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을 여행 하면서,

울산광역시 중구 북정동에 있는 조선 후기의 관아 건물인,

울산동헌 및 내아(蔚山東軒 內衙)와 가학루(駕鶴樓)를 찾았습니다.

 

울산동헌 및 내아(蔚山東軒 內衙)는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울산동헌(蔚山東軒)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비석들이 있어,

 

 

 

1991년 건립된 고복수의 "타향살이" 노래비로,

고복수는 1912년 울산에서 잡화상을 경영하는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타향살이는 1934년 작곡가 손목인의 작품으로 작사가인 금능인은 동요창작과 보급운동을 하던 인물로 본명은 승응순이며,

노래의 원래 제목은 "타향"이나 가사의 첫 구절인 타향살이가 제목으로 변하여 굳어 졌는데,

일제 강점기 조국을 잃고 고향을 떠난 사람들의 한맺힌 설움을 달래주던 한시대를 대표하던 노래이기도 합니다.

 

 

 

울산동헌 및 내아(蔚山東軒 內衙) 앞에는,

안내문으로 옛 울산 도호부의 부속건물들까지 표현해두어 건물의 배치등을 미리 살펴 봅니다.

 

 

 

가학루(駕鶴樓)는 옛 울산도호부 내아(內衙)의 정문(남문)으로 사용 되었던 누각으로,

 

 

 

가학루(駕鶴樓)와 같은 이름의 누각은 경상북도 영주와 충청북도 영동에 있고 강원도 안변에도 있다고 하며,

가학루는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 소실됐다가 1980년대 정확한 고증 없이 지금의 단층구조로 복원 되었다가,

일제강점기에 발행한 엽서 속 옛 울산동헌 가학루의 사진을 참고로 2017년 옛날 양식인 정면 3칸, 측면 2칸과 2층 누문 등으로 복원 하였습니다.

 

 

 

가학루(駕鶴樓)의 현판으로,

가학(駕鶴)이란 울산을 주장하는 계변신이 학을 타고 내려와,

울산 고을을 다스리는 수령으로 하여금 선정을 베풀도록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가학루는 일반인들로 올라볼수 있게 개방 해두어,

문 안쪽의 오른편에 있는 나무계단으로 누마루에 오를수 있으며,

 

 

 

누마루에 올라보면 복원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인지 목재와 단청이 깨끗하며,

 

 

 

가학루는 통행금지가 해제되는 오전 4시30분과 점심시간인 정오에 북을 치고,

나팔을 불어 주민에게 시간을 알리는 역할을 했으며 수령을 보좌하는 사령이 공지사항을 알리고,

신문고 역할을 하는 데 사용되었다고 하며,

 

 

 

누마루 가운데에 북과 북채를 두어,

일반인들도 북을 두둘겨 볼수 있도록 해 두었습니다.

 

 

 

가학루(駕鶴樓) 누마루에서의 내려다 보이는 풍경으로,

 

 

 

공사를 위해 막아둔 북정공원의 일부와,

울산 중구 문화의 거리쪽의 전경이 마천루와 함께 들어 옵니다.

 

 

 

가학루에서 내려와 안으로 들어가면,

 

 

 

울산동헌(蔚山東軒)이 자리하고 있어,

울산동헌은 옛 울산읍성 안의 중심 건물로 울산도호부의 수령이 공무를 처리하던 건물로,

동헌(東軒)은 1681년(숙종 7) 울산부사 김수오(金粹五)가 처음 지었으며 그의 아들인 부사 김호가 일학헌(一鶴軒)이라 편액 하였고,

1763년(영조 39) 부사 홍익대(洪益大)가 다시 지어 반학헌(伴鶴軒)으로 개칭 하였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울산군청으로 해방이후에는 울산군청 회의실로 사용 하였고,

1981년에 복원이 이루어졌으며 동헌과 내아, 오송정, 학성도호부아문(鶴城都護府衙門)만을 중건하여 지금의 모습에 이르고 있습니다.

 

 

 

동헌(東軒)은 정면 6칸 측면 2칸의 익공계(翼工系)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1981년 11월 건물을 뜯을 때 나온 상량문에 의하면,

1763년(영조 39) 9월 9일에 부사인 홍익대(洪益大)가 중건하고 이름을 반학헌(伴鶴軒)이라 고치고 현판을 고쳐 걸었슴을 기록하고 있고,

증보문헌비고 권39 여지고(輿地考) 27 경상도 울산 반학정조(伴鶴亭條)에는 1760년에 중건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어서,

위 상량문과는 3년간의 차이가 있으며,

일학헌중수상량문(一鶴軒重修上樑文)에 의하면 1787년(정조 11)에 유한위(兪漢緯)가 중수하였음을 알 수 있어,

이 관청은 병마절도사영·수군절도사영과 더불어 울산의 대표적인 관아였으며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습니다.

 

 

 

반학헌(伴鶴軒)의 현판으로,

1763년(영조 39)경 부사 홍익대(洪益大)가 중건 하면서 개칭하였던 동헌(東軒)의 명칭이며,

 

 

 

동헌(東軒) 마루에는 도호부의 수령이 공무를 처리하는 모습을,

인형으로 재현 해두어 이해하기 쉽게 해두었으며,

 

 

 

건물 뒤편에도 길게 마루를 내어둔 동헌(東軒)의 뒷모습을 돌아보고 내아(內衙)로 향합니다.

 

 

 

동헌의 서편 앞쪽에는 정면 6칸 측면 1칸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인 내아(內衙)가 자리하고 있어,

울산동헌(蔚山東軒)의 부속건물인 내아는 담장이 없으며 수령이 살던 살림집으로,

온돌방 4칸, 대청 2칸, 부엌과 누마루 각 1칸씩을 둔 "ㄱ"자형 건물로,

"ㄱ"자형의 평면은 조선시대 울산지역 상류주택의 "一"자형 안채에 사랑방과 누마루를 덧붙인 형식으로,

안채와 사랑채가 1동(棟)의 건물로 이루어진 특징이 있습니다.

 

 

 

마당 가운데 동백나무가 있고,

가운데 2칸의 대청옆 우측의 2칸방에도 모형을 두어,

 

 

 

수령의 부인이 거처하는 안채의 모습도 살펴볼수 있으며,

 

 

 

왼쪽에는 누마루가 있는 방이 있어 수령의 거처인 사랑채로 보이며,

내아(內衙)는 울산이 부·현·도호부 등으로 승격 또는 강등되면서 그 때마다 치소(治所)를 옮기거나 폐쇄하거나 새로 짓거나 하였다고 합니다.

 

 

 

내아의 뒤편에는 선정비와 공덕비 등을 모아두어,

"울산부사 유봉징 애휼군졸비"를 비롯한 많은 비석들은 작은 안내문이 있어 이해를 편하게 해두었고,

 

 

 

비석군을 돌다보면 복제품인 보물 제441호 울산 태화사지 십이지상 사리탑(蔚山太和寺址十二支像舍利塔)이 있어,

울산광역시 태화사지에 세워졌던 신라의 사리탑으로,

이 탑이 발견된 태화사(太和寺)는 신라 선덕여왕대에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가져온 사리를 모시기 위해 창건한 사찰로,

이 탑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석종형 탑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표면에 십이지상을 새기고 감실을 마련 했으며,

탑의 크기는 1m 정도로 인도에서 중국에 이르기까지 널리 유행한 봉헌탑(奉獻塔)의 형식이었던 것으로 보이고,

파손된 방형 기단부 위에 놓여져 있으나 원래 기단은 아닌 것으로 추정되며,

 

 

 

부도는 이름난 스님들의 유골(遺骨)을 모시기 위해 세운 돌탑으로,

이 부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돌종 모양(石鐘形) 부도일 뿐만 아니라 표면에 십이지상(十二支像)을 조각(彫刻)한 것이 특이하며,

십이지상은 능묘(陵墓)나 석탑에는 보이나 부도에 새겨진 것은 이것이 유일한 것이라 합니다.

 

 

 

직사각형 모양의 대석(臺石) 위에 돌종 모양의 탑몸(塔身)을 올려놓은 형태인데,

탑몸 앞면에 감실(龕室) 을 설치하고 그 아래쪽에 짐승의 머리에 사람의 몸을 한 십이지상을 돋을 새김 했는데,

남쪽에 새겨진 것은 오상(午像 : 말)이고 북쪽에 새겨진 것은 자상(子像 : 쥐) 입니다.

 

 

 

사리탑의 뒤편 에서도 "참령 구연하 거사비"를 비롯한 여러 비석들을 찾을수 있고,

 

 

 

비석군 윗쪽에는 오송정(五松亭) 이라는 육각정자를 세워두어 쉼터로 활용하는듯 하며,

 

 

 

동헌 뒤쪽의 동편에는 홍살문과 비각이 자리하고 있어,

하늘을 감동시킨 효자로 유명한 효자송도선생 정려비(孝子宋滔先生 旌閭碑)로,

울산광역시의 유형문화재 제1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연안 송씨로 조선 초기 울산에 살았던 효자였던 송도(宋滔)는,

송도(宋滔)는 울산지역 최초의 생원(生員)으로 병든 부모를 10여 년 동안이나 정성껏 간호 하였는데,

모친이 병이 깊어 물고기회를 구하고자 하였으나 가난하여 마련할 수가 없어 얼음판을 두드리며 울었는데 그러자 붕어가 뛰어나왔다고 하며,

또한 제사를 지내려고 제수를 구하니 산의 꿩이 날아들어 왔다고 하며,

1년 사이에 부모가 잇달아 돌아가시자 몸소 흙과 돌을 져다 무덤을 만들고 유교식 예법에 따라 사당을 세워 신주를 모시고,

새벽마다 배알하고 때에 맞추어 제사를 지냈는데 당시까지 불교식 장례가 일반화된 상황에서 송도의 효행은 매우 두드러진 것으로,

 

 

 

이러한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1428년(세종 10) 효자로 정려(旌閭)되고 표창을 받았는데,

 

 

 

이러한 내용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등에 기록되어 있으며,

정려비 앞면은 "효자성균생원 송도지려(孝子成均生員宋滔之閭)"라 적었으며 뒷면에는 송도의 효행을 기록 하였고,

정려비 왼쪽의 깨어진 비석은 "강희임진(康熙壬辰) 팔월(八月)"이란 구절로 보아,

1712년(숙종 38)에 세웠던 것으로 보이며 중구 우정동에 있던 비석과 비각을 2006년 이곳으로 옮겨 왔습니다.

 

 

 

비각 안에는 3기의 현판이 올려져 있는데,

비각과 비석에 관한 기문(記文) 편액(扁額)으로 보이는데 설명이 없어 자세히 알지는 못합니다.

 

 

 

울산을 여행하면서 찾은 조선 후기의 관아건물로,

조선조 울산도호부의 관청을 살필수 있으나,

중심 건물인 동헌(東軒)과 부속건물인 내아(內衙)만 남아있어,

전체적인 도호부의 모습은 알길이 없어 작은 아쉬움이 남게 되는 곳으로,

울산동헌 및 내아(蔚山東軒 內衙)와 가학루(駕鶴樓)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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