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홍성군 홍북읍에 있는 조선 후기의 양반주택으로,

홍성 노은리 고택(洪城 魯恩里 古宅)을 찾았습니다.

 

국가민속문화재 제231호로 지정된 "홍성 노은리 고택(洪城 魯恩里 古宅)"은,

엄찬고택(嚴璨古宅)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성삼문 유허지"와도 인근에 자리해 있으며,

 

 

 

1670년경 건립된 조선 후기의 양반주택으로 사육신(死六臣) 성삼문(成三問,1418~1456)의 멸문지화에,

겨우 살아 남은 외손 엄찬(嚴璨)이 살았던 집으로 전하는 곳으로,

성삼문은 그의 외가가 있는 이 마을 노은동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그가 태어난 집이 어딘지 알 수 없지만 이 가옥이 그의 탄생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이 있게하는 고택(古宅) 이기도 합니다.

 

 

 

행랑채 또는 안사랑채로 여겨지는 중문간채에 있는 돌출된 누마루로,

원래 사랑채와 문간채도 있었으나 현재는 안채와 안채에 붙은 익실과 중문간채만 남아있어,

 

 

 

중문간채의 온돌방은 2칸이 하나로 트여 있으며,

 

 

 

성삼문(成三問,1418~1456)이 38세로 생을 마감하자,

시신은 갈기갈기 찢기어 전국으로 흩어지고 아버지와 형제들 그리고 형제의 자손들마져 모두 몰살 당하게 되어 제를 올려 줄 사람 조차도 없었는데,

성삼문(成三問)의 부인인 김씨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밤나무를 깍아 신주를 만들고 제사를 지냈다고 하며,

그 후 부인마져 세상을 떠나자 외손 되는 사람들이 신주를 넘겨 받아 노은리에 단을 쌓고 제사를 지내 주었다고 하는데,

고택(古宅)에서 노은리 방향으로 약 1Km 정도만 가면 성삼문선생 제를 올리는 노은단이 있어,

그 단이 세워지기 전에 성삼문의 둘째 딸이 아들 엄찬을 데리고 부친의 생가지에 내려와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문화재청에서 발간한 실측 보고서에 따르면 엄찬이 이 곳에서 살았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설명하고 있어,

엄 찬(嚴 纘,1642-1713)은 서울 출신으로 1669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통훈대부 충주목사(忠州牧使)와 충주진(忠州鎭)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를 역임 하였는데,

1672년 서울 인왕산에서 성삼문 등의 신주가 우연히 발견 되었을때,

잠시 그의 집에 봉안하기도 하였던 것으로 미루어 서울에 거주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엄 찬은 종고조부인 엄 서(嚴 曙, 1516~?)의 증손 엄정구(嚴鼎耉,1605~1670)에게 출계(出系)하여 대를 이었는데,

조선 초부터 대대로 서울에서 거주한 것으로 추정되는 엄 찬 집안이 어떤 연고로 홍성지역에 고택을 건립하게 되었는지 확인되지 않아,

이곳의 고택을 엄찬고택(嚴璨古宅)으로 단정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판단되며,

조사과정에서 엄 찬(嚴 纘, 1642-1713)이 성삼문의 8대 외외손(외손의 외손)임을 밝힐 수 있는 근거는 확보 하였으나,

현재의 고택과 엄 찬이라는 인물을 연결할만한 자료나 문헌을 확인하지 못했다. 라는 내용도 있습니다

 

 

 

또한 고택으로 보기에도 일반적인 배치와는 많이 다르며,

영남 북부지역에서 많이 보이는 재사(齋舍)와도 유사한 부분들이 있어

구조나 건물의 특성 등에서 보아 묘제(墓祭) 때 사용되는 재실 이었을 가능성도 있어,

노은리 고택(魯恩里 古宅)를 둘러보는데 참고가 되었으면 합니다.

 

 

 

지금까지 노은리 고택(魯恩里 古宅)으로 분류되고 있어 이곳에서는 고택(古宅)으로 표기를 하는것으로 하며,

구조는 안마당이 트이지 않고 사방이 막혀 폐쇄감이 강한 "ㅁ"자형의 집으로,

평면을 자세히 보면 "ㅂ"자 모양이 거꾸로 배치되어 정면 양쪽으로 날개부분이 빠져 나온 모습으로,

이러한 평면 구조를 "날개집"이라고 하는데 영남 북부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조이며,

 

 

 

본채는 약간 높은 대지에 경사진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ㅁ"자형으로 지었고,

북쪽은 팔작지붕이며 나머지 동서남쪽 부분은 맞배지붕과 앞면이 사디리꼴 모양인 우진각 지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안대청의 서측 익랑은 길게 누다락을 설치하여 하부는 광으로 쓰고 상부는 다락방으로 쓰고 있으며,

방 앞쪽으로 부엌을 두고 부엌 상부는 누다락을 만들어 안방에서 출입 하도록 하였습니다.

 

 

 

마당 가운데에 우물이 있어 특이하며,

 

 

 

고택(古宅)은 현재 안채를 제외한 사랑채나 부속 건물이 없어 전체적이 배치구성을 확인할 수 없으나,

가옥의 안채만으로 보면 충청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매우 폐쇄된 배치구조인 것을 알 수 있는데,

급하지 않은 경사의 입지조건 임에도 불구하고 안채의 대지는 급한 구릉에 배치시키고 있어,

안채의 기단은 4자 이상으로 높여 남측 중문간채와는 단차가 심한편 입니다.

 

 

 

6칸의 안채 마루는 제법 너른편으로,

마루 가운데 사각형의 기둥이 있어 일반 고택에서 보기 힘든 부분이며,

안채의 중심부에 안대청을 두고 좌우에 안방과 건너방을 배치해 두어,

 

 

 

안방과 마주하고 있는 건넌방의 모습이며,

 

 

 

안방은 큰방이 2개로 나뉘어져 있어,

앞쪽의 방은 부엌위 누다락으로 오르는 문이 보이고,

겨울의 찬바람을 막기위해 미닫이와 여닫이로 2중창을 해두어 조선후기의 양식을 엿볼수 있으며,

 

 

 

뒷쪽에도 또하나의 방을두어 서로 통할수 있도록 해두었습니다.

 

 

 

안방 앞에 있는 제법 너른 부엌도 들여다 보고,

 

 

 

대청의 동편에는 판벽으로 막아 곳간로 사용 하도록 하였는데,

안대청과 지붕선을 맞추기 위하여 양 익랑까지 높아지게 되었으며,

 

 

 

양 익랑이 높아짐으로써 마치 중층과 같은 형태가 되어 익랑에 누다락을 만들 수 있게 되었고,

이러한 배치와 건물구조는 충청지방에서 보다는 산과 능선이 많은 영남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배치와 구조 이기도 합니다.

 

 

 

근자에 보수를 한듯한 익랑에 있는 고방(창고)도 들여다 보고,

 

 

 

안채의 서편과 동편에는 계단을 길게 내어 대청으로 오를수 있도록 해두었고,

 

 

 

동편에도 부엌은 아니지만 건넌방에 불을 넣는 아궁이의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사랑채가 있었는지 멸실 되었는지는 알수 없으나,

안채의 규모로 보아 사랑채로 사용하는 곳으로 볼수있는 공간이 보잘것 없으며,

충청지역에서 보기힘든 폐쇄형의 구조로 인근에 있는 성삼문 유허지와 최영사당과 함께 찾아 볼만한 곳으로,

충남 홍성의 국가지정 문화재, 홍성 노은리 고택(洪城 魯恩里 古宅)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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