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결성면 성곡리에 있는,

만해 한용운 생가지(萬海 韓龍雲 生家址)를 찾았습니다.

 

만해한용운생가지(萬海韓龍雲生家址)는 충청남도 기념물 제7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대형 안내문을 통해서 생가지 권역의 위치를 미리 살펴 봅니다.

 

 

 

주차장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곳은 "만해 문학체험관"으로,

만해 문학체험관은 한용운(韓龍雲)의 애국, 애민정신을 기리고자 2007년 10월 개관을 하였다고 하며,

늦은 시간에 이곳에 도착한 까닭에 아쉽게도 체험관은 들어가 보지 못합니다.

 

 

 

생가지(生家址)로 향하는 입구에는,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의 동상이 있어,

 

 

 

한용운(韓龍雲,1879~1944)은 일제강점기 불교계에 혁신적인 사상을 전하고 독립운동에도 앞장섰던 승려이자 시인이며 독립운동가로,

본관은 청주 자는 정옥(貞玉) 법명은 용운(龍雲) 법호는 (萬海, 卍海)이며,

1879년 이곳 성곡리에서 태어난 한용운은 6세부터 성곡리 서당골에서 한학을 배워 9세에 문리를 통달 신동소리를 들으며 자랐으며,

26세에 강원도 백담사에 들어가 불문에 입도 1905년 백담사(百潭寺)에서 득도한 뒤 수년간 불교활동에 전념하며,

1918년 불교잡지 "유심"을 창간하고 계몽적 성격의 글을 발표 했으며,

1919년 3·1운동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獨立宣 言書)의 공약(公約) 삼장(三章)을 작성 하였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했으며 옥중에서 "조선 독립의 서(朝鮮獨立之書)"를 지어 독립과 자유를 주장 하였고,

1926년 한국 근대시사의 불후의 업적 시집 "님의 침묵"을 내면서 저항문학(抵抗文學)에 앞장섰는가 하면,

민족혼(民族魂)을 깨우려고 노력 하는 한편 불교 개혁운동에 일생을 바쳤으며,

1940년 창씨개명 반대운동과 1943년 조선인 학병출정 반대운동을 전개 하는 등 일제의 극심한 탄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비타협적인 독립사상을 견지 하다가 1944년 6월 66세의 나이로,

조선총독부와 마주보기 싫다며 북향으로 지은 서울 성북동 심우장에서 입적(入寂) 하였습니다.

저서로는 1933년 유마힐소설경강의(維摩詰所說經講義)를 저술했으며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建國功勞勳章) 중장(重章)이 추서 되었습니다.

 

 

 

동상 가까이에는 독립선언서(獨立宣 言書)의 공약(公約) 삼장(三章)의 비가 있어,

ㅡ. 今日(금일) 吾人(오인)의 此擧(차거)는 正義(정의), 人道(인도),生存(생존),尊榮(존영)을 爲(위)하는 民族的 (민족적) 要求(요구)니,

    오즉 自由的(자유적) 精神(정신)을 發揮(발휘)할 것이오,결코 排他的(배타적) 感情(감정)으로 逸走(일주)하지 말라.

ㅡ. 最後(최후)의 一人(일인)까지, 最後(최후)의 一刻(일각)까지 民族(민족)의 正當(정당)한 意思(의사)를 快(쾌) 히 發表(발표)하라.

ㅡ. 一切(일체)의 行動(행동)은 가장 秩序(질서)를 尊重(존중)하야,

    吾人(오인)의 主張(주장)과 態度(태도)로 하야금 어대까지던지 光明正大(광명정대)하게 하라

 

 

 

늦은 오후의 만해한용운생가지(萬海韓龍雲生家址) 주변의 모습으로,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의 해에 만해(萬海)의 유허지를 찾는것도 또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생가지(生家址) 옆에는 넓은 공원에 "민족시비공원"이 조성되어 있어,

만해(萬海)의 어록비와 몇개의 시비외 민족시인 20여명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고 하며,

 

 

 

"자유는 만유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생의 행복이라" 라는 만해(萬海)의 어록비가 있으며,

 

 

 

1926년에 발표한 한용운韓龍雲)의 시집 "님의 침묵"에 실린 복종(服從)의 시로,

절대적인 존재인 당신(조국 혹은 부처)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을 노래하고 있으며,

자발적인 복종은 자율과 의지에 의해 가능한 것이며 진정한 자유에 이르게 한다는 사상으로,

역으로 강압적인 식민지배에 대한 거부와 저항의 분명한 근거를 의미하고 있기도 합니다.

 

 

 

1936년에 발표한 백석(白石,1912 ~ 1995)의 시집 "사슴"에 실린 "모닥불"의 시비로,

모닥불에 타들어 간 온갖 사물과 그 주변에 모여 불을 쬐는 사람들과 짐승들을 통해 일체화된 마을 공동체의 정겨운 삶을 노래하고 있는데,

소박한 시어를 나열하여 평등한 사람들이 화합하는 공동체적 삶의 세계와 그 이면에 놓인 민족의 비극을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20여기의 시비들은 생가 옆에서 시작하여,

생가 뒤편의 소나무가 있는 낮은 동산까지 이어져 있어 산책삼아 돌아 볼만 하며,

 

 

 

다시 생가지 앞쪽으로 나오면,

초가지붕의 "ㄱ"자 형의 건물이 있어,

 

 

 

초가지붕의 건물 이지만 제법 규모가 있고 고식으로 지어져 있어,

 

 

 

이곳이 생가지 인가? 하고 돌아 보았더니,

 

 

 

이곳은 생가지 아니고 생가를 관리 하기위해 지어둔 관리사무소이며,

생가는 건너편에 있어 다시 발걸음을 옮깁니다.

 

 

 

싸릿대 울타리로 복원된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의 생가는 초가지붕을 올렸으며,

 

 

 

생가는 "一"자형의 구조로 2칸의 방과 1칸의 부엌으로 구성된

우리나라 가옥의 최소이며 기본의 전형적인 구조로 흔히들 "초가삼간"이라 일컬어 지며,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된 초가집은 양쪽 옆면에 반칸을 달아내어 실용성을 더한 모습으로,

생가는 쓰러져 없어진 것을 1992년 복원을 하였다고 합니다.

 

 

 

생가의 방문앞은 길게 쪽마루를 내어둔 모습으로,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며 스님이자 시인인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이 1879년(고종 16)에 태어난 곳으로 알려진 곳이기도 합니다.

 

 

 

만해(萬海)는 1879년 이곳에서 태어나 6세부터 성곡리 서당골에서 한학을 배워 9세에 문리를 통달하여 신동 소리를 들으며 자랐으며,

14세에 결혼을 하고 16세에 이곳을 떠나 설악산 오세암으로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고 합니다.

 

 

 

방문위에는 한용운(韓龍雲)이 쓴 "전대법륜(轉大法輪)"의 편액이 있어,

"진리는 쉬지 않고 굴러 이어진다" 라는 의미로, 

진리의 바퀴이기 때문에 결코 멈추지않고 영원히 구르는 것처럼 불법(佛法) 또한 어느 곳 어느 누구에게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모든 중생들에게 평등하게 돌아간다는 의미 입니다.

 

 

 

방의 문짝 앞에는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을 대표하는 시(詩)인 "님의 침묵"이 걸려 있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丹楓)나무 숲을 향하야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黃金)의 꼬같이 굳고 빛나든 옛 맹세(盟誓)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날아갔다오

날카로운 첫키스의 추억(追憶)은 나의 운명(運命)의 지침(指針)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 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念慮)하고 경계(警戒)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離別)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이별(離別)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源泉)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希望)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때에 떠날 것을 염려(念慮)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沈默)을 휩싸고 돕니다.

 

 

 

웃방이 열려있어 들여다 보니,

다락으로 통하는 작은 문과 액자 등이 있어,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의 영정사진과,

 

 

 

아담한 규모의 방은 벽에 커다란 액자가 걸려 있으며,

 

 

 

방에는 옛날 생활도구인 작은 반닫이 가구와,

밤에 불을 밝히는 등잔대로 보이는 물건이 함께 놓여 있으며,

 

 

 

왼쪽에는 반칸을 달아낸 창고로 보이는 곳과 부엌이 있어,

 

 

 

생가의 부엌을 들여다 보고,

 

 

 

호른쪽에 있는 작은 헛간에는 옛날의 나무절구와 농사도구들을 함께 보관하고 있습니다.

 

 

 

생가의 뒤편을 돌아보면,

굴뚝이 처마 안쪽에 들어와 있슴을 보게 되는데,

굴뚝의 연기가 처마 안쪽에 머무르게 하여 연기로 하여금 해충등을 몰아내는 효과로 설치해 두어,

옛 사람들의 지혜를 엿볼수 있기도 합니다.

 

 

 

담장의 뒷편 모서리에는 장독대를 겸한 우물이 자리해 있고,

 

 

 

복원된 생가지를 돌아 보고 사당으로 향합니다.

 

 

 

사당인 만해사(卍海祠)로 들어가는 삼문은 계단을 두고 서있고,

 

 

 

사당으로 들어가는 삼문으로,

들어갈때에는 오른쪽의 문으로 들어가야 하며 나올때에는 왼쪽으로 나와야 하며,

중앙의 큰문은 신문이라 하여 사당에 모시고 있는 신(神)이 다니는 문이기에 사용할수없는 문으로 제향이 있을때만 열어둡니다.

 

 

 

사당인 만해사로 들어가는 삼문에는 금문(禁門)의 현판이 있고,

 

 

 

삼문을 들어서면 양쪽에 계단을 두고 사당인 만해사(卍海祠)가 있어,

 

 

 

사당인 만해사(卍海祠)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 一"자형의 건물로 사당으로는 제법 큰 규모이며,

 

 

 

사당인 만해사(卍海祠)의 현판으로,

만해사는 한용운(韓龍雲)의 호인 만해(萬海, 卍海)에서 가져 온듯 하며,

편액의 글씨는 수덕사 방장스님을 지내신 원담스님이 썼다고 합니다.

 

 

 

사당 안에는 위패와 영정이 모셔져 있어,

매년 가을 이곳에서 한용운선생 추모제가 열린다고 합니다.

 

 

 

만해사(卍海祠)에 모셔진 영정으로,

또렷한 눈매와 굳게 다문 입술에서 일제에 항거한 만해(萬海)의 굳은 의지를 느끼게 합니다.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의 해에 찾은 곳으로,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의 불교활동과 민족혼(民族魂)을 깨우려고 노력 하였으며,

일제에 맞서 독립사상을 견지하며 항거 하였던 그의 생애를 새겨볼수 있는 유허가 있는곳으로,

충남 홍성의 만해한용운생가지(萬海韓龍雲生家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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