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능원리에 있는,

한국등잔 박물관(韓國燈盞博物館)을 찾았습니다.

용인의 한국등잔 박물관(韓國燈盞博物館)은 1971년 수원에서 등잔전시관에서 시작하여,

1997년 9월에 재단법인 한국등잔박물관 문화재단인 경기 테마박물관으로 개관한 사회에 환원된 비영리 공익법인으로,

 


기억 속에서 잊혀지고 있는 등잔들을 고 김동휘(金東輝, 1918-2011) 옹이 40여 년간 틈틈이 모아 후세에 알리기 위하여 설립 되었으며,

조상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등잔을 모아 전시 하고있는 박물관은 수원화성 성곽의 이미지를 따서 건축 하였는데,

성곽의 형태를 본뜬 회백색 건물은 마치 횃불이나 등대처럼 보이기도 하며, 

지하 1층, 지상 3층 가운데 1·2층은 전시 공간이며 지하층은 세미나 및 각종 공연을 위한 휴식 공간으로 되어 있습니다.

 

 

 

박물관 건너편에 주차장이 있으며,

입구를 들어서면 소공원 처럼 전통방식으로 정원을 꾸며 두었고,

2,600㎡ 규모의 야외 전시장은 자연석과 다양한 종류의 나무 그리고 연못이 한데 어우러져 있습니다.

 

 

 


소공원에는 현대의 조각품들도 전시되어 있으며,

 

 

 

안쪽에는 장승(長丞)이 홀로 서있어,

장승은 우리 나라의 마을 입구 또는 절 입구에 세운 사람 머리 모양의 기둥으로,

지역 간의 경계를 나타내거나 마을의 이정표 역할을 하였으며 마을의 수호신으로서 더 큰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통 남,녀 한쌍이 있거나 여러개가 있는 경우도 있는데 홀로 서있습니다.

 

 

 

등잔 박물관(燈盞博物館)으로 들어가는 입구로,

성을 들어갈때 건너는 해자(垓字)를 건너는 느낌이며,

 

 

 

입구의 문옆에는 얼굴 모양의 나무 조형물이 있어 눈길을 잡습니다.

 

 

 

박물관은 아담한 규모이지만 등잔 300여 점이 전시되어 있어,

전통 시대의 주요 생활 기물인 등잔이 점차 역사 속에서 사라져 가고 있는 현실에서,

우리 조상들의 삶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들을 영구 보존하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김동휘 옹이 40여년간 모아온 유물을 중심으로 전시된 등잔 및 모든 민속품들은 모두 60여년간 대한민국에서 쓰여진 유물이라 하며,

 

 

 

1층 전시실은 "생활 속의 등잔"을 주제로,

우리 조상들이 등잔을 어떻게 사용했는가를 그 시대의 민속품들과 함께 전시하여 놓았는데,

사대부의 사랑방을 재현해 두어 여러가지 모양으 등잔들을 볼수 있어서,

 

 

 

선비의 책상위에 놓여진 "백자서등"으로,

등잔과 밑받침을 함께 붙여 구워낸 백자서등으로 주로 책상 위에두고 글을 읽을때 사용했던 등잔으로,

등잔 기둥을 대나무 형상으로 빗은 것은 선비의 지조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등잔대 위에 종지형 등잔(燈盞)을 올려둔 모습으로,

종지형 등잔은 접시형의 등잔이며 지름 7㎝ 내외에 높이 5㎝ 내외의 크기로,

식물성 기름(참기름·콩기름·면실유·피마자기름 등)이나 어유(魚油)·경유(鯨油) 또는,

굳기름(쇠고기국이 끓어 식은 뒤 위에 굳어 있는 노란색의 지방)을 사용하며 심지는 솜을 꼬아 쓰거나 삼실(麻絲)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이곳은 아녀자의 거주 공간인 안방의 모습을 재현해 두어,

여러가지 등잔을 함께 볼수 있으며,

 

 

 

은입사희자문무쇠촛대 (銀入絲囍字文鐵製燭臺)의 모습으로, 

무쇠판에 가는 홈을파고 일일이 은실을 박아 만든 촛대로 만든 사람의 수고를 가희 짐작할수 있으며,

촛대 상부의 판은 바람막이와 반사경 역활을 하며 상부의 판이 나비모양의 촛대도 함께 볼수있습니다.

 

 

 

옆에는 찬방의 모습도 볼수있어,

찬방은 살림살이가 넉넉한 양반가의 집안에서 부로 볼수있는 공간으로,

부엌 옆에 몇개의 공간의 방을 따로두어 식료품과 제기응 다양한 도구들을  보관하던 곳이며,

 

 

 

찬방 에서는 주로 종지형 등잔(燈盞)을 볼수있어,

 

 

 

종지형 등잔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되어있는 등잔의 받침대를 살펴 보는것도 또다른 즐거움 입니다.

 

 

 

또다른 찬방에는 떡살을 비롯한 옛사람들의 생활도구들을 모아 두었고,

 

 

 

전시실에는 호형등잔을 비롯하여 종지형 등잔 등의 모습을 볼수 있으며,

 

 

 

호형등잔은 우리나라에 석유가 들어온 1876년 이후부터 전기가 들어올때까지 가장 많이 사용했던 등잔으로,

호롱불로도 불리기도 했으며 두껑이 있는 등잔으로 석유를 안에 붓고 심지를 두껑 밖으로 꺼내 사용하는 항아리형의 등잔입니다.

 

 

 

개관 20주년을 넘긴 한국등잔 박물관(韓國燈盞博物館)의 전시품들은,

의사이자 사진작가로서 수원지역 문화예술계의 어른이었던 수원 출신 고 김동휘(1918-2011) 옹이 사비를 들여 옛 등기들을 수집 하였으며,

자신이 운영하던 수원의 보구산부인과 병원 2층에 등잔 전시장을 설치 하였고 등잔수집 소문이 널리 퍼져 여러 차례 전시회를 갖기도 했는데,

1968년에는 국립중앙박물관·국립민속박물관 소장품과 함께 두 차례 공동특별전을 개최했으며,

1971년에는 등잔으로만 단독으로 당시 수원여성회관에서 전시회를 했으며,

1991년 가을 롯데월드에서 소장품전을 열었는데 인기가 높아 전시기간을 두 달이나 연장했을 정도 였다고 합니다.

 

 

 

2011년 김동휘 옹이 세상을 떠난 뒤 아들 김형구씨가 그 유지를 이어받아 관장으로서 박물관 운영을 이어가고 있는데,

어느덧 70대 중반인 김 관장은 박물관을 중심으로 한 사회활동과 전시와 교육활동에 주력하고 있으며,

박물관을 찾은 이들에게 직접 설명까지 해주고 있습니다.

 

 

 

한국등잔 박물관(韓國燈盞博物館)의 김형구 관장(金炯九,1942~ )은,

함경도 원산 출생으로 (사)한국사립박물관협회 상임고문과 (사)경기도박물관협회 회장,

경기도박물관·미술관진흥위원회 위원장, 한국재단법인 뮤지엄협회 회장 등을 역임 또는 재임 했으며, 

박물관에서 발간한 도록 및 도서로는 2000년 "박물관 가는 길", 2002년 "불의 기원"을 비롯하여,

2015년 "한국도자의 빛 속을 거닐다"에 이르는 10여권을 발표 하였으며,

2015년에 박물관 유공 대통령상을 수상 하였고 현 재단법인 한국등잔박물관 대표 및 관장 입니다.

 

 

 

1969년 촬영한 사진으로 참고를 위해 가져와 봅니다.

왼쪽부터 김형구(28세), 부친 김동휘(52세), 조부 김용옥(75세)의 모습으로 촬영 당시의 나이이며,

김동휘의 부친은 수원에서 "김상회"라는 이름으로 오늘날 백화점 같은 사업을 하였고,

그는 서화와 민속품에 관심을 두고 상당수의 유물을 수집하여 틈나는 대로 집 안에서 감상하기도 하였는데,

이런 가정환경은 아들 동휘에게 또 어린 손자 형구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1991년에 있었던 롯데월드 전시에서 전시명을 "고등기", "옛 불 그릇" 등으로 하자는 의견이 분분 했으나,

평소 가깝게 지내던 김병모 전 한국전통문화대 총장이 그냥 "등잔"이라고 하자는 제안이 계기가 되어 "등잔박물관"이라는 명칭을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호형등잔과 더불어 근대기에 가장 많이 사용 되었던 "남포등"으로,

석유를 넣은 그릇의 심지에 불을 붙이고 바람을 막기 위하여 유리로 만든 등피를 끼운 등으로,

호롱불램프 라고도 불렸으며 주로 바람이 있는 외부에서 많이 쓰였던 등(燈)으로 램프(Ramp)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2층 전시실은 "역사 속의 등잔" 과 "아름다움 속의 등잔" 그리고 "특별기획실"이 마련되어 있어,

이곳에는 시대별, 형태별, 재질별, 용도별 및 제작 기법상의 대표적인 것들을 비교하고 감상할 수 있도록 전시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모습의 등잔대를 볼수 있는데,

나무나 철재의 재질로 돠어 있는것이 대부분이며,

 

 

 

양반가에서 사용 했을듯한 나무 등잔대로,

홈과 문양등을 넣어 조형미를 살린 등잔대가 있고,

 

 

 

조선 중기의 등잔대로,

왼쪽으 등잔대는 기둥의 무늬가 염주문에서 죽절문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으며,

상부의 불후리는 소실 되었지만 이음새의 유려한 선이 아름다운 등잔대 입니다.

 

 

 

조선후기의 놋쇠로 된 촛대겸용 등잔대로,

바늘꽂이오 심지 길리를 조절할수 있어 불의 크기를 조절할수 있는 등잔 입니다.

 

 

 

1층 전시실에서 보았던 호형백자등잔(壺形白磁燈盞)도 전시해두어,

백자등잔은 석유의 인화성 때문에 등잔의 뚜껑 위로 심지를 뽑아 올려 사용한 등잔으로,

잔과 밑받침을 함께 붙여 구워낸 백자등잔은 주로책상에 얹어서 책을 읽을때 사용하던 서등(書燈)이 있고,

 

 

 

순라군이 야경을 돌 때 사용했던 조족등(照足燈)도 있어,

불빛이 발밑을 비춘다 하여 조족등이라고 하며 그 형태가 둥근 박과 같아 박등이라고도 하며,

조선시대에 순라꾼들이 야경을 돌며 도적을 잡는데 사용하여 "도적등"이라는 별칭이 있으며,

등의 하부에 둥근 화창(火窓)이 뚫려 있으며 외면 상부에는 자루손잡이가 달려 있어,

내면의 상부 손잡이가 부착된 주변에는 움직일 때마다 앞뒤로 흔들리는 금속제의 초꽂이 틀을 그네 형태로 부착 하였는데,

초꽂이 틀의 밑면에는 회전축 역할을 하는 초꽂이가 있어 걸을 때 마다 항상 수평을 유지하며,

아래쪽 화창은 통해 불빛이 모아져 발밑을 비추도록 되어 있습니다.

 

 

 

자루가 있어 들고 다니거나 걸어놓을 수 있는 "제등(提燈)"으로,

지초롱(紙燭籠) 사초롱(紗燭籠)으로도 불리며 들 수도 있고 걸어 둘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의식과 예식, 밤길에 길을 밝히는 용도로 사용 하였으며,

철사·놋쇠·대나무·나무·종이로 골격을 만들고 표면에 종이나 깁(紗)을 바르거나 구슬로 엮었으며,

판유리가 수입된 이후에는 유리를 끼우기도 하였는데 조선시대에는 신분에 따라 깁의 색과 사용 숫자에 제한을 두기도 하였습니다.

 

 

 

다양한 문양으로 장식을 더한 종지형 등잔대도 전시되어 있으며,

 

 

 

한쪽에는 대청마루에 병붕을 두르고 등과 탁상을 놓아두어,

전시실을 돌아보다가 등불의 분위기에서 쉴수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으며,

 

 

 

등잔이 아닌 도자기들을 전시해둔 공간도 있어,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백자들을 볼수 있어,

백자(白磁)는 통일신라시대 말엽경인 약 9세기 중반 이후부터 백자가 제작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하며,

고려 초기부터 청자와 함께 그수법이 이어오다가 조선시대에 와서 꽃을 피운 자기로,

 

 

 

정제된 백색의 태토로 형태를 만들고 그 위에 장석질의 투명유를 입혀 1,250℃ 이상의 고온에서 환원번조한 자기로,

사대부 뿐만 아니라 중, 서민들 에게도 널리 보급되었던 자기 이기도 합니다.

 

 

 

청자나 백자에 비해 우리에게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분청자(粉靑瓷)"들도 전시해 두어,

 

 

 

분청사기로도 불리는 분청자(粉靑瓷)는 우리나라에서만 있는 자기로,

청자나 백자는 중국에도 있는 자기 이지만 분청자는 다른 나라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있어 가장 한국적인 도자기라고도 하며,

15~16세기 전후해서 등장한 분청자는 기본적으로는 청자 이지만 청자 그릇에 하얀 분칠을 했기 때문에 분청자(粉靑瓷) 라고 합니다.

 

 

 

안쪽의 전시실에는 토기들도 진열을 해두어,

토기(吐器)는 점토를 반죽하여 500℃ 이상의 고온에서 소성하여 만든 용기로,

 

 

 

인간이 흙·물·불·공기 등을 섞어 만들어낸 인류역사 최초의 합성물인 토기(吐器)는,

1만 2천년 전에 발명되어 전 세계 각지에서 사용된 인류의 가장 보편적인 생활용기의 하나로서 인류 문화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는데,

흙은 지구상의 어디에서나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재료이며 물과 섞어 반죽하여 여러 가지 모양을 빚어낼 수 있고,

마른 뒤에도 그 형태를 유지하며 불에 구우면 단단해지는 원리로 우리나라 전역에서 발견 되었습니다.

 

 

 

등잔 박물관 옆에는 농기구 전시관이 별도로 있어 찾아 봅니다.

 

 

 

아담한 규모의 전시실에는 다양한 옛 생활도구들이 진열되어 있어,

 

 

 

베를 짤때 쓰였던 도구인 베틀이 놓여 있고,

 

 

 

연자방아로도 불리는 연자매(硏子磨)로,

둥글고 넓적한 돌판 위에 그보다 작고 둥근 돌을 세로로 세워서 이를 소나 말 따위로 하여금 돌리게 하여 곡식을 찧는 기구로,

연자매는 개인이 소유하는 경우도 잇었으나 대부분은 마을에서 공동으로 제작하고 계를 조직하여 관리하고 운용하였던 도구 입니다.

 

 

 

다소 생소해보이는 도구인 "매통"으로,

벼의 껍질을 벗기는 데 쓰는 농기구인 매통은,

아름드리 굵기의 여물고 단단한 통나무 2짝 마구리에 톱니를 파고 위짝에는 벼를 담을 수 있도록 원추형 깔대기 모양의 홈을 판 것으로,

윗매통이 돌아가면서 내리누르는 힘이 아랫매통에 가해지면서 상호 접촉되는 면의 마찰력이 알곡껍질을 벗겨내도록 고안된 원시적인 도구로,

작업의 효율성이 높지 않은 편여서 디딜방아나 연자매 등이 본격적으로 쓰이면서 거의 쓰지 않게 되었으나,

연자매 등이 여럿이 함께 해야 한다면 매통은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장점도 있어 오랫동안 쓰였던 도구 이기도 합니다.

 

 

 

짚으로 엮어 만든 신발인 "짚신"과 삼이나 모시 껍질로 삼은 신발인 "미투리"로,

 미투리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신으로 보통 서민층의 남녀가 신었으며 섬세한 것은 사대부 계층에서 사용 했다고 합니다.

 

 

 

곡식이나 액체, 가루등의 분량(分量)을 재는 단위의 하나 또는 그릇 "되"의 모습도 볼수있어,

되는 승(升)이라고도 하며 모양은 정육면체 또는 직육면체이며,

나무 또는 쇠로 만들었는데 대부분 나무로 만든 정육면체의 되가 가장 많이 쓰였습니다.

 

 

 

통나무의 안을 파내서 바가지 같이 만든 큰 그릇인 "함지박"도 있어,

함지박은 "함박"이라고도 하며 함지박에는 전함지·민함지·주름함지 등이 있어,

전함지는 전이 달리게 판 것이며 민함지는 둥근 함지이고 주름함지는 안쪽이 주름지게 만든 것으로,

식품류를 담고 떡가루를 버무리거나 반죽할 때나 김장소나 깍두기를 버무리는 등 조리의 여러 조작을 할 때,

또는 떡이나 과줄 등을 담아 운반할 때 등 여러가지 일에 쓰인 도구로,

크기는 여러가지이며 무겁고 튼튼하므로 한 가정에서 대를 물리면서 사용 하였던 생활도구 입니다.

 

 

 

고 김동휘 설립자는 1954년부터 1981년까지 수원에서 산부인과 병원을 운영 했으며,

경기도 사진작가협회의 모체인 수원사우회와 예총 경기지부를 만들어 활동했으며 난파음악제도 처음 만들었고,

수원문화원도 당시 동료 문화인들과 함께 만들어 문화학교 교장을 맡기도 했으며,

지역 유지, 학자, 교사 등과 수원화성행궁 복원추진위원회를 만들어 위원장을 지내며 화성 복원을 위해 노력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 크지않은 규모의 사설 박물관 이지만,

설립자의 우리의 전통문화에 대한 커다란 애착으로 세워졌슴을 느낄수 있고,

이를 이어받은 김형구(金炯九) 관장님의 자세한 설명으로 더욱 알차게 돌아볼수 있으며,

가족 또는 아이들과 함께하는 교육의 장으로 찾아 볼만한 곳으로 ,

경기도 용인의 한국등잔 박물관(韓國燈盞博物館)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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