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경주시 손곡동에 있는 조선 후기의 정사(精舍) 일원을 이르는,

경주 종오정 일원(從吾亭一圓)을 다녀 왔습니다.

 

앞에 연당이 있어 아름다운 연꽃이 있는 면적 3,858㎡에 달하는 "종오정 일원(從吾亭一圓)"은,

경상북도 기념물 제8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안으로 들어가기전,

그림으로 종오정 일원(從吾亭一圓)의 건물 배치를 살펴 봅니다.

 

 

 

종오정(從吾亭)을 들어서면,

수령250여년의 측백나무가 몸을 비틀다 지주대에 의지하고 서있고,

 

 

 

일성재 입구에는 1999년에 세운,

조선 영조때 학자인 문효공(文孝公) 최치덕(崔致德)의,

 죽은 사람의 평생사적(平生事蹟)을 기록하여 세운 비석인 신도비(神道碑)가 서 있고,

 

 

 

종오정 일원(從吾亭一圓)을 세운 최치덕(崔致德)이 가장 먼저 지었다는 일성재(日省齋)가 자리하고 있어,

일성재(日省齋)는 4칸의 맞배지붕으로 단출한 규모이며,

 

 

 

객사인 일성재(日省齋)의 현판이며,

일성재는 제자들이 숙식을 하던 곳으로 원래 동서로 있었다고 하는데 당시의 건물을 헐고,

남쪽에 지금의 일성재를 다시 지었다고 합니다.

 

 

 

일성재(日省齋)의 앞은 연지를 따라 배롱나무가 서있어,

연꽃과 배롱나무꽃이 함께하는 7월하순이면 아름다운 풍광을 보여 주는곳으로,

이곳에서는 개량되지 않은 천년 전의 씨앗으로 발아된 연꽃을 볼수 있다고 합니다.

 

 

 

일성재 안쪽에는 태극문양의 평삼문이 자리하고 있어,

 

 

 

삼문에는 "율수문(聿修門)"의 현판이 올려져 있고,

 

 

 

율수문을 들어서면 귀산서사(龜山書社)가 있어,

1746년에 건립한 귀산서사(龜山書社)는 원래는 모고암(慕古菴) 또는 손곡서당이라 했으나,

1928년 귀산서사로 개칭 했다고 하며 최치덕(崔致德)이 제자들을 가르치는 강당으로 쓰였던 곳으로,

 

 

 


4칸 규모로 맞배지붕의 귀산서사는 원형을 그대로 두고 보수를 하여,

검박하고 소박하기 이를데 없는 모습이며 나지막한 기단위에 자연석 덤벙주초를 넣은 후 기둥을 세웠고,

대청 2칸을 우물마루로 하고 양측에 온돌방을 둔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의 구조로 3량가의 가구로서 대공의 모습이 특이 합니다.

 

 

 

귀산서사(龜山書社)의 현판이며,

 

 

 

가운데 마루를 둔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의 대청으로 오르면,

 

 

 

마루 안쪽에 귀산서사(龜山書社)의 옛 명칭인 "모고헌(慕古菴)"의 현판이 있고,

 

 

 

마루 위에는 귀산서사기(龜山書社記)와 모고헌기(慕古菴記)의 기문(記文)을 포함하여 4기의 편액이 있고,

 

 

 

마루 양쪽에 있는 방은 안을 들여다 볼수 없게 해두었습니다.

 

 

 

귀산서사(龜山書社) 앞에는 종오정(從吾亭)이 연당을 앞에두고 자리하고 있어,

 

 

 

종오정(從吾亭)은 조선 영조때 학자인 자희옹(自喜翁) 최치덕(崔致德,1699∼1770)이 만년에 정자를 짓고 많은 학자를 배출했던 곳으로,

최치덕이 영조 21년(1745)에 돌아가신 부모를 제사지내려고 일성재(日省齋)를 짓고 머무르자,

그에게 학문을 배우고자 따라온 제자들이 글을 배우고 학문을 닦기 위해 찾아들어 종오정과 귀산서사를 지었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종오정 일원(從吾亭一圓) 이며 종오정(從吾亭)은 귀산서사보다 1년 뒤인 1747년에 건립 되었습니다.

 

 

 

정자의 앞뜰에는 화강암 석물들이 놓여 있어,

뜨에 있는 석수조, 및  복련이 새겨진 석등 받침대 외에도, 

종오정의 추춧돌 및 돌섬 축대석도 모두 폐사지에서 가져온 것들이라 합니다.

 

 

 

종오정 앞에는 누운듯 자라고 있는 배롱나무 곁에,

최치덕(崔致德)이 심었다는 향나무가 수령 300여년을 지키며 입구 연당 옆에 서 있습니다.

 

 

 

종오정(從吾亭)은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대청을 중심으로 한 중앙부는 앞뒤로 맞배지붕을 씌우고,

여기에 잇대어 좌우 측면에 다시 맞배지붕을 이은 독특한 팔작집을 이루고 있어 위에서 보면 지붕 평면이 "工"자가 되는 것이 특이하며,

기단과 주초는 신라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탑재를 주로 사용 하였고,

대청 2칸 우물마루를 중심으로 양측에 온돌방을 꾸민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의 구조 입니다.

 

 

 

종오정(從吾亭)의 현판으로,

스스로를 쫓고(從吾) 관조의 세계로 몰입하는 선비의 정신세계 추구하는 의미로 여겨 지는데,

공자의 종오소호(從吾所好)에서 에서,

"子曰 富而可究也 雖執鞭之士 吾亦爲之 如不可求 從吾所好 (자왈 부이가구야 수집편지사 오역위지 여불가구 종오소호)"로,

"공자께서 이르기를, 부를 구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내 비록 채찍을 잡는 천한 일이라도 하겠지만

구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닐지니 차라리 내가 좋아하는 바를 좇으리라."에서 가져온듯 보이며,

 

 

 

마루에는 종오정(從吾亭)의 현판 뒤로 여러 편액들이 걸려 있고,

 

 

 

마루 중앙에는 통나무 테이블을 놓아두어,

여기 앉아서 차라도 한잔 나누고 싶은 마음이 일어 납니다.

 

 

 

종오정(從吾亭)의 왼쪽방은 지간헌(持竿軒)으로,

 

 

 

지간헌(持竿軒)은 "낚시대를 드리운 은둔자 심정의 집"이란 의미가 있고,

 

 

 

귀산서사와 마찬가지로 이곳도 문이 닫혀있어 방은 들여다 볼수 잆습니다.

 

 

 

오른쪽의 방은 "소나무를 어루만지는 집"이란 의미의 "무송와(撫松窩)"로 명명되어 있어,

 

 

 

무송와(撫松窩)와 지간헌(持竿軒), 그리고 종오정(從吾亭)의 현판은,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가 1760년(영조36) 7월에 경주부윤으로 부임하고 어느 해에 종오정을 찾아,

편액을 써 주고 함께 시를 짓고 차를 마시며 교유하였고,

"화이계홍명부양호반구대운(和耳溪洪明府良浩盤龜臺韻) 화홍명부성문수리운(和洪明府城門修理韻)" 등의 시를 남겼는데,

홍양호(洪良浩)는 영조 당대의 대학자로 평안도 관찰사, 이조판서, 사헌부와 사간원의 대사헌을 지냈으며,

영조실록과 국조보감 동문휘고 등의 편찬에 참여 했던 인물 입니다.

 

 

 

마루 위에는 종오정원운(從吾亭原韻)의 편액이 있고,

 

 

 

치암(癡庵) 남경희(南景羲,1748~1812)의 "종오정중수상량문(從吾亭重修上樑文)"의 기문(記文)으로,

편액 아래에는 상량의 글씨가 있어 상량문의 배치가 절묘 합니다.

 

 

 

경주부윤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의 "종오정기(從吾亭記)"의 기문(記文) 편액으로,

3개의 현판 글씨와 함께 현액(懸額)되었다고 하며,

 

 

 

또 하나의 "종오정기(從吾亭記)"의 기문이 마루위에 올려져 있습니다.

 

 

 

화려하지도, 과하지도 않으며,

소박해 보이기까지 하는 종오정(從吾亭)의 마루에서 보이는 전경은 그윽하게 느껴지는데,

 

 

 

종오정 일원(從吾亭一圓)을 지은,

자희옹(自喜翁) 최치덕(崔致德)이 연당과 종오정의 풍경을 읊은 "지정(池亭)"이란 시(詩)를 가져 옵니다.

有亭池上起 邀客共登臨   못 위에 우뚝 선 종오정 / 손님을 맞아 함께 올랐네 

憑檻波紋細 開牕冷氣侵   난간에 기대니 물결이 작게 일고 / 창문을 여니 냉기가 스며져드네 

松梅森左右 魚鳥戱飛沈   소나무와 매화가 좌우에 가득하고 / 물고기와 새들은 자연의 모습이라 

最愛論文夜 慇懃霽月尋   밤늦도록 글 논함을 좋아해서 / 은근히 밝은 달을 찾아보았네 

 

 

 

종오정 일원(從吾亭一圓)을 세운 최치덕(崔致德,1699∼1770)은 조선 중기의 학자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성능(聖能), 호는 희옹(喜翁)이며,

숙종 25년(1699) 경주 황남리에서 태어나 양동의 매호(梅湖) 손덕승(孫德升,1659~1725)과,

중리의 송국재(松菊齋) 이순상(李舜相,1659~1729)의 문하에서 사상과 학문을 전수 받았고,

학문에 대성하였으나 과거를 보지 않고 정성스럽게 노친을 봉양 하였으며,

1745년(영조 21)에 부친상을 당하여 삼년상을 마친 후에 묘 곁에 아침저녁으로 성묘하여 효자로 칭송 받았고,

그에게 배움을 청하는 제자가 날로 늘어 "모고암(慕古巖)"과 "일성실(日省室)", "종오정(從吾亭)"을 지어,

여러 학생들과 학문을 강론하여 후진 교육에 매진하여 1770년(영조 46) 72세로 죽기까지 진사 9명외 70여명의 제자를 길러내어,

문하생 가운데 등과해 벼슬에 오른 사람이 10여명에 이르렀으며,

학문 연구에 몰두하여 "역대시도통인(歷代詩道統引)", "심경집(心經集)" 등 많은 저서를 남겼으며,

죽은지 3년 후 1773년(영조 49)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추증 되었고 시호는 문효(文孝) 입니다.

 

 

 

처마를 받치고 있는 활주의 모습으로,

활주아래 혼유석이 초석으로 사용되고 있어 폐사지의 것으로 여겨지며,

 

 

 

종오정(從吾亭)에는 기단 석재에 석탑의 우주와 탱주가 남아있는 기단부가 사용 되었고,

혼주석과 장대석이 보이기도 합니다.

 

 

 

종오정 뒤편에는 계단을 두고 사당이 자리하고 있어,

 

 

 

사당의 축대 아래에는 용도는 알수 없으나 항아리를 땅속에 묻어 두었고,

 

 

 

1954년에 건립되었다는 묘우인 진덕묘(進德廟)는 3칸규모의 맞배지붕으로,

 

 

 

진덕묘(進德廟)는 자희옹(自喜翁) 최치덕(崔致德)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일년에 한번씩 음력 9월 중정에 향사를 모시고 있다고 하며,

 

 

 

3칸의 사당 문짝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어,

중앙에 사군자의 그림이 있고 양쪽의 문에는 매화로 채워져 있습니다.

 

 

 

사당에서 내려와 연당을 따라 한바퀴 돌며 종오정(從吾亭)과 주변을 돌아 봅니다.

 

 

 

자희옹(自喜翁) 최치덕(崔致德)의 효행과 후학양성을 위한 생을 돌아볼수 있고,

정자을 중심으로 연당(蓮塘)에는 앞면 좌우에 향나무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나무가 심어져 있는,

연당이 아름다운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정원 유적으로,

경북 경주의 종오정 일원(從吾亭一圓) 방문기 입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