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안동의 하회마을 여행에서, 

풍산류씨 겸암파의 대종택인 입암고택(立巖古宅)의 "양진당(養眞堂)"을 찾았습니다.

 

안동 하회 양진당(安東 河回 養眞堂)은 보물 30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양진당(養眞堂)이 있는 입암고택(立巖古宅)은 하회마을 최고의 명당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회마을의 안내문에서 마을의 중심 부근에 있는 양진당(養眞堂)의 위치를 살펴 봅니다.

 

 

 

행랑채를 들어서면 사랑채인 양진당(養眞堂)이 자리하고 있어,

양진당이 있는 입암고택(立巖古宅)은 조선중기의 명재상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1542~1607)의 형,

겸암(謙菴) 류운룡(柳雲龍,1539∼1601)의 집으로 풍산류씨 겸암파의 대종택이며,

당호인 양진당(養眞堂)은 유운룡의 6대손 유영(柳泳, 1687~1761)의 어릴 때 이름에서 따 온 것이라 하며,

 

 

 

사랑채인 양진당(養眞堂)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비교적 높은 기단 위에 세운 이 건물은 바깥 주위에 툇마루와 난간을 둘러 누(樓)와 같은 인상을 주며,

오른쪽 3칸은 대청 왼쪽 1칸은 온돌방인데 대청에는 넌출문인 4분합(四分閤) 여닫이문을 달아 3칸 모두 열 수 있게 해 두었으며,

건물 안쪽 일부 재료를 만든 수법이 뛰어나고 일반 주택으로는 제법 규모가 큰 조선시대 별당 건축물 중 하나 입니다.

 

 

 

양진당의 대청 전면에 있는 "입암고택((立巖古宅)"의 현판으로,

겸암의 아버지 입암(立巖) 류중영(柳仲郢,1515∼1573)의 호를 빌어 입암고택(立巖古宅)이라 하며,

진사 최동진(崔東鎭)의 글씨로 알려져 있으며,

 

 

 

입암고택((立巖古宅)에는 후손이 거주하고 있어 안채나 사랑채의 내부를 볼수 없으며,

양진당은 하회마을의 입향 시조인 전서(典書) 류종혜(柳從惠)가 처음 자리 잡은 곳으로 입향 당시인 13세기에 지어진 건물로 전해지며,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00년경에 중수하여 고려 말의 건축 양식과 조선 후기의 건축 양식이 섞여 있는데,

양진당은 하회마을 에서는 드물게 정남향(正南向)을 취하고 있으며,

문간채와 행랑채가 길게 이어져 있고 "ㅁ"자형의 안채와 그 북쪽의 사랑채인 양진당을 "一"자형으로 배치 하였는데,

99칸으로 전해 오지만 지금은 53칸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양진당(養眞堂)에서 서편으로 사랑채와 문간채로 이어지는 안채의 뒷모습이며,

 

 

 

양진당(養眞堂)의 온돌방에는 아궁이에 불을 들이고 있어,

사랑채는 집주인이 외부인을 접견하는 것이 주기능이나 이곳 양진당은 하회마을 종택으로,

문종회의나 집안 행사 등을 거행했던 장소라고 하며,

사랑채 왼쪽 온돌이 깔려있는 방은 집주인이 일상적으로 거주하면서 생활하던 공간이라 할 수 있으며,

온돌병 옆을 판문이 있는 통로를 통해 안채와 사랑채 사이를 왕래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양진당에서 보이는 솟을대문과 5칸의 행랑채의 모습으로, 

양진당은 경북지역 대부문의 고택과 마찬가지로 안채와 사랑채가 엄격히 분리되어 있으며,

사랑채는 고택 왼쪽편 솟을대문을 통해 출입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조선중기를 대표하는 양반가옥의 사랑채 건물로,

하회마을에서 꽃술에 해당하는 곳에 자리하여 가장 좋은 명당에 위치해 있으며,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생가인 충효당(忠孝堂)과 더불어 하회마을에서 가장 두드러진 건축물로 꼽히는,

안동 하회마을의 양진당(養眞堂)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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