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해남을 여행 하면서 국가민속문화재 제232호로 지정된,

해남군 현산면 백포리에 있는 해남 윤두서 고택(海南 尹斗緖 古宅)을 찾았습니다.

 

해남 윤두서 고택(海南 尹斗緖 古宅)은 공재 윤두서 고택 (恭齋 尹斗緖 古宅) 으로도 불리며,

조선 후기의 선비화가인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 1668∼1715)가 살던 집으로,

안채의 종도리 장여 밑의 중수 상량문에 따르면 1670년(현종 11)에 건립되었고, 1811년(순조 11)에 중수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나,

안채 지붕의 회첨골 암막새에 적힌 명문을 근거로 할 경우 윤두서의 사후인 1730년경으로도 추정하며,

 

 

 

전남 해남의 고택 이라면 녹우당(綠雨堂)으로 유명한 "고산 윤선도 고택"을 떠올리게 하는데,

공재고택(恭齋古宅)은 고산(孤山)윤선도(尹善道, 1587∼1671)가 큰 아들인 윤인미(尹仁美)를 분가시키고,

자신도 거처하기 위하여 풍수지리상 명당터에 이 집을 지었으나,

해변에 위치한 까닭에 해풍이 심해 윤선도는 해남읍 연동에서 기거하고 증손인 윤두서(尹斗緖)를 살게 했던 고택(古宅) 입니다.

 

 

 

건립 당시에는 동쪽으로 지은 문간채로 들어가 우측에 사랑채가 있어 전체 48칸에 이르렀다고 전하나,

지금은 문간채와 사랑채는 없어지고 본채 13칸과 곡간채 3칸 및 사당과 헛간 등이 남아 있어,

입구를 들어서면 사랑채가 없으니 오른쪽에 사당을 가장먼저 만나게 되는데,

사당 앞에는 따뜻한 남도를 알려주듯 종려나무가 서 있고,

 

 

 

정면 2칸 측면 1칸반의 맞배지붕의 사당이며,

 

 

 

사당을 마주한 고택(古宅)의 입구에는 노거수 향나무가 한그루 서있습니다.

 

 

 

국보 제240호 이며 18세기 초반의 작품으로,

공재 윤두서 고택 (恭齋 尹斗緖 古宅)의 주인 "윤두서 자화상(尹斗緖自畵像)"으로,

보는 이를 압도하는 강렬한 눈, 장수와도 같은 기세를 느끼게 하는 꼿꼿하게 뻗친 수염, 터럭 한 올도 놓치지 않는 세밀함으로,

강렬한 인상을 주는 자화상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데,

한국을 대표하는 자화상으로 18세기 초 조선 시대 선비 화가인 그의 자화상은 우리 회화사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히기도 하며,

더 나아가서 동양인의 자화상 중 최고라는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고산(孤山)윤선도(尹善道)가 지은 공재고택(恭齋古宅)은,

뒤로는 북쪽의 망매산을 주봉으로 하고 앞으로는 남쪽이 바다로 훤히 트이며,

좌청룡, 우백호의 산세가 뚜렷하여 풍수지리상의 명당터라고 할 수 있는 곳에 자리하고 있어,

 

 

 

13칸으로 되어 있는 본채는 "ㄷ"자형 평면에 용마루에 작은 합각이 있는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고,

동쪽 광의 남면 끝 지붕은 우진각으로 되어 있고 곳간채와 안채 사이에 출입통로가 나 있으며,

안채의 한가운데에는 쌍여닫이 정자살문을 댄 대청을 두고 좌우익사(左右翼舍)에는 방과 주방들을 두어 툇마루를 설치 하였고,

툇마루 위에는 우미량(牛眉樑) 같이 자연스레 굽은 퇴보를 걸고 초각되지 않은 보아지로 기둥의 사괴를 결구시켜 강한 구조를 하고 있습니다.

 

 

 

기단은 산돌 평축 쌓기로 되어 있으며 주초(柱礎)는 덤벙주초를 놓고,

바닷바람의 영향을 막고자 지붕을 높이 쳐들지 않고 푹 덮었으며 벽체는 판벽과 회벽을 방의 용도에 따라 조성하였으며,

 

 

 

건물의 바깥쪽은 두리기둥을 세웠고 나머지는 네모기둥을 세웠고,

홑처마를 사용한 팔작지붕의 건물로 벽체는 판벽과 회벽을 방의 용도에 따라 달리 사용 하였으며,

안채 대청과 서쪽 방 앞에는 툇마루를 구성하고 있고 대청 앞쪽에는 쌍여닫이 "井"자 살문을 달았는데,

대청마루 위의 가구는 자연상태로 약간 굽은 대들보를 걸고 그 위에 판대공을 구성하여 장혀와 굴도리를 받치고 있습니다.

 

 

 

안채의 마루위에는 청우림(聽雨林) 현판이 올려져 있고,

 

 

 

안채 앞에 "ㄱ"자 형태로 길게 놓여 있는 쪽마루는,

굽어지는 부분에 기둥을 안에 두고 삼각형으로 더해놓아 이동에 편리함을 더한듯 하며,

 

 

 

안채의 왼편으로 이어지는 건넌방의 입구에는,

능통(能通)이라는 당호가 있어 의학, 병법, 시서화, 지리, 음악 등 다방면에 능통했던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를 기리기 위한 것으로 여겨지며,

 

 

 

안채의 왼편에 다락으로 오르는 계단과 작은 부엌이 있어,

 

 

 

고택(古宅)의 작은부엌을 들여다 보고,

 

 

 

호기심이 일어 부엌위에 있는 다락도 올라가 들여다 봅니다.

 

 

 

공재고택(恭齋古宅)의 주인 윤두서(尹斗緖,1668∼1715)는 윤선도(尹善道)의 증손이자 정약용(丁若鏞)의 외증조이며,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효언(孝彦) 호는 공재(恭齋)·종애(鐘崖)로 겸재 정선(鄭敾)과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과 함께 조선 후기의 삼재(三齋)로 불리며,

해남 윤씨 가문의 종손으로서 막대한 경제적 부를 소유 하였으며 윤선도와 이수광(李睟光)의 영향을 받아 학문적으로도 탄탄한 배경을 가진 인물로,

젊은 시절에는 가풍을 이어 과거시험에 매진하여 1693년(숙종 19)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남인계열이었고 당쟁의 심화로 벼슬을 포기하고 학문과 시·서·화로 생애를 보냈으며,

1712년 이후 고향 해남 연동(蓮洞)으로 돌아와 은거 하였고 1715년 4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산수·인물·영모·초충·풍속 등 다양한 소재를 그렸으며 특히 인물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그의 화풍은 장남인 윤덕희(尹德熙)와 손자인 윤용(尹熔)도 화업(畵業)을 계승하여 3대가 화가 가문을 이루었으며,

작품으로는 "자화상", "채애도", "선차도", "백마도(白馬圖)" 등이 "해남 윤씨 가전 고화첩"에 전하고,

저서로는 기졸(記拙)과 화단(畵斷)이 있습니다.

 

 

 

안채 안쪽에는 3칸 규모의 창고가 자리해 있고,

 

 

 

가지런히 놓여진 크고작은 장독대의 모습도 볼수 있으며,

 

 

 

장독대를 지나면 담장에 기대어 있는 안채 뒤편의 굴뚝이 있고,

 

 

 

공재고택(恭齋古宅)의 기록으로 보면 상량도리 밑의 장혀에 수리 당시의 상량명문이,

“구 경술 142년 신미 8월 11일 시 중수 좌묘향유 룡(龜庚戌百四十二年辛未八月十一日時重修坐卯向酉龍)”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연도는 순조 11년(1811)에 해당되나 내림새에 “동치 10년 신미(同治十年辛未)" 1871년 이라는 기록이 있어 건축연대를 파악하는데 혼란을 주는데,

윤선도(尹善道,1587~1671)가 자신의 거처로 명당터에 지었으니 1670년 이전에 지어진것으로 추측 할수도 있습니다.

 

 

 

안채 뒤편의 작은 화단이 있었던 흔적을 더듬어 보며,

공재고택(恭齋古宅)을 돌아보고 나옵니다.

 

 

 

해남의 고택(古宅)이라면 "고산 윤선도 고택"의 녹우당(綠雨堂)은 이름높아 많은 이들이 찾는 곳이지만,

윤선도(尹善道)가 지었고 증손인 윤두서(尹斗緖)가 살았던 이곳을 찾는이는 많지 않습니다.

전남 해남을 여행하면서 찾았던 해남 윤씨(海南 尹氏)의 또다른 고택(古宅)으로,

공재 윤두서 고택 (恭齋 尹斗緖 古宅)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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