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에 있는 근대기의 목조 건축물인,

경주 "수봉정(秀峯亭)"을 찾았습니다.

 

수봉정(秀峯亭)은 경상북도의 기념물 제102호로 지정 되었으며,

 

 

 

수봉정(秀峯亭)으로 들어가는 솟을 삼문에는 이인문(履仁門)의 현판이 있고,

솟을 대문은 닫혀 있으나,

 

 

 

솟을삼문 옆에는 안으로 들어갈수 있는 대문이 따로 있어 들어갈수 있으며,

입구에는 커다란 석주가 있어 왕릉 등의 둘레석 기둥으로 알려져 있고,

 

 

 

수봉정(秀峯亭)은 만석부자였던 수봉 이규인(李圭寅)의 자택으로,

대문을 들어서면 잘 꾸며진 화단과 정원에는 각종 정원수와 괴석과 고석(古石)들이 어우러져 있어,

근대 선각자의 한 사람인 수봉(秀峯) 이규인(李圭寅 1859년~1936년)의 고택으로 사시사철 아름다운 정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열락당(悅樂堂)으로 바깥 사랑채로 보여지는 건물이며,

 

 

 

안쪽의 무해산방과 열락당(悅樂堂)은 사랑채 역할을 했다고 하며,

열락당(悅樂堂)은 수봉(秀峯) 이규인(李圭寅)이 1936년 78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한 사랑채로,

마당에는 "장군석"이라 불리는 큰 돌이 있어 한말 의병장이었던 신돌석 장군이 들어올렸다는 돌이라 합니다.

 

 

 

열락당 안쪽에는 부의 상징인 4칸의 곳간채가 있어, 

이곳 곳간 뒤에 또 다른 곳간채가 더 있다고 하며 4칸 곳간채는,

유명한 경주 최부자 집과 더불어 7천석 정도의 부를 성취 했다고 하여 수봉정(秀峯亭)의 부를 짐작게 하는데,

당시 일제의 수탈로 인해 배고픈 과객들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하며,

수봉(秀峯)은 그들을 집안에 들여 숙식을 제공했다는데 유숙하는 객의 수는 매일 서른 명에 달했다고 전합니다.

 

 

 

열락당과 곳간채 사이에는 중문채가 있어,

 

 

 

중문을 들어서면  중문채를 비롯하여 튼 "口"자 형태로 건물들이 서있어,

수봉정(秀峯亭)에서 공부했던 학생들의 주거공간 또는 유숙할수 있는 곳인 별채의 공간으로 여겨지며,

 

 

 

중문을 마주하고 정면 5칸에 양쪽으로 1칸씩을 이은 건물이 있고,

 

 

 

왼편에는 맞배지붕의 정면 3칸의 건물이 있으며,

 

 

 

오른쪽에는 정면 5칸의 건물이 자리해 있어,

 

 

 

건물 앞쪽에는 1칸의 누마루를 두어 특별한 손님이나 선생의 거처로도 짐작하게 합니다.

 

 

 

다시 대문 가까이있는 열락당으로 돌아와,

문에서 왼쪽으로 들어가면 사랑채 역할을 하던 무해산방(武海山房)과 다시 중문이 있어,

 

 

 

무해산방(武海山房)은 안사랑채의 역활을 했던 건물로 여겨지며,

 

 

 

팔작 지붕의 정면 3칸에 마루와 2칸의 방을들인 구조로,

방문 위에는 괘정서소(掛庭書巢)와 무해산방(武海山房)의 현판이 올려져 있으며,

 

 

 

무해산방 옆에 있는 중문을 들어서면 구멍이 나있는 "一"자 형의 낮은 담장이 서있어,

주로 여성이 거주하는 안채를 어느정도 막아두어 바로 마주치는 불편함을 줄이려 한듯 하고,

 

 

 

"ㄱ"자 형으로 배치된 안채에는 후손이 거주하고 있어,

관람을 부탁 드렸더니 혼쾌히 승락을 해 주십니다.

 

 

 

수봉정(秀峯亭)으로 들어가기 위해 무해산방(武海山房) 앞으로 나오니,

무해산방의 마당에는 신라시대의 것이라는 석조물로 장식되어 있어,

우물 곁에는 하층기단 갑석의 모습으로 집 곳곳에는 신라시대의 것이라는 석조물들이 많이 놓여 있는데,

앞서 보았던 대문 앞에 석주가 서 있었고 무해산방의 마당 에서는 석탑과 석탖의 부재들과 우물 돌, 여러 가지 주춧돌로 장식되어 있어,

이들은 대부분 인근 숭복사 터에서 옮겨온 것들이라 합니다.

 

 

 

수봉정으로 들어가는 협문으로 지붕 위에는 두 마리 오리가 앉아 있어,

 

 

 

두 마리 작은 오리는 자산, 부귀, 번창의 의미라 하며,

소박한 토우의 모양으로 서로 바라보고 있는듯 하지만 먼 곳을 향하고 있는듯한 모양 입니다.

 

 

 

협문을 들어서면 수봉정(秀峯亭)의 옆으로 통하게 되어 있어,

수봉정은 정면 7칸, 측면 3칸의 홑처마인 팔작지붕의 단층 건물로,

둘레에 툇마루를 두르고 중앙에 3칸 대청을 두되 대청 왼쪽에는 글방인 비해당(匪懈堂)을,

대청 오른쪽에는 약방인 보인재(輔仁齋)를 각각 2칸 규모의 온돌방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학교와 의원을 겸하도록 설계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건립 이념은 근대 민족교육의 터전과 민중 의료의 장을 개설하는 것이었음에 반하여,

건물 형식은 서원이나 서당 건축의 전통적인 강학당(講學堂) 형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수봉정(秀峯亭)은 일제 강점기인 1924년에 수봉 이규인(李圭寅)이 1924년에 빈민구제 및 교육사업과 독립운동가에 대한 지원을 위해 지은 정자로,

자택의 한 쪽에 건립했던 수봉정은 처음에는 서당인 비해당(匪懈堂)과 약국인 보인재(輔仁齋)를 고루 갖춘 2층이었는데,

지반 침하로 1953년에 1층인 단층으로 개조 되었다고 하며 이름을 보면 정자라고 짐작되나,

사실은 일제 침략기에 핍박받는 경주 지역 조선민중에게 배움의 터전과 의료 혜택을 제공하기 위하여 건립된 건물로 학교이자 의원 였으며,

후손들이 1938년에 경주고등보통학교를 세워 본격적으로 경주 지역의 민족 사학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더 이상 학교 건물로는 쓰이지 않게 되었는데 경주고등보통학교는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경주공립중학교로 개명되었으나,

광복 이후에 사학으로 환원되어 현재는 경주시 황오동 소재 경주고등학교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수봉정(秀峯亭)의 마당에서도 바닥에서 여러 석조물들을 볼수 있어,

건물의 초석 등으로 보이는 석물들로 폐사지에서 가져다 놓은것으로 여겨지며,

 

 

 

수봉정(秀峯亭)의 전면에는 괘동서사(掛洞書社) 현판이 올려져 있고,

 

 

 

학교이자 의원 였던 수봉정(秀峯亭)은,

중앙에 3칸 대청을 두고 왼쪽에는 글방인 비해당(匪懈堂)을,

오른쪽에는 약방인 보인재(輔仁齋)를 각각 2칸 규모의 온돌방을 둔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의 구조로,

 

 

 

마루 안쪽에는 수봉정(秀峯亭)의 현판이 올려져 있고,

 

 

 

수봉정 원운(秀峯亭 原韻) 편액이 있고,

 

 

 

원운(原韻)의 운자를 따서 지은 시(詩)인 4기의 차운시(次韻詩)가 현액(懸額)되어 있고,

 

 

 

집의 내력, 공역(工役) 일시 등을 적어둔 상량문(上樑文)의 기문(記文)이 있으며,

 

 

 

수봉정기(秀峯亭記)의 기문(記文) 편액을 볼수 있습니다.

 

 

 

수봉정(秀峯亭)을 처음 지을 당시의 2층 이었던 수봉정의 모습은 사진으로 남아 있어,

수봉정이 위치한 땅의 형국은 "행주형(行舟形)"이라 하여 행주형이란 배가 물건을 가득 싣고 나아가는 모양을 말하며,

배가 물건을 가득 싣고 나아간다는 것은 엄청난 재화를 모을 수 있음을 뜻하는 명당으로,

풍수가들은 수봉정 건물이 2층으로 지어진 것을 "행주형"과 관련이 있다고 풀이 하는데,

물건을 가득 실은 배가 나아가려면 크고 튼튼한 돛대가 있어야 하기에 수봉정 건물을 2층으로 지었다고 하며,

2층의 건물 수봉정이 훌륭한 돛대 역할을 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2층 였던 수봉정의 흔적으로 현존 건물의 밖두리기둥과 안두리기둥의 높이 차이가 현격하며,

천장이 우물반자로 덮여 있고 그 속에 다락층이 남아 있다는 점 등에서도 확인할 수 있고,

마루의 천장은 판재로 우물반자(盤子 : 지붕 밑 또는 천장 등을 가리어 치장한 것)로 마감되어 있습니다.

 

 

 

근대 선각자의 한 사람인 수봉(秀峯) 이규인(李圭寅)은 구휼과 교육뿐 아니라 독립 운동가에 대한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하며,

수봉(秀峯) 의 집은 신돌석 장군의 은신처이자 군자금의 보급처였다고 전하고 있으며,

민족시인 이육사의 의열단 활동에도 수봉 선생의 자금 지원이 있었고 이후의 생활도 수봉(秀峯)의 후원이 있었다고 합니다.

 

 

 

수봉정(秀峯亭)의 비해당(匪懈堂)의 방을 들여다보니,

각 2칸으로 4칸의 방이 트여있게 사용할수 있게 해두어 글방으로 쓰기에 편하게 해두었고,

 

 

 

보인재(輔仁齋)의 방문 옆에는 사다리가 있어,

옛날 2층였을때 오르는 용도 였거나 다락으로 오를때 쓰이는 용도로 보이며,

 

 

 

보인재(輔仁齋)는 2칸을 하나로 트여 있어,

약방인 보인재는 의원의 용도로 구휼 사업을 하던곳으로 보여 집니다.

 

 

 

앞마루로 나가는 보인재의 방문은,

겨울철의 찬바람을 막기위해 여닫이 안쪽에 미닫이를 두어 2중문으로 해두었고,

 

 

 

수봉정(秀峯亭)의 마루에서 앞을 내어다 봅니다.

 

 

 

수봉정(秀峯亭)의 마당은 화초와 그리 크지않는 나무들로 화단을 가꾸어 두었고,

 

 

 

담장 너머로는,

사적 제26호 신라 제38대 원성왕의 능으로 추정하는 괘릉(掛陵)의 모습이 아스라히 들어 옵니다.

 

 

 

수봉정 뒤편에는 사당이 자리하고 있어,

 

 

 

사당을 들어서면 오른쪽에는 전사청이 있어,

 

 

 

전사청(典祀廳)은 제례에 올릴 제사 음식을 장만하고,

제물, 제기 등 제사에 필요한 여러 가지 도구들을 보관하던 곳이며,

 

 

 

수봉정(秀峯亭)을 세운 수봉(秀峯) 이규인(李圭寅)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홍덕묘(弘德廟)로,

사당은 과하지 않고 정갈한 모습으로 유림에서는 1998년 수봉(秀峯)을 한 해에 한 번씩 향례하기로 결하고,

수봉(秀峯)의 위패를 불천위로 받들어 봉향하고 있습니다.

 

 

 

이규인(李圭寅,1859~1936)의 자(字)는 우서(瑀瑞)이고 호는 수봉(秀峯)으로,

1919年 오늘의 수봉학원(秀峯學園, 현 경주중고등학교)의 모태라 할 수 있는 수봉정(秀峯亭)을 건립하고,

"이수봉정(李秀峯亭)"의 이름으로 주민들의 구휼사업을 위해 쓰던 재산을 등기하여 체계를 세워 본격적으로 교육, 의료, 구휼의 사회사업을 펼쳤으며,

1930년대 초에 김성수, 안재홍, 송진우 등 민족지도자의 성원을 얻어 사립 경주보통학교를 설립, 구국의 인재를 양성하려 하였고,

이 학교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경주공립중학교로 개교 되었으나 광복 후 수봉(秀峯)의 유지대로 사학으로 환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수봉정(秀峯亭)은 수봉(秀峯)의 선각(先覺)과 실천궁행(實踐躬行)을 배우는 도장(道場)으로서 그 의미가 깊은 곳으로,

오로지 실용후생(實用厚生)에 두었으며 백성들이 기아(饑餓)에 허덕이는 참상을 보고 있을 수 없어,

5천석의 부자인 수봉(秀峯)은 "의식주(衣食住)가 족한 나머지 것은 내 것이 아니다." 라는 신념으로 구휼에 나섰으며,  

광복직후 모금에 의한 건국 최초의 동상이 설립 되었고 1961年 문화훈장을 추서 하였고,

유림에서는 수봉(秀峯)의 실사구시적인 사상과 업적을 높이 기려 근세 인물 백년사에서 사회사업과 육영사업 그리고 독립운동가의 지원이 인정되어,

향의(鄕議, 지역민의 총체적인 의견)로써 설형(設享,향사를 설치)되는 최초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경주는 신라의 유적으로 많은 이들이 찾는 유명 관광지 이지만,

근대기에 나라와 백성을 위한 헌신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유적에는 관심을 두는 이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빈민구제 및 교육사업과 독립운동가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수봉(秀峯) 이규인(李圭寅)의 생애와 그의 행적을 뒤돌아 볼수 있는곳으로,

경주의 문화재, 수봉정(秀峯亭)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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