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영광군 불갑면 녹산리 불갑사를 가는 길목인,

인산 마을에 있는 조선후기의 정자, 침류정(枕流亭)을 찾았습니다.

 

영광 침류정(靈光 枕流亭)은 전라남도의 문화재자료 제278호로 지정 되었으며,

참고로 우리나라에는 경북 청송의 월정리 침류정이 있고 경남 거창에도 침류정 정자가 있습니다.

 

 

 

정자 앞에는 세운지 오래지 않아 보이는 비석들이 자리해 있고,

 

 

 

정자 옆에는 담장을 두르고 일각문이 있는 비각으로 보이는 건물이 있어,

 

 

 

고흥 류씨 삼강려(高興 柳氏 三綱閭)의 정려각으로,

삼강려(三綱閭)란 아버지는 나라를 위해 죽어 충(忠)이고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 죽었으나 효(孝)이며,

아내는 지아비를 위해 죽어 열(烈)이니 충신· 효자· 열녀를 기리는 곳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겹처마의 팔작지붕의 구조로 정려각 으로는 제법 큰 규모이며,

 

 

 

정려각으로 들어가는 일각문의 윗 부분은 돌로 되어 있어,

 

 

 

입구의 돌문에는 "고흥 류씨 삼강려(高興 柳氏 三綱閭)"라 새겨져 있고,

 

 

 

정려각 앞에는 "고흥 류씨 삼강려(高興 柳氏 三綱閭)"의 편액이 있어,

고흥유씨 장려각(高興柳氏 三綱閣)은 고종 24년(1877)에 교지가 내려졌고 삼강정려(三綱旌閭)를 하사 받았다가,

1936년에 설립되어 자리하고 있으며,

 

 

 

비각 안에는 열녀 유인송씨지려(烈女 孺人宋氏 之閭)가 있고,

 

 

 

효자 학생 류집지려(孝子 學生 柳潗 之閭)의 정려가 있으며,

 

 

 

효자 학생 류약지려(孝子 學生 柳㵸 之閭)가 있어,

영광임진수성록(靈光壬辰守城錄) 기록에 의하면,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을 당하자 1592년 10월 영광군수 남궁견(南宮견)이 복상중(服喪中)이라 수령이 부재한 상황에서,

도별장 이응종(李應鍾)을 비롯하여 부장 강태(姜泰)·군정 정희맹(軍正 丁希孟)· 참모관 유익겸(柳益謙) 등,

재지사림의 형제자질을 주축으로 이들 수성군을 조직하여 성(城)을 지키는데 공을 세웠고,

군량미를 거두어 고제봉(高霽峰)과 곽망우(郭忘憂) 등이 이끄는 창의소에 보내고,

다시 군량미를 모아 기대승의 아들 기효증(奇孝曾)이 싸움을 벌이고 있던 의주(義州: 옛 龍灣)까지 뱃길로 운반해 주었다고 하며,

 

 

 

왼쪽의 충신 학생 류오지려(忠臣 學生 柳澳 之閭)와 오른쪽에 충신 학생 류익겸지려(忠臣 學生 柳益謙 之閭)가 있어,

류익겸(柳益謙은 함께 의병을 일으킨 사람들과 영광에서 성을 사수하다 1593년(선조 26) 왜적들이 물러갔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의병 활동을 멈추었고,

그 후 자신의 재산을 털어서 체찰사  정철(鄭澈)에게 보내주는 등 국가 수호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도왔기에 그를 조선 중기 의병이라고 칭합니다.

 

 

 

왼쪽의 "열녀 유인김씨 지려(烈女 孺人金氏 之閭)"와 오른쪽에 열녀 유인정씨 지려(烈女 孺人丁氏 之閭)로,

임진왜란에 이은 1597년(선조 30)의 정유재란 때,

전란을 피해 바다로 나갔던 일족들이 바다에서 다시 왜적들의 공격을 받자 “의롭지 못하게 살아 있는 것보다는 죽음으로 절의지키는 것이 낫다”며,

류익겸(柳益謙)은 부인 송씨와 두 아들 유집과 유약 그리고 두 며느리 김씨와 정씨를 긴 끈으로 옷소매가 연결되도록 꿰맨 후,

7명의 일가족이 함께 칠산양(七山洋)의 칠산 바닷물로 뛰어들어 순절 하였다고 합니다.

 

 

 

그 후 그들의 충절을 기리는 삼강정려(三綱旌閭)를 하사 받았으며,

"삼강려 사실기(三綱閭 事實記)"의 기문(記文) 편액도 정려각 안에 함께 걸려 있습니다.

 

 

 

삼강려(三綱閭) 정려각을 나와 오른쪽에 있는 침류정(枕流亭)으로 향합니다.

침류정(枕流亭)은 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방을 들이지 않고 마루만 두어 4면이 모두 열려 있는 개방형 정자로,

 

 

 

침류정(枕流亭)의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본래 주인은 조선 선조 때의 침류정(枕流亭) 류익겸(柳益謙,?~1567)과 그의 아들인 류계정(柳溪亭) 류 오(柳澳)로 전해지고 있으며,

이들 부자(父子)의 애국 충절을 기리기 위해 훗날 고흥류씨(高興柳氏) 후손들이 정자를 짓고 선조의 충절을 계승해오고 있다고 하며.

1876년에 8대손 심행과 9대손 진용 등이 옛터인 항생골에서 이곳으로 중건 하였습니다.

 

 

 

마루 안쪽에 걸려있는 침류정(枕流亭)의 현판으로,

후손들이 정자를 지으며 류익겸(柳益謙)의 호를 따서 침류정이라 명명 하였다고 하며,

"침류(枕流)"는 흐르는 물을 머리를 베는 것을 의미하며 은거를 나타내고 있는데,

어원은 진(晉)의 손초(孫楚)는 젊었을 때에 숨고자 하여 왕제(王濟)에게 “돌을 베고 흐르는 물로 양치질 하여야겠다.”라는 말이 빗나가,

“돌로 양치질하고 흐르는 물을 베겠다.” 하였더니, 왕제는 “어떻게 흐르는 물을 베며 돌로 양치질하겠는가?” 반문하자,

손초는 “물을 베는 것은 귀를 씻으려는 것이고, 돌로 양치질하는 것은 이(齒)를 갈려는 것이다.”라고,

꾸며 대답하였다는 고사에서 비롯 됐었다고 합니다.(晉書 卷56 孫楚列傳)

 

 

 

1876년에 중건 되었다는 침류정(枕流亭)은,

건축 양식과 단청 등에서 전반적으로 조선후기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정자의 마루에는 평난간을 둘렀으나 앞과 뒤로 들어 갈수 있도록 디딤돌을 두었고,

 

 

 

4칸의 우물마루는 아담한 규모이지만 정사각형여서 제법 너른 편이며,

옆면 으로는 함께있는 "고흥 류씨 삼강려(高興 柳氏 三綱閭)"의 정려각이 들어 옵니다.

 

 

 

침류정(枕流亭)은 가구 기법에서 자연스럽게 휜 대들보 상부로 양측에서 곡이 있는 충량이 얹혀지는 모습으로,

교차하는 "十"형이 특히 눈에 띄고 있습니다.

 

 

 

정자에는 다른 편액은 보이지 않고 "침류정중건기(枕流亭重建記)"의 기문(記文)만 올려져 있으며,

 

 

 

정자의 마루에서 보이는 풍경으로 불갑저수지의 제방이 가로막고 있어, 

저수지가 건설되기 전에는 정자 앞으로 물길이 흘러 침류(枕流)라는 의미에 모자람이 없었다고 하는데,

세월의 흐름으로 이제는 저수지에서 내려오는 거센 물소리를 들어야 하는곳이 되었습니다.

 

 

 

류익겸(柳益謙)은 유년 시절부터 타고난 성품이 호탕하고 강건한 선비 정신과 기개가 있고,

경서(經書)와 관련된 학문에 뛰어났으며 지조 깊은 향리 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그는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책을 덮고 지역 청년들을 끌어 모아 성(城)을 지키는데 많은 공을 세웠으나,

그가 살았던 두번의 전란이 바다에서 그들 일가족의 목숨을 앗아가고 말았습니다.

 

 

 

침류정(枕流亭) 뒤편에는 재실로 보이는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의 건물이 있고,

 

 

 

뒤편에는 류익겸(柳益謙,?~1567)과 그의 일가족을 기리는 사당인 "인산사(茵山祠)"가 자리해 있습니다.


조선중기에 한 선비의 기개와 충절이 서려 있는 곳으로,

주변 여건의 변화로 옛 정취는 반감이 되어 있지만,

영광지역의 몇안되는 정자로 남아 있는 곳으로 류익겸(柳益謙)의 정자인,

전라남도 영광의 침류정(枕流亭)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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