 세로 102㎝ 입니다.

 

 

 

비각옆 오른쪽의 담장을 따라서 돌면,

돌계단이 보이고 성재서당(盛才書堂)이 자리해 있어,

 

 

 

성재서당(盛才書堂)의 3칸 대문 채는 어칸(御間)이 있는 평대문(平大門)으로,

 

 

 

대문에는 숭의문(崇義門)의 현판이 보이고,

평소에는 숭의문은 닫아두고 서당의 오른쪽에 있는 협문을 개방해 두었으니,

방문시에는 옆면에 있는 작은문을 이용하시면 됩니다.

 

 

 

3칸의 대문을 들어서면 기단을 높이하고 성재서당(盛才書堂)이 자리해 있어,

 

 

 

성재서당(盛才書堂)은 조선 인조때의 선비인 양전헌(兩傳軒) 채선견(蔡先見, 1574∼1644)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지은 성재정(成才亭)으로,

1627년 경에 건축된 것으로 전해지며 세월이 흘러 정자가 퇴락하자,

증손인 상정(尙鼎, 1703∼1782)이 1770년 경에 중수하여 성재서당(盛才書堂)이라 개칭(改稱)하고 강학소(講學所)로 사용하여 왔습니다.

 

 

 

서당 건물은 화강암 바른층 쌓기로 높게 축대를 2단으로 설치하고,

정면 4칸 측면 2칸이 배치되어 있는데 정면 가운데 계단이 있어 이곳으로 오르고 내리게 되어 있고,

구조는 자연석 기초 위에 전면에만 원주(圓柱)를 세운 민도리집으로 우물마루를 깐 대청 위에는 오량가에 제형판대공을 세운 형태이며,

건물 네 귀퉁이에 활주(活柱)를 세워 홑처마의 팔작지붕 를 받치고 있고,

건물 전면과 좌우면에는 난간을 세웠는데 귀퉁이는 각을 한번더 잡아 완만하게 처리 했습니다.

 

 

 

서당앞 오른쪽에는 "ㄱ"자 형태의 건물이 있어 관리사 또는 요사채로 보이며,

 

 

 

성재서당(盛才書堂)은 중앙 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방을 둔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의 구조로,

마루로 오르는 계단 위에는 마루의 일부를 할애하여 신발을 두고 마루로 오르기 편하게 해 두었습니다.

 

 

 

성재서당(盛才書堂)의 현판이며,

 

 

 

가운데 마루를 둔 성재서당은 방앞에도 한단을 높이하여 쪽마루를 두었는데,

 

 

 

좌우로 같이 쪽마루를 두었으며,

앞면 뿐만 아니라 옆면까지 마루를 이어 두어서 방의 옆문과도 통하게 해두었고,

 

 

 

중앙의 큰마루 뒤편은 판재로 문을 달아 찬바람을 막고 있습니다.

 

 

 

성재서당(盛才書堂)의 마루에는 많은 편액들이 올려져 있어,

 

 

 

성재서당기(盛才書堂記)의 기문(記文)과 함께 13개의 현액시(懸額詩) 편액을 볼수 있습니다.

 

 

 

서당 왼쪽 2칸의 방을 들여다 보니,

 

 

 

앞쪽에 있는 방으로,

전면의 문은 미닫이와 여닫이의 2중의 문을 두었고,

 

 

 

방의 옆면 위에는,

물건을 얹어 놓기 위하여 벽에 두 개의 긴 나무를 가로질러 선반처럼 만든 시렁(架)이 보이고,

2칸의 방은 서로 분리해 두어,

 

 

 

뒷쪽의 방에는 서고로 쓰는듯 책과 생활용품들이 있어,

 

 

 

책장에는 고서들로 빼곡하게 들어차 있습니다.

 

 

마루를 건너 서편에 있는 오른쪽의 방을 들여다 봅니다.

 

 

 

서편의 방은 2칸이 하나로 열려 있으며,

방의 뒷면에는 2단으로 벽장을 두었는데,

윗쪽은 개방하여 트인 구조이며 아랫쪽은 문을 달아 사용한 모습 입니다.

 

 

 

왼쪽의 동편 방의 옆면에 마루쪽으로 나와보니,

 

 

 

옆면의 방문 위에도 편액이 올려져 있습니다.

 

 

 

성재서당(盛才書堂)의 전신인 성재정(成才亭)을 세운 채선견(蔡先見,1574∼1644)의 자는 명보(明補) 호는 양전헌(兩傳軒)으로,

채응린(蔡應麟)의 다섯째 아들로 어려서 한강 정술(寒岡 鄭述)과 지산 조호익(芝山 曺好益)의 문하에서 수학 하였고,

1617년(光海君, 광해군 9) 생원시(生員試)에 합격 하였으며,

그 후 광해군(光海君) 모후(母后)의 서궁폐사건(西宮幽廢事件)이 일어나자 많은 선비들과 함께 상소를 올려 간(諫) 했으며,

1624년(仁祖, 인조 2) 이괄(李适)의 난(亂)에는 발분창의(發憤倡義)하여 군량미를 모으는 등 크게 활약 하였고,

1626년 仁祖(인조 4) 희릉참봉(禧陵參奉)이 제수되었으나 사퇴하고 그 이듬해 이곳에 성재정(盛才亭)을 지어,

향내(鄕內) 명사인 모당 손천눌(慕堂 孫處訥, 지암 도신수(止岩 都愼修), 쌍봉 정극준(雙峰 鄭克俊), 대암 최동집(臺巖 崔東集)등과,

학문을 강론하면서 말년들 보냈습니다.

연방집(聯芳集)은 선친(先親) 응린공(應麟公)과 양전헌(兩傳軒)의 문집(文集)으로,

이를 간행시(刊行時) 사용(使用)했던 목판각(木版刻)이 아직도 보관되고 있습니다.

 

 

 

성재서당(盛才書堂)을 돌아보고 서당의 서편에 있는 협문을 통해 나옵니다.

서당 옆에는 이곳을 관리하는듯 노인 한분이 거주하고 계시고,

정문이 닫혀 있으면 협문을 이용하시면 됩니다.

 

 

 

팔공산의 자락인 삼마산 아래 깊숙한 곳에 자리하여,

동쪽으로 난 계곡은 사철 맑은 물이 흐르고 있어 주위 소나무 숲과 더불어 자연과의 조화를 한층 잘 이루고 있는곳으로,

대구의 문화재, 성재서당(盛才書堂)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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