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다산리에 있는,

안동권씨 오모재(五慕齋)문중의 서당인 "단계서당(丹溪書堂)"을 찾았습니다.

 

단계서당(丹溪書堂)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6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단계서당(丹溪書堂)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의병을 일르켰다가  순절한 권복흥(權復興)의 사당으로,

조선 영조 15년(1739)에 건립 되었고,

조선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서원 철페령으로 훼철된 후 1924년에 다시 단을 설치하고 복향 하였습니다.

 

 

 

단계서당(丹溪書堂)은 한적한 곳에 자리하여 주차에는 여유가 있고,

정문인 삼문은 닫혀 있으나 삼문옆이나 관리사로 들어가는 문은 열려있어 들어갈수 있으며,

 

 

 

삼문 옆으로 들어오면 담장에 연이은 관리사와 중문이 있어 들어가면,

 

 

 

왼쪽안에 강당인 숭의당(崇義堂)이 자리하고 있어,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홑처마 굴도리 3량집으로,

좌우에 방을 배치하고 중간에 3칸의 대청이 자리하고 있는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의 구조이며,

좌우 협칸 전면 상부의 기둥 사이에 도리방향으로 설치된 들보 등은 전통목구조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건축물로,

 

 

 

1739년(영조 15)에 참의 정중기(鄭重器)와 진사 김예갑(金禮甲)이 발의하여 도내 사림(士林)의 발의로 묘우를 세우고,

의사 오모재 권선생(義士五慕齋權先生)의 위패를 봉안하고,

묘우는 충렬사(忠烈祠)로 강당은 숭의당(崇義堂)으로 당호는 단계사(丹溪祠)라 현판을 달고 향중유림과 자손들이 향례를 시행 하였고,

1741년(영조 17)에 숙종(肅宗)40년 이후에 창건(創建)한 향현사(鄕賢祠) 및 영당(影堂) 훼철령에 의하여 폐쇄 하였다가,

 

 

 

정조 12년(1788년) 조정(朝廷)에서 병오년 이전(丙午年以前)에 폐쇄된 향현사(鄕賢祠) 및 영당(影堂) 복설령(復設令)에 따라,

묘우(廟宇)와 신문(神門), 강당(講堂), 전사청(典祀廳), 유정문(由正門), 관리실(管理室)을 중건(重建)하고,

매년(每年) 3월 中丁日에 향중유림(鄕中儒林)과 자손들이 향례를 받들었으며,

 

 

 

1868년 대원군의 전국서원 철폐령으로 충렬사(忠烈祠)는 훼철되고 단계사(丹溪祠)도 단계서당(丹溪書堂)으로 개칭하고 제향마저 철향하게 되었다가,

1924년 향중에 공의가 일어 충렬사지에 설단하고 복향(復享)행사를 하였으며,

광복후 1954년에 묘우(廟宇)를 중건하고 충렬사편액(忠烈祠扁額)을 다시 걸고 봉향 하였고,

2006년부터 2008년까지 경주시 문화재국에서 현재의 단계서당(丹溪書堂)을 중수 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강학의 공간인 숭의당(崇義堂)에 걸려있는 "단계서당(丹溪書堂)"의 현판이며,

 

 

 

서편의 방문위에는 권복흥(權復興)의 호인 "오모재(五慕齋)"의 현판이 있고,

 

 

 

방은 하나로 트여 있으며 마루쪽으로 큰문을 두어 밝은 편이며,

 

 

 

방가운데 천정에는 위를 받치고 있는 중도리를 일부 노출시켜두어 특이하며,

 

 

 

동편의 방은 성인재(成仁齋)로 명명되어 있어,

 

 

 

방문 위에는 성인재(成仁齋)의 현판이 보이고,

현판 위에는 가시가 있는 탱자나무의 가지가 올려져 있어 의미가 있을듯 하며,

 

 

 

성인재(成仁齋)의 방도 오모재와 같은 구조로 벽장을 두었으며,

 

 

 

숭의당(崇義堂)의 마루 위에는 여러 편액을 볼수있어,

 

 

 

앞쪽에 단계서당의 옛 현판인 "단계사(丹溪祠)"의 현판이 걸려 있고,

 

 

 

대청 안쪽에는 숭의당(崇義堂)의 현판이 있으며,

 

 

 

오모재중건기(五慕齋重建記)의 기문(記文) 편액이 있고,

 

 

 

조선 말기의 성리학자인 여강(驪江) 이능윤(李能允, 1850-1930)의 단계서당기(丹溪書堂記)의 편액이 있습니다.

 

 

 

단계서당(丹溪書堂)에서 배향하고 있는 권복흥(權復興,1555~1592)의 자는 중원(仲元) 호는 오모재(五慕齋)로,

명종10년 (1555년)현 경주시 강동면 다산리에서 출생 하여 선유(先儒)의 맥(脈)을 이어 학업에 전념하여 혼탁한 정국이라,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후학양성으로 자족하며 선비로 살아오던 중,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38세로 족병(足病)으로 부자유한 일신이지만 주위의 극진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우리 집은 대대로 충(忠)과 의(義)를 생명처럼 소중히 지켜왔는데 차제에 왜구를 토벌하여 나라에 보답함이 신하의 도리이거늘

어찌 생사와 이해로서 몸을 돌볼 수 있겠는가” 하고 가동(家僮)을 인솔하고 가산을 정리하여 의병자금을 마련하여,

수제검상마(遂提劒上馬)로 동지의병 수십 인을 지휘하여 곳곳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리고,

부산 다대포(多大浦) 격전에서 혈전을 거듭하다가 중과부적으로 동년 4월28일 순절(殉節)하였으며,

1740년(영조 16)에 이곳 단계사(丹溪祠) 제향 되었습니다.

 

 

 

부인 서산류씨는 권복흥이 순절하자 스스로 자진한 열부 였으며,

남편의 시신을 찾아 헤매었으나 끝내 찾지 못하자 식음을 전폐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이에 정조는 그 뜻을 기려 1794년(정조 18) 열녀의사권복흥처서산유씨지문(烈女義士權復興妻瑞山柳氏之門)라는 정표를 내렸습니다.

 

 

 

강당인 숭의당 뒤에는 사당이 있어,

 

 

 

묘우인 충렬사(忠烈祠)는 제향 공간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의 구조로 2008년에 중수 하였고,

 

 

 

충렬사(忠烈祠)의 현판이며,

 

 

 

사당에는 순절(殉節)한 권복흥(權復興)을 배향하고 있습니다.

 

 

 

단계서당을 나와 서편에 서당과 담장을 연하여 유허비각(遺墟碑閣)이 있어,

 

 

 

"오묘재 복흥 유허비각(五慕齋 復興 遺墟碑閣)"이 자리해 있고,

 

 

 

유허비각(遺墟碑閣)의 서편에 별도로 담장을 두른 또하나의 건물이 있어,

권복흥(權復興)과 서산류씨(瑞山柳氏) 정려각인 충렬각(忠烈閣)으로,

 

 

 

오묘재와 배위 서산류씨 정려각은 1칸 규모의 맞배지붕으로,

1737년(영조 13)에 경주부윤(慶州府尹) 이중관(李重觀)은 충절사적(忠節事蹟)을 감영에 진언하니,

순상(巡相) 박문수(朴文秀)가 조정에 장계 하였고 왕이 가납하여 특명으로 정려(旌閭)를 내려,

1739년(영조 15)에 정려각(旌閭閣)을 건립하고 충신의사의 편액을 걸었고,

 

 

 

1794년(정조 18)에 경주부윤 임제원(林濟遠)이 열녀 류씨(烈女柳氏)의 사적을 감영에 보고하니,

순상 이조원(李祖源)이 장계 하였고 왕이 가납하여 “열녀 의사 권복흥처 서산유씨 지문(烈女義士權復興妻瑞山柳氏之門)”이라 정포함과 아울러,

식물을 제급하고 명 급복(命給復)하여 이에 따라 충신편액전면(忠臣扁額前面)에 열녀편액(烈女扁額)을 병현하고,

이조판서 홍양호(洪良浩)가 충렬정려기명(忠烈旌閭記銘)을 병서 하였습니다.

 

 

 

정려각에는 충렬각(忠烈閣)의 현판이 있고,

 

 

 

정려각 안에는 1737년(영조 13) 영조가 내린 "충신의사권복흥지려(忠臣義士權復興之閭)"의 정표가 있고,

위에 편액이 있으나 희미하여 알아보기 힘들며,

 

 

 

열녀의사권복흥처서산유씨지문(烈女義士權復興妻瑞山柳氏之門)의 권복흥(權復興)의 부인 서산류씨(夫人瑞山柳氏)는,

갑작스런 부군의 전사통보를 접하고 즉시 가인을 동원하여 격전지에서 수일동안 누볐으나,

끝내 부군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 만 부득 유의(遺衣)로 초혼(招魂)하여 예를 갖추어 장례하고,

근친과 노비에게 이르기를 “나라를 위하여 순절하신 부군의 시신로조차 수습하지 못한 불출아낙이 무슨 면목으로 살 것이요” 하고,

아들을 근친에게 부탁하면서 “이제 4살이라 젖이 없어도 살 수 있으니 내가 어찌 차마 혼자 살 리요”하고 구일불식(九日不食)으로 자진 하였다고 합니다.

 

 

 

명칭은 서당(書堂) 이지만 서원(書院)에 준하는 모습을 갖춘 모습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순절한 권복흥(權復興)의 충렬을 기리고,

안동권씨 오모재(五慕齋)문중의 서당으로 남아있는 곳으로,

경북 경주의 문화재 "단계서당(丹溪書堂)"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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