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지곡동 두암산에 있는,

조선 전기 정자 문화재, 사은정(四隱亭)을 찾았습니다.

 

사은정(四隱亭)은 용인시의 향토유적 제50호로 지정 되었으며,

조선 중종 때의 문신으로 성리학(性理學)의 대가이자 동방사현(東方四賢)중의 한 사람인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하여,

중종 때의 유학자로 식견이 높았던 방은(方隱) 조광보(趙光輔)와 회곡(晦谷) 조광좌(趙光佐), 음애(陰崖) 이자(李耔) 등 사현이 장수 강학하던 정자로,

 

 

 

사은정(四隱亭)은 1519년의 기묘사화가 일어나기 전에 정암 조광조(趙光祖)가 세웠으므로,

16세기 초인 1500년대 초에 초창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사은정 중수기((四隱亭 (重修記)에 의하면 1796년(정조 20)에 중수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정조 때 중수하면서 단청을 다시 하고 서재(書齋)를 짓고 승사(僧舍)를 두어 보호하게 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주변에 사은정 외에도 다른 건물이 더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1899년(고종 36)에 이용구(李容九)가 지은 중수기에 의하면,

“예부터 정자가 있었으므로 지금 새로 복원하면서도 편액은 옛날 그대로 사은이라 하였다”고 기록된 내용으로 보아,

정조 때의 중수 이후 10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퇴락하였다가 조선 말기에 다시 중창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1970년대에는 원래의 규모에 외벽을 시멘트벽으로 바꾸고 전퇴에도 벽을 막아 좌우 칸에는 유리창을 달고 가운데 칸에는 출입문을 두었었는데,

1989년에는 옛 문헌을 고증하여 전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집으로 중창하면서,

마루를 높게 가설하여 누각처럼 꾸며 정자로서의 외관이 회복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전서체로 쓰여진 사은정(四隱亭)의 편액으로,

이 편액은 약 200여년이 됐다고 전해오며 1차 중수때인 1796년에 제작해 게시 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정자의 이름을 "사은(四隱)"이라 한 것은 정암, 방은, 회곡, 음애가 서로 친하게 지내며 도의(道義)로써 사귀어 더불어 즐거워하고,

농사 짓고(耕), 나무를 하고(薪), 낚시질 하며(釣), 나물을 캐는(菜) 네 가지를 낙으로 삼아 여생을 보내기 위하여 정자를 지었기 때문이라 합니다.

 

 

 

계자각 난간을 두른 정자의 우측 한편에는 한 칸의 방을 들였는데,

이 방은 후손들이 중건을 하면서 새롭게 들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정자의 천정에는 들보 아래에 상량의 글이 선명하게 보이고,

 

 

 

평면 구성을 보면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향좌측 두 칸에 걸쳐 누마루를 구성하고 오른쪽에는 방을 들였고,

측면 2칸 중 방 앞쪽을 반 칸으로 나누어 전퇴 형식으로 구성 하였으며,

양쪽 측면 전퇴칸과 앞면에는 쪽마루를 덧달고 계자각으로 꾸민 난간을 설치 하였습니다.

 

 

 

사은정 중수기(四隱亭 重修記)의 편액으로,

조선후기 조국형(趙國衡)과 이인규(李麟珪)가 사은정(四隱亭)을 중수한 뒤에,

작자인 이용구(李容九)에게 중수기를 부탁하자 지어 준 기문(記文)으로 정영소(鄭榮韶)의 글씨이며,

 

 

 

글씨가 희미하여 알아보기 힘든 기문(記文)으로 보이는 편액이 있고,

 

 

 

민종현(閔鍾顯)이 지은 "중수사은정기(重修四隱亭記)"로,

편액이 아닌 액자에 있어 원래의 편액은 따로이 보관을 하고 있는듯 합니다.

 

 

 

사은정(四隱亭)의 마루에서 보이는 풍경이며,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가 화순군 능주의 유배지에서 남긴 절명시(絶命詩)를 가져와 봅니다.

愛君如愛父(애군여애부)  임금 사랑하기를 어버이 사랑하듯이 하였고

憂國如憂家(우국여우가)  나라 걱정하기를 내 집 걱정하듯이 하였네

白日臨下士(백일임하토)  밝은 해가 이 세상을 내려다 보니

昭昭照丹衷(소소조단충)  일편단심 내 충심을 더욱 밝게 비추네

 

화순 능주의 조광조의 유배지에 관한 내용은 아래를 클릭하시면 알수 있습니다.

화순 정암 조광조 유배지_180120

 

 

 

사은정(四隱亭)과 관련하여 기묘명현으로 중종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들의 인연과 엇갈린 운명은,

지금도 자주 회자되는 역사의 한 단면이자 대표적인 이야깃 거리로 남아 있는데,

 용인시 지곡동(芝谷洞)과 보라동(甫羅洞)은 서로 붙어있는 이웃 동네로,

조선 제11대 중종조(中宗朝)에 지곡동에는 음애(陰厓) 이자(李耔)의 한산 이씨가 살았고,

보라동에는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한양 조씨가 살았다 하며,

용인이 읍향이었던 조광조는 일찍이 중앙정계에 진출하고 있었고,

선친묘를 지곡동에 소재했던 음애 이자는 1504년에 문과에 급제해 1516년경 직제학이란 관직에 있었는데,

방은 조광보와 회곡 조광좌 형제도 이곳에 살았으며 정암과 10촌 형제간 였으며 네 사람은 도의정신이 같고 학문을 연마하면서 친분이 깊었습니다.

조광조는 중종의 특별한 은총을 받으면서 당대의 실력자였고 음애 이자는 비교적 일찍 출세해 이들 깨끗한 관료의 좌장이 되었고,

회곡 조광좌는 정암의 추천으로 지평이 되었으나 그의 형 조광보는 추천에 따르지 않고 거짓 광인인 척 숨어 살았다고 하며,

이후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조광조가 사약을 받고 조광좌도 무고에 연루돼 28살 나이에 장살을 당하였고,

이자는 비록 화를 면했으나 충주 토계로 은거해 15년 후 세상을 떴났다고 합니다.

 

 

 

기묘사화(己卯士禍)로 향년 38세로 세상을 떠났던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가,

노년에 즐기고 싶어 했던 농사 짓고(耕), 나무하고(薪), 낚시질(釣)하며, 나물 캐는(采),

네 가지의 낙으로 말년을 벗들과 보내고 싶어했던 곳으로,

중종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유허가 남아 있는 곳으로,

경기도 용인의 정자, "사은정(四隱亭)"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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