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세종로 경복궁 내에 위치한,

국립민속박물관(國立民俗博物館) 관람의 3번째 이야기로,

제2 전시관에 마련된 "한국인(韓國人)의 일상(日常)" 입니다.

 

우리나라 국보의 모습을 본떠 만든 국립민속박물관(國立民俗博物館)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했던 건물로 1972년 완공 되었으며,

민속박물관에서는 역사책에서 찾을수 없는 옛사람들의 삶을 살펴볼수 있는 소중한 공간이기도 합니다.

 

 

 

장승이 세워져 있는 국립민속박물관(國立民俗博物館)의 제2 전시실은 "한국인의 일상"을 살필수 있는곳으로,

사계절의 변화에 맞춰 삶을 살아온 조선시대 사람들의 생활상을 살펴볼 수 있어,

이곳에서는 농경세시를 바탕으로 한 조선의 생업·의식주·공예 등의 다양한 일상 모습을 만날 수 있는데,

 

 

 

계절별로 분류하여 "봄" 코너에는 "세시 자료", "경작도구", "농기"와 "농악" 등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고,

"여름" 코너에서는 "물 관리 도구"와 "여름옷", "더위나기 도구"들이 있으며 "가을" 코너에서는 "가을걷이"와 "소작 " 관련 자료를 살펴볼 수 있으며,

"겨울" 코너에는 김치 담그기 모형이 잘 전시되어 있고 된장독에 담긴 된장도 찾을수 있습니다.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충남 청양 정산면 용두리 장승과 솟대로,

칠갑산으로 오르는 초입의 용두리 마을 입구에 옛 모습 그대로 전해지는 장승이 솟대와 함께 묶여 서 있어,

2m즘 되는 소나무에 얼굴모습을 투박하게 새기고 "천상천하 축귀대장군지위(天上天下逐鬼大將軍之位)"라고 써서,

하늘과 땅속의 귀신을 물리치도록 한 것이 남자 장승이며,

"동서남북중앙대장군지위(東西南北中央大將軍之位)"라고 써서 땅 위의 네 방위와 중앙 귀신을 쫓도록 한 것이 여자장승으로,

장승과 솟대는 해마다 음력 정월 보름 하루전날이면 새로 만들어 세우고 온 동네사람이 다 모여 장승제를 지내며 한해의 복을 빈다고 합니다.

 

 

 

1890년대 산신도(山神圖)의 복제품으로,

 

충남 부여군 은산면 은산리에서 모시는 산신을 그린 그림으로,

산악신앙은 자연을 대상으로 한 신앙 가운데 아주 중요한 부분으로 여겨져,

산신은 산을 지키고 담당하는 신으로 그를 받들어 제사지내는 일을 산신제 또는 산제(山祭)라 하며,

산신과 함께 주요하게 등장하는 호랑이는 산신의 사자나 화신격의 의미를 지니며,

백수의 왕인 호랑이는 산신도에서는 마치 고양이처럼 귀엽고 장난스런 표정으로 그려 지기도 하는데,

민간 화풍으로 그려진 까치호랑이 그림의 호랑이를 연상하게 합니다.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안인진리 바닷가 해랑당에 걸어놓았던 해랑당 남근목(海娘堂 男根木)으로,

해신당 또는 여신당 으로도 불리는 해랑당(海浪堂)에 모신 처녀와 청년의 가슴아픈 한을 풀어주기 위해 바치던 남근목이며,

마을의 풍요와 다산 및 바다에서의 안전을 기원하는 의미라고 합니다.

 

 

 

19세기에 만들어진 "국시말"은 고대 신마전승의 하나로 해석 되는데,

서낭신이나 국사신(國師神)이 타고 다니는 말 또는 그 수호마(守護馬) 또는 사자(使者)로,

서낭당 또는 국사당에서 마을 제사를 지낼 때 당 안에 봉안하며,

말은 박혁거세 신화의 백마나 경주 155호 고분 천마총의 "천마도" 또한 같은 맥락으로 보여지는데,

국시말을 흙이나 돌을 재료로 만들기도 하지만 주로 철로 만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널리 알고 있는 "목민심서(牧民心書)"로,

지방 관리들의 폐해를 없애고 지방행정을 쇄신하기 위해 지은 책으로 조선 후기의 실학자 정약용(丁若鏞)에 의해 1818년에 완성 되었으며,

목민관, 즉 수령이 지켜야 할 지침(指針)을 밝히면서 관리들의 폭정을 비판한 저서로 유배지인 다산초당에서 완성한 책으로,

지방의 수령들이 지켜야 할 일들을 자세하게 기록해두어,

관리의 부임부터 해임까지 전 기간을 통해 반드시 준수하고 집행해야 할 실무상 문제들을 각 조항으로 정하고,

정약용 자신의 견식과 진보적 견해를 피력해 놓은 조선후기 목민관의 지침서 이기도 합니다.

 

 

 

조선 중기의 문신 신속(申洬 : 1600~61)이 엮은 종합농서인 "농가집성(農家集成)"으로,

농사직설(農事直說)에서는 소홀히 다루고 있던 수전농법과 이앙법을 대폭 증보하였고,

화누법(火耨法: 잡초의 제거와 도열병 처리기술)과 목화재배법 등을 보충한 균형 있는 종합 농서로서,

당시의 농업기술과 원저와 중간본들 사이의 기술 변천을 살필 수 있는 데도 있으며,

이들 책 속에 나오는 여러 가지 작물의 품종명에서 이두와 한글의 표기가 많이 나와 국어사 연구에도 참고가 되고 있습니다.

 

 

 

"두레"와 "풍물(風物)"관한 전시로,

두레는 한국사회에서 힘든 노동을 함께 나누는 공동 노동 풍습으로,

논농사 지대에서 한 마을의 성인남자들이 협력하며 농사를 짓거나 부녀자들이 서로 협력하여 길쌈을 하던 공동노동조직으로,

두레는 조선 후기 이앙법이 전개되면서 보편적인 농민생활풍습으로 정착되었으며,

농민문화의 풍물을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아름다운 전통풍속 이며,

풍물(風物)은 풍악(風樂)에 쓰이는 기물(器物)로 꽹과리, 장구, 북, 징의 네 가지 악기(사물)와,

나발, 태평소, 소고(버꾸라고도 함) 등의 악기를 기본 구성으로 하여 모내기나 논매기 등의 농사일의 능률을 올리기 위한 농악으로 사용되었을 뿐 아니라,

정초의 지신밟기를 비롯한 세시의례와 단오·백중·추석 등의 명절에 세시놀이 음악으로도 많이 사용되었으며,

경기도당굿이나 동해안별신굿 같은 무속에서 춤이나 노래의 반주음악으로도 사용 되었습니다.

 

 

 

요즈음엔 볼수 없는것들 중 하나인 "똥지개와 똥통"으로,

근대기에는 똥을 푸라며 외치고 변소를 청소해주는 모습도 볼수 있었는데,

인분(사람의 똥)을 넣는 통과 운반을 위한 지개로 옛날에는 인분을 거름으로 많이 사용 하였습니다.

 

 

 

"쟁기"는 논이나 밭을 가는 데 쓰는 데 농기구로 가장 처음으로 만들어진 쟁기는 약 8,000년 전이라 하며,

쟁기라는 이름은 "잠기"에서 비롯 되었는데 잠기는 본디 무기를 가리키는 "잠개"의 바뀐 말로,

예전에는 농기구를 무기로도 썼기 때문에 두 가지를 같은 말로 기록 하였으며 잠기는 19세기 초 장기로 바뀌었고,

오늘날의 쟁기가 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 입니다.

쟁기는 호리라 하여 흔히 한 마리의 소가 끌지만 거친 땅에서는 두 마리를 나란히 세우는데 이를 겨리라 부르며,

겨릿소 가운데 앞을 향하여 왼쪽 소가 안소 오른쪽 소가 역소이며,

땅을 갈 때 볏밥이 왼쪽으로 넘어가므로 안소는 힘 좋은 예닐곱살의 소를 세웠다고 합니다.

 

 

 

윤목(輪木)으로도 불리는 "남태"의 모습으로,

흙덩이를 고르게 하거나 씨가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땅을 다지는 데 쓰는 나무로 만든 연장으로,

좌우 양끝에는 고리를 달았으며 이에 끈을 꿰어서 소가 끌기도 하고 사람이 어깨에 메어 끌고 다니기도 하는데,

제주도와 전라남도 등의 지방에서 많이 썻던 도구로 기장과 조밭에 씨를 뿌린 뒤에 남태를 끌고 다녀서,

씨가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하며 흙을 다져주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수분의 증발을 막는 효과도 거두는 농기구 입니다.

 

 

 

"부게"는 바다에서 잡거나 거둔 어물을 등에 져서 나르는 연장으로,

서해안에서 조개·바지락을 비롯한 채취류와 돌살에 든 숭어 따위의 해물을 현장에서 뭍으로 담아 나르는데 쓰며,

싸리나 대오리로 바닥은 좁고 위는 벌어지게 통으로 엮은 것으로 아가리의 바깥쪽은 안쪽보다 조금 높은데,

아랫도리에 대나무를 파서 만든 홈대를 붙였기 때문에 바닥으로 괴어내린 물은 좌우 양쪽으로 흘러 떨어 지므로,

이것을 등에 짊어져도 물에 젖을 염려가 없으며,

가운데에 멜빵을 걸고 기름한 널쪽을 대어 등태로 삼아 뭍과 현장 사이의 뻘이 길어서 오래 걸어야 하는 곳에서 쓰기에 편리한 도구 입니다.

 

 

 

갯벌 위에서 타거나 끄는 "갯벌 썰매"도 있어,

뻘배로도 불리며 갯벌에서  뻘에 빠지지 않고 다닐수 있는 어민들의 이동수단으로,

바지락, 꼬막, 낙지, 고둥 등 다양한 해산물을 채취를 위한 도구 입니다.

 

 

 

절미통(節米桶)은 쉽게 꺼내기 어렵도록 입구가 좁은 옹기를 많이 사용 하였는데,

서민들의 가난했던 시절 쌀을 절약하기 위해 밥을 지을 때마다 한 숟가락씩 덜어내 조금씩 담아 모으던  비상 식량의 용기로,

쌀 생산량이 부족했던 1960, 70년대에 쌀을 절약하기 위하여 절미(節米)운동이 전개되었으며,

이 때에 쌀을 조금씩 넣어 보관하여 쌀이 부족할 때에 쓸 수 있도록 만든 통을 절미통이라 불렀으며,

보릿고개를 넘어야 했던 시절에는 하루 세 끼니는 커녕 한끼도 챙겨 먹을 수 없는 경우가 있었으므로,

그 시절 어머니들은 밥을 짓기 전에 쌀 한 줌 을 통에 넣어 마지막 쌀이 떨어졌을 때 이 절미통의 쌀로 굶주림을 면하였고,

때로 절미통의 쌀을 팔아 학비를 대기도 하였습니다.

 

 

 

옛날 생활도구중 "망태기"와 "소쿠리"의 다양한 모습으로,

꼴이나 감자 따위를 나르는 데 쓰는 용구인 망태기는 가는 새끼나 노로써 너비가 좁고 울이 깊도록 짠 네모꼴의 주머니로,

원래의 형태는 네모꼴이나 주둥이를 죄면 염낭처럼 보인다 양끝에는 끈을 달아 어깨에 맬수 있으며 지역에 따라 구럭·깔망태라고도 하며,

 

 

 

강원도의 산간지대에서는 산비탈에서 망태기 안에 담은 물건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주루막"이라 하여,

주둥이에 끈을 달아서 두루주머니처럼 아가리를 죌 수 있도록 하였으며,

 

 

 

산에 약초를 캐러 가거나 사냥을 나갈 때에,

점심이나 휴대용품 등을 넣기도 하는 망태기의 일종으로 산간마을 사람들이 출입할 때 갖추어야 할 필수품 입니다.

 

 

 

전통 민물어구들을 한곳에 모아두어,

물고기를 가두어 잡는 데 쓰는 어구인 "통발"과 "가리"가 있고, 

물고기를 찔러 잡는 데 쓰는 어구인 "작살"과 뱀장어를 잡을때 쓰는 도구인 "장어칼"이 보이고, 

강여울에서 즐길수 있는 전통 낚시인 "견짓채"도 있어 "견지"는 물의 흐름에 맞추어 물고기를 유인하는 낚시 방법입니다.

 

 

 

"무자위"는 낮은 곳에 있는 물을 높은 곳의 논이나 밭으로 자아올리는 농기구로,

우리 나라의 재래식 양수기로 수룡 또는 수차라고도 하며 한 개의 축(굴대) 주위에 여러 개의 나무판이 나사 모양으로 붙어 있는데,

마치 날개 달린 바퀴처럼 보이는데 날개판을 두 발로 번갈아 밟으면 바퀴가 돌아가고 퍼올려진 물이 봇도랑으로 흘러 들어가는 기구이며,

같은 원리로 염전에서 염수를 퍼올릴때 사용했던 "무자위" 입니다.

 

 

 

조선 시대 농부들이 비오는 날 일을 할 때 착용한 우장(雨裝)인 "도롱이"로,

도랭이 사의(簑衣),녹사의(錄蓑衣) 라고도 하며,

짚이나 띠를 엮어 만드는데 겉쪽에 줄기가 포개져 이어지게 만들어 빗물이 스며들지 않고 흘러 내리는 구조이며,

나무를 파서 만든 신발인 "나막신"은,

비올 때 신던 신으로 남녀 모두 신었고 오동나무로 만든 것이 최상품이며,

남자용은 극치(屐齒)가 뚜렷하게 나누어지고 여자용은 극치가 인자형(人字形)으로 되어 있으며,

여자용은 코가 날카롭고 매끈하며 목혜(木鞋)·각색(脚濇)·목극(木屐), 격지라고도 합니다.

 

 

 

제2전시실에서는 우리 조상의 생업과 의식주 생활 및 수공예를 주제로 다양한 생활상을 볼 수 있어,

중요 생업인 농업을 중심으로 곡식과 농기구, 경작하는 모습을 볼 수 있고,

어렵과 수렵은 물론 우리의 대표적인 수공업인 칠공예와 의생활로는 그 원료인 옷감짜기를 실물 크기로 전시하였을 뿐 아니라,

옷감을 천연 염료로 염색·전시하였고 우리 한복의 변천을 시대별로 전시하여 우리 조상의 풍부한 의상생활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도포(道袍)"와 "저고리"가 함께 진열되어 있어,

선비들이 평상시에 입던 겉옷인 도포(道袍)는 조선 중기 이후 많이 착용하였으며,

관리들도 관청에 나아갈 때를 제외하고 사사로이 외출할 때에는 일반적으로 착용 하였고,

저고리는 양팔과 몸통을 감싸며 앞을 여며 입는 형태로 된 남녀가 입는 한국 고유 상의(上衣)의 통칭이며,

 

 

 

홑으로 만든 윗옷인 모시 적삼과 바지 세트로,

적삼은 원래 저고리 속에 입던 속옷의 하나였으나 안팎이 훤히 비치는 얇은 천을 겹으로 하여 곱솔로 박아 지은 후,

여름용 상의로 착용하면서 깨끼적삼이라 했으며 모시·삼베·무명 등으로 만드는데 삼베는 약간 거친 느낌을 주지만 모시는 올이 곱고 시원하며,

세모시로 만든 것은 올이 곱고 아름다우며 풀을 강하게 먹이고 손질을 잘하여 올이 반듯하게 되도록 다려 입어야 맵시가 나는데,

적삼은 통째로 세탁할 수 있어서 편리 하기도 합니다.

 

 

 

대나무 침상과 죽부인이 있는 죽침(竹枕) 등으로,

죽침은 죽부인(竹夫人)과 같이 여름에 서늘한 기운을 취하는 데 쓰는 대오리로 만든 벼개이며,

대나무의 시원한 느낌과 통풍을 이용한 여름철 양반의 용품입니다.

 

 

 

양반가 여름의 필수품인 합죽선(合竹扇)과 선추로,

선추는 부채의 고리나 자루에 다는 장식품으로 선초(扇貂)라고도 하며,

합죽선(合竹扇)은 대껍질로 부채살을 만들고 종이를 붙여 만든 접는 부채로 그림을 그려넣거나 글씨를 써서 품위를 더하고,

선추에 술을 달아 장식하기도 하는데 사용하지 않을 때는 부채집에 넣어두는데 부채집에도 아름다운 수를 놓기도 합니다.

 

 

 

"베틀"은 명주·무명·모시·삼베 따위의 피륙을 짜는 재래식 가정용 직기(織機)로,

나무로 만들어졌으며 2개의 누운 다리에 구멍을 뚫어 앞다리와 뒷다리를 세우고 가랫장으로 고정 시키며,

베틀로 베를 짤 때에는 그 날의 촘촘함을 따져서 "새" 라는 말을 쓰는데,

한 새는 바디의 실구멍 40개로 짜여지는 것을 말하며 새가 많을수록 옷감이 곱게 짜여 집니다.

 

 

 

짠실을 길게 이을때 사용하는 도구인 "쩐지" 와,

빗모양으로 생겨 삼껍질을 벗기는 데 쓰는 용구 "모시빗"을 비롯한 다양한 도구들을 볼수 있으며,

 

 

 

실을 가공하고 손질하는 도구가 있으며,

 

 

맨 아래에 둥글넓적하고 아가리가 쩍 벌어진 오지그릇이나 질그릇인 "자배기"가 있고,

그위에 가루를 쳐내거나 액체를 받아내는데 쓰이는 기구로 물건을 거를 때에 체를 올려놓는 기구인 "쳇다리"가 놓여 있으며, 

맨위에는 가루를 곱게 치거나 액체를 거르는 데 쓰는 용구인 "체"가 올려 져있어,

"체"는 나무를 얇게 켜서 겹으로 끼운 두개의 바퀴 사이에 말총이나 헝겊 또는 나일론천이나 철사 등으로 바닥을 메운 용구 입니다.

 

 

 

부엌쪽을 토담으로 벽을 쌓은 "초가삼간(草家三間)"이 지리하고 있어,

초가삼간은 초가지붕의 3칸으로 지어진 집으로 서민주택의 가장 원초적 이지만 조선조 가장 많았던 주택으로,

초가삼간은 일반적으로 부엌과 큰 방, 작은 방으로 각 1칸으로 구성 되어 있으며,

 

 

 

초가삼간의 단출한 살림인 부엌을 들여다 보고,

 

 

 

2칸의 방 가운데 부엌옆의 안방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53호로 지정된 "채상장(彩箱匠)"이 있어,

채상장(彩箱匠)은 대오리에 물을 들여 고리(彩箱 : 彩竹箱子) 등을 엮는 일 및 그 일에 종사하는 장인이며,

채상(彩箱)은 대나무의 겉껍질로 얇게 떠낸 대오리를 갖가지 색으로 물들여 짜면서 다채로운 무늬를 놓기 때문에,

본래 채죽상자(彩竹箱子)로 불렀으며 주로 옷가지나 귀중품, 친선구를 간수하기 위한 용기로 사용 되었습니다.

 

 

 

건넌방에는 돋자리를 엮고 실을 잣는 "자리짜기"의 모습이 있어,

자리짜기는 거친 멍석에서 부터 손님접대를 위한 화문석, 꽃돗자리등 재료에 따라 형태가 다양하며,

김홍도의 풍속화 "자리짜기"에서 몰락한 양반가의 모습을 볼수도 있습니다.

 

 

 

이삭들을 분리하는 추수할때의 도구인 갈퀴의 모습도 볼수 있으며,

 

 

 

운반의 도구중 하나로,

곡식이나 곡물등을 자루에담아 소나 말의 힘을 이용해 운반하는 기구이며,

 

 

 

옛 사람들이 사용한 다양한 모습의 모자들을 볼수 있어,

 

 

 

조선시대 사인(士人)들이 편복(便服)에 쓰던 건인 "사방관(四方冠)"과,

옆에있는 "정자관(程子冠)"은 조선시대 사대부 사회에 유행한 관모로 원래 당건(唐巾)이라 하여 중국제 관모의 하나 였으며,

그 제도는 사각형의 높은 내관에 밖에 다시 파상(波狀)의 수(收)를 덧붙여 처리 하였습니다.

 

 

 

조선시대 신분에따라 달리 신었던 짚신과 가죽신 등 여러 유형의 신발과,

비가올때 신었던 나막신 등도 함께 진열되어 있으며,

 

 

 

옛날 살림의 필수 도구였던 장독의 다양한 모습도 볼수 있으며,

 

 

 

조선조 양반가의 사랑채의 모습으로,

 

 

 

사랑채의 창을 통하여 사대부가의 선비들의 생활도구들을 들여다 볼수 있습니다.

 

 

 

여러가지 유형의 주택의 모습도 모형으로 전시해두어,

지붕 용마루의 양쪽 합각에 둥근 구멍이 있는 "까치구멍집"의 모습으로,

공기의 유통을 위하여 낸 둥근 구멍이 까치둥지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추위와 산짐승의 공격을 막기 위해 방을 두 겹 또는 세 겹으로 이어 붙이고 채광이나 환기를 위해 벽면에 구멍을 뚫은 집으로,

주로 강원도와 영남 북부지역에서 볼수 있었던 가옥입니다.

 

 

 

"너와집"은 너와로 지붕을 이은 집인데,

너와집은 삼림이 울창한 산간지대나 화전지역에서 주로 지었던 널판지로 지붕을 이룬 집으로,

환기와 배연이 잘 되고, 단열·보온 효과가 뛰어나 한서의 차가 심한 산지기후에 적절한 가옥 형태 입니다.

 

 

 

가장 많이 볼수 있었던 초가집으로,

나무와 흙으로 벽을 세우고 짚을 엮어서 지붕을 얹은 집으로,

"一"자 형의 4칸 규모의 가옥으로 벼농사가 많은 지역인 많은 중부와 남부지역에서 많이 볼수 있었습니다.

 

 

 

기와로 지붕을 만든 "기와집"으로 주로 사대부가의 주택으로,

보통 찰흙으로 만든 검은색 기와를 많이 썼으나 신분이 높은 사람이 거주하는 집은 푸른 유약을 발라 만든 청기와로 지붕을 이기도 하였는데,

기와는 상당히 비쌌기 때문에 일반 농민들이 기와집을 짓고 살거나 사기에는 어려워 양반가의 전유물 이기도 하였습니다.

 

 

 

기와집을 이룬 사대부가 안채의 모습으로,

 

 

 

형편이 어려운 서민들이 3칸의 좁은 초가집에서 생활한 반면,

재력있는 사대부에서는 99칸까지 지어서 집안에 여러채의 건물들과 하인들을 두고,

녹봉과 많은 토지로 윤택한 생활을 누릴수 있었습니다.

 

 

 

과거의 우리 조상들이 무엇을 하며 살았는지를 알 수 있으며,

계절에 따라 쓰였던 생활도구와 의식주와 공예 등 다양한 일상의 모습을 만날 수 있는곳으로,

국립민속박물관(國立民俗博物館) 제2 전시관의 "한국인(韓國人)의 일상(日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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