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여행으로 울산을 여행하면서,

울산 중구 태화로에 있는 누각인 태화루(太和樓)를 찾았습니다.

 

울산 태화루(太和樓)는,

진주의 촉석루(矗石樓), 밀양의 영남루(嶺南樓), 안동 영호루(映湖樓)와 함께 영남을 대표하는 4대누각으로,

울산의 전통성과 정체성을 고스란히 담은 대표적 유적이기도 합니다.

 

 

 

태화루(太和樓)의 안내문에서 건물의 배치를 미리 보아 둡니다.

 

 

 

태화루로 들어가는 입구의 작은 화단에는,

 

 

 

2월의 초순임에도 불구하고 매화가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하고,

 

 

 

안내문의 사진에서 태화루(太和樓)가 자리하고 있는,

근대기의 태화나루와 주변의 옛모습들을 사진으로 볼수 있으며,

 

 

 

솟을 삼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태화루(太和樓)가 자리하고 있어,

태화루는 643년(신라 선덕여왕 12)에 당나라에서 불법을 구하고 돌아온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울산에 도착하여 태화사를 세울 때 함께 건립했으며,

태화강변 황룡연 절벽 위에 위치 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역사와 미래가 있는 태화강 만들기" 사업의 일환으로 복원되어,

현재의 모습으로 재 탄생하여 태화강대공원, 십리대숲과 산책로로 이어지며,

태화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멋진 조망으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태화루(太和樓)는 고려 성종(成宗)이 울산에 행차했을 때 이곳에서 잔치를 열었을 정도로 유명한 누각 였으며,

조선 전기에만 해도 두 번의 중수가 있었고 권근(權近)의 기문과 서거정(徐居正)의 중신기를 통해서 누각의 규모와 의미를 짐작해 볼 수 있으며,

중수때마다 당대 최고 학자들이 기문(記文)을 썼을 정도로 명성이 있었으나,

임진왜란 당시 소실 되어 방치되어 오다가 400년의 역사가 흐른 2014년에야 태화루가 중건하여 복원 되었습니다.

 

 

 

정문쪽에 있는 행랑채의 모습으로,

누각에 오르려면 양쪽에 있는 행랑채를 통하여 오를수 있는데,

신발은 벗고 올라야하며 신발장 또는 비치되어 있는 신주머니를 이용 할수있어,

 

 

 

정문쪽 행랑채에서 나무계단을 오르면,

 

 

 

웅장하게 서있는 배흘림 기둥의 군락을 만나게 되며,

 

 

 

고려시대 배흘림양식의 루상주 기둥 40개가 지붕을 받치고 있으며,

정면 7칸 측면4칸 주심포식으로 태화루의 누마루 면적은 233㎡로 영남루와 촉석루와 비슷합니다.

 

 

 

태화강변 쪽에 올려져 있는 태화루(太和樓)의 현판으로,

서거정(徐居正)으 글씨로 알려져 있으며,

과거 학성관 남문루에 걸려 이휴정에 보관하고 있다가 울산박물관에 기증된 한자 현판을 확대모사하여 걸었다고 하며,

 

 

 

반대쪽에는 한글현판이 걸려있어, 

진주출신의 서예가 소헌(紹軒) 정도준(鄭道準)의 글씨 입니다.

 

 

 

다시 중건된 태화루(太和樓)는,

영주 부석사(浮石寺) 무량수전(無量壽殿) 같은 양식인 고려시대 주심포 양식으로,

누각에 올라오면 대들보 등의 부재들이 곡선이 많고 목재간의 짜임새가 정교하여,

그 멋이 단청과 어우러져 단아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고려 말 조선 초의 학자이자 문신인 김극기(金克己) 대화루시서(大和褸詩序)로,

태화루(太和樓)의 내력을 알려주는 기문(記文) 편액이 있고,

 

 

 

권근(權近)의 대화루기(大和褸記)의 기문(記文)이 있으며,

 

 

 

조선 초기의 문신인 서거정(徐居正)의 태화루중신기(太和樓重新記)의 편액이 있어,

태화루에 대한 고려와 조선 때의 글은 현재까지 시문(詩文)인 제영(題詠) 아흔일곱 편과 산문(散文)인 기문(記文) 열 편이 확인되고 있다고 합니다.

 

 

 

한글로 쓰여진 태화루중창기(太和樓重創記)의 기문(記文)으로,

울산광역시장 박맹우의 찬(撰)이며 김경욱의 서(書)이며,

 

 

 

태화루(太和樓) 에서의 전경으로,

태화강 너머로 십리 대나무숲과 주변 풍광이 시원하게 들어오며,

 

 

 

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로 1734년(영조 10년)에  울산부사로 부임 해 온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 1679∼1759)이 이곳에서 지은 시(詩)로,

遺墟只說 太和樓  江水滔滔 日夜流    이 유허지가 태화루터라고 하는구나 / 강물은 도도히 밤낮으로 흐른다

遠客豈知 當日意  虗舟謾繫 古津頭    멀리서 온 객이 어찌 당시의 뜻을 알리오 / 빈배만 일 없이 옛 나루에 매었네

晩煙鋪作 平郊色  凉葉粧成 滿壁秋    저녁 연기가 집집마다 오르는 교외의 풍경이라 / 서늘한 낙엽은 가을 절벽을 단장하였네

從古廢興 皆有數  且呼芳酒 滌閒愁    세우고 무너지는 것이 예로부터 있어온 일 / 오호라, 좋은 술로서 시름을 달래노라

 

 

 

누각 아래에 태화강의 용소와 태화교가 있고,

너머로 현대화의 일환인 빌딩 숲이 세월의 흐름을 전해주는듯 하며,

 

 

 

삼국유사에 의하면,

태화루는 신라 고승 자장율사가 당나라 유학시절 중국 태화지를 지날 때 홀연히 용이 나와서,

"나를 위해 경기 남쪽에 정사를 짓고 함께 나의 복을 빌면 나도 덕을 갚으리라"는 말을 하고 사라져 버렸다고 합니다.

자장율사는 귀국하여 당나라에서 받은 사리를,

경주 황룡사 9층탑 기둥속과 통도사의 금강계단, 태화사의 탑에 나누어 봉안하여 용의 청을 들어 주었다고 하며,

이 때 지어진 절이 지금 태화루를 포함한 동강병원일대의 태화사이며 당시 태화루는 태화사의 부속건물이었다고 합니다.

그 설화에 따라 현재 태화루가 서 있는 태화강 아래는 황룡연 또는 용금소라고 불리고 있으며,

용금소 위에 불쑥솟은 바위를 용두바위라고 부르고 옛날에 울산사람들은 가뭄 때는 용두바위에서 제수를 차리고 기우제를 지내기도 한다고 합니다.

 

 

 

고려시대 "울주8경" 중 하나로 울산의 명소였던 태화루(太和樓)는,

복원공사에는 목재 425톤 과 석재 806톤, 기와 47,818장 등이 소요 되었으며,

신응수 대목장에 주도로 건립 되었다고 합니다.

 

 

 

유구한 역사를 가진 영남을 대표하는 4대누각 였으며,

관원과 나그네의 화합과 송영(送迎)의 장소이자 시인묵객의 마음을 머물게 한 풍류와 상영(觴詠)의 장소 였으나,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멸실 되었고,

400여년이 지나서야 고려의 양식으로 중건하여 복원한 태화강변의 누각으로,

울산의 태화루(太和樓)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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