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김해시 서상동에 있는 금관가야의 시조 수로왕(首露王)의 무덤,

김해 수로왕릉(金海 首露王陵)을 찾았습니다.

 

사적 제73호로 지정된 김해 수로왕릉(金海 首露王陵)은,

가락국(駕洛國, 금관가야)의 시조이자 김해김씨의 시조인 수로왕(재위 42∼199)의 무덤으로 납릉(納陵) 이라고도 이르며,

 

 

 

지도를 통해서 수로왕릉(首露王陵)의 권역을 미라 살펴보고 들어 갑니다.

 

 

 

수로왕릉(首露王陵)의 정문이자 외삼문인 숭화문(崇化門)을 들어서면,

홍살문이 자리해 있고,

 

 

 

수로왕릉(首露王陵)의 중문 누각인 "가락루(駕洛樓)"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의 누각으로,

 

 

 

가락루(駕洛樓)의 현판으로,

고대 부족 국가 시대 낙동강 하류에 일어난 나라들을 통틀어 이르던 가락국(駕落國)에서 가져온듯 보이며,

 

 

 

가락루(駕洛樓)는 다시 고쳐 지은지 얼마 되지 않은듯,

마루의 난간과 처마에는 단청조차 올리지 못하고 있으며 2층의 누각으로은 오르지 못하게 해 두었습니다.

 

 

 

가락루를 들어서면 왼쪽에 세운지 오래지않아 보이는 3기의 비석이 있어,

왼쪽의 가락국태조왕 숭선전(駕洛國 太祖王 崇善殿) 납릉 후릉 중수비(納陵 后陵 重修碑)와,

가운데 가락국 태조왕릉 중수기적비(駕洛國 太祖王陵 重修紀蹟碑)가 있고,

오른쪽에는 중건신도비명(重建神道碑銘), 중건신도비(重建神道碑)가 나란히 서 있으며,

 

 

 

안쪽에는 수로왕릉의 신도비각(神道碑閣)인 숭신각(崇神閣)이 있어,

1885년(고종 22)에 정면 3칸 측면2칸으로 창건되어 1926년과 1954년 두 차례에 걸쳐 중수가 이루어졌고,

1988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 되면서 보수 되었습니다.

 

 

 

비각의 현판인 "숭신각(崇神閣)"이며,

 

 

 

숭신각(崇神閣)에 있는 신도비(神道碑)에는,

가락사(駕洛史)와 숭선전사(崇善殿史)가 기록된 비(碑)라고 하며,

 

 

안쪽에는 내삼문 격인 솟을대문인 포덕문(布德門)이 있고,

 

 

 

포덕문을 지나면 수로왕릉(首露王陵)의 전경이 들어와,

수로왕(首露王,?∼199)에 관한 "삼국 유사" 가락국기 부분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으로,

아직 나라가 없던 시절에 가락 지역에서는 주민들이 각 촌락별로 나뉘어 생활하고 있었는데,

서기 42년인 신라 유리왕 19년 3월의 어느 날, 이 곳 마을 사람들은 북쪽 구지봉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9간(九干 : 族長) 이하 수백 명이 구지봉(龜旨峰)에 올라 가보니,

사람은 보이지 않고 산꼭대기 흙을 뿌리면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 곧 대왕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소리만 들렸다.

 

사람들이 그 말에 모두 기뻐하며 그 곳에서 하늘에 제사 지내고 노래하고 춤을 추자,

하늘에서 한 줄기 빛이 땅에 떨어졌고 거기에는 붉은 보자기에 싸인 금합 (金盒)이 있었다.

 

그 뚜껑을 열자 황금빛 알이 6개가 있었는데 12일이 지난 뒤 이 알에서 남아가 차례로 태어났는데 6가야국의 왕이 되었으며,

 

그 중 제일 먼저 나왔기 때문에 이름을 수로라 하가락국의 왕으로 모셨고 수로는 즉위 후 관직을 정비하고 도읍을 정해 국가의 기틀을 확립 하였다.

 

 그리고 천신의 명을 받아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온 아유타국(阿踰陀國)의 왕녀 허황옥(許黃玉)을 왕비로 맞이 하였다.

157년을 재위하다가 죽었는데, 아들 거등왕(居登王)이 뒤를 이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능침의 정문인 "납릉정문(納陵正門)"으로 1792년에 세워 졌으며,

 

 

 

납릉정문(納陵正門)의 현판이며,

 

 

 

납릉정문(納陵正門)에는 파사석탑(婆娑石塔)과 코끼리의 문양과 함께 신어상(神魚像)으로 불리는 쌍어문(雙魚紋)문양을 볼수 있어,

흰 석탑을 가운데 두고 두 마리의 물고기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모습으로 바다를 상징하는 푸른빛 바탕속에 두 마리 흰 물고기가 서로 마주보고 있고,

물고기가 마주보는 대칭의 중심부분에는 흰색으로 그려진 탑모양의 물체가 우뚝 서 있으며,

그 윗 쪽으로는 형태를 알 수 없는 기하학적 도형이 그려져 있는데,

이 역시 정확하게 서로 맞서는 좌우대칭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이러한 문양은 인도와의 교류를 나타내는 단서가 되고 있다고 합니다.

 

 

 

수로왕(首露王)에 대한 이야기는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에 전하고 있으나,

무덤이 정확히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며 왕릉의 외형은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무덤의 높이는 약 5m이며,

왕릉은 고려 문종 때에 부분적으로 수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 뒤에 다시 퇴락해져서,

"세종실록"에 수로왕릉과 수로왕비릉에 대해 무덤을 중심으로 사방 30보에 보호구역을 표시하기 위한 돌을 세우고,

세종 28년(1446)에 다시 사방 100보에 표석을 세워 보호구역을 넓힌 것으로 나타나며,

 

 

 

무덤이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580년(선조 13)에,

당시 영남관찰사이며 수로왕의 후손인 허엽(許曄) 수로왕비릉(허왕후묘)와 더불어 대대적으로 개축 하였고,

1647년(인조 25)에는 왕명에 의하여 허적(許積)이 묘비문을 지어 가락국수로왕릉(駕洛國首露王陵)이라 새긴 능비를 세웠으며,

고종 15년(1878)에는 승선전의 호를 내리고 능묘를 개축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납릉정문 앞에는 성생대(省牲臺)를 볼수있어,

시생대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춘추대제를 지내기 위해 돼지를 잡는 의식을 하는 곳으로,

제래 하루 전 모든 집사들이 참여하에 집행 된다고 합니다.

 

 

 

성생대의 오른쪽 뒤편에는 3칸 규모의 "숭정각(崇禎閣)"이 있어,

 

 

 

숭정각(崇禎閣)의 현판이며,

 

 

 

숭정각(崇禎閣)에는 김수로왕(金首露王)의 영정과,

 

 

 

허황후(許皇后)의 영정이 함께 모셔져 있습니다.

 

 

 

숭정각 뒤에는 능의 부속건물인 숭선전과 숭안전을 통하는 문이 있어,

 

 

 

숭선전으로 들어가는 삼문인 숭인문(崇仁門)으로,

숭인문(崇仁門)에도 납릉정문에서 보았던 신어문양인 쌍어문(雙魚紋)을 다시 볼수 있으며,

 

 

 

숭인문을 들어서면 숭선전(崇善殿)과 안향각(安香閣) 등의 건물들이 나란히 서있어,

 

 

 

수로왕릉 숭선전(首露王陵 崇善殿)은 수로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곳으로,

1878년(고종 15) 수로왕의 신위를 모신 숭선전(崇善殿)의 현액을 내리고 김씨·허씨 양성을 교대로 참봉을 맡게 했으며,

이때 안향각(安香閣)·석양·비각 등이 설치되었으며 왕릉의 능역은 건물 15동 47칸, 임야 1만 5,170평으로, 

 

지금도 그 후손들은 춘추(春秋)로 제향을 올리고 있는데 이곳의 숭선전(崇善殿)의 재례는 경남무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숭선전 옆에는 맞배지붕의 1칸의 작은 전각인 안향각(安香閣)이 있어,

안향각(安香閣)은 1824년 건립 되었고 춘추제례에 예조에서 보내온 향(香)과 촉(燭)을 봉안하는 곳이며,

수로왕은 금관가야가 신라에 합병된 후에도 가야의 시조로서 계속 봉사(奉祀) 되었는데,

문무왕은 수로왕릉의 위전(位田)을 설치해 후손에게 능묘의 제례를 계속하게 했으며 그것은 고려시대에 와서도 계속 되었습니다.

 

 

 

안향각의 동편에는 정면 5칸의 커다란 전각인 숭안전(崇安展)이 자리해 있어,

숭안전(崇安展)은 1988년 신축 되었으며 가락국 2대에서 9대까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곳으로,

2대 도왕(道王), 3대 성왕(成王), 4대 덕왕(德王), 5대 명왕(明王), 6대 신왕(神王), 7대 혜왕(惠王), 8대 장왕(莊王), 9대 숙왕(肅王)으로,

금관가야의 팔왕조(八王朝)를 모시고 있습니다.

 

 

 

숭안전(崇安展)의 현판이며,

 

 

 

숭안전 곁에는 춘추대제 시 제수(음식)를 만들거나 보관하던 건물로 서원청(書員廳)이 자리하고 있어,

서원청(書員廳)은 1700년에 서원청으로 건립 했다가 1969년 제기고로 개칭하였다고 하며,

1980년 중건 되었고 1987년 지금의 자리로 이건 되었습니다.

 

 

 

서원청 옆에는 전사청(典祀廳)이 자리하고 있어,

 

서원청과 같이 3칸의 맞배지붕의 구조로 1700년(숙종 26)에 창건 되었고,

1792년 중수가 있었으며 1795년과 1935년 그리고 1980년 3차례에 걸쳐 중건 되었으며,

1988년 지금의 자리로 이건 하였으며,

 

 

 

전사청(典祀廳)은 제례에 올릴 제사 음식을 장만하고 제물, 제기 등 제사에 필요한 여러 가지 도구들을 보관하던 곳으로,

관람객들이 볼수 있도록 진열을 해두어 이해를 돕고 있습니다.

 

 

 

가락국(駕洛國)의 시조로 서기전 1세기부터 서기 6세기 중엽까지,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독립적 왕권과 영역을 유지 하였던 고대국가로,

532년 신라에 병합 되기까지 600여년의 철기문화를 꽃피웠던 가야 제국(加耶諸國)의 뿌리를 찾을수 있는 곳으로,

경남 김해의 유적 "수로왕릉(首露王陵)"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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