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주실마을에 있는,

조지훈의 생가인 호은종택(壺隱宗宅)과 지훈 시공원을 찾았습니다.

 

조지훈 생가(趙芝薰生家)가 있는 주실마을에 들어서면,

주실마을의 유적지와 돌아 볼만한 곳들을 알려주는 안내문이 줄지어 서있고,

 

 

 

경상북도 기념물 제78호로 지정된 "호은종택(壺隱宗宅)"은,

한국 시단(詩壇)의 대표적인 시인이며, 국문학자이기도 한 조지훈(본명:東卓)이 탄생한 집으로,

6·25 때 인민군에 의해 일부 소실되었던 것을 1963년에 중건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으며,

대문 상부의 살창 사이 부착되어 있는 판재에 조각한 태극기는 한말 때부터 있었던 것이라 합니다.

 

 

 

대문 앞에는 호은종택(壺隱宗宅) 임을 알려주는 커다란 표지석이 있어,

호은종택(壺隱宗宅)은 조광조(趙光祖)의 사건인 1519년의 기묘사화(己卯士禍)로 한양조씨 일문이 화를 당하자,

조종이 영주로 낙향한 이후에 안동과 영양을 거쳐 주실로 입향한 호은(壺隱) 조전(趙佺, 1576~1632)의 종택으로,

주실마을의 한복판에 있으며 조선중기 인조 때 입향조인 조전의 둘째 아들 조정형(趙廷珩)이 창건한 종택(宗宅)으로,

조전이 매방산에 올라가 매를 날려 매가 앉은 자리인 늪지에 터를 잡고 숯으로 메우고 그 위에 집을 지었다고 하며,

 

 

 

대문채를 들어서면 마주하여 사랑채가 있고 오른쪽에는 "곳간채"가 있어,

곳간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마당과 높이 차이가 거의 없는 낮은 기단에,

벽체는 토벽이며 지붕은 기와를 이은 우진각 지붕의 구조로 자리하고 있으며,

 

 

 

호은종택(壺隱宗宅)의 "ㅁ" 자형의 몸채에 달린 사랑채의 모습으로, 

사방 7칸의 정사각형 모양의 본채와 정자형식의 사랑채로 된 이 집은 높다란 본채를 댓돌이 듬직히 떠받들고 있어,

영남 북부지방의 전형적인 반가형식인 "ㅁ"자형 몸체에 "一"자형의 대문채가 결합한 형태로,

집 가운데 뜰을 두고 그 주위에 안채와 사랑채를 비롯한 경리시설이 배치된 집약적이고 폐쇄적인 주거 형태 입니다.

 

 

 

호은종택(壺隱宗宅)의 사랑채는 겹집형으로 2칸통인데 중문 칸에 이어 사랑방 두 칸이 연속해 자리하고,

방 앞엔 툇마루 뒤편엔 쪽마루가 있고 사랑방에 이어 2칸통의 대청이 있어 전면에는 넌출문인 사분합문(四分閤門)을 두었고,

 

 

 

5칸 대문채의 솟을대문은 맞배지붕으로 좌우 건물은 팔작지붕으로 마감 하였으며,

곳간채로 들어가는 사주문(四柱門)이 대문간채 옆에 따로 있어 곳간채의 출입에 전용되고 있고 사주문 옆에 측간이 있으며,

대문간채는 솟을대문 좌우로 2칸씩이 건조된 구조로 문간 다음에 방이 각 1칸씩 있고 그 방에 이어 부엌으로 조성되었으며,

솟을대문 문위에 기둥과 기둥사이에 문호를 사이로 가로지른 나무인 인방(引枋)과 살대를 꽂았습니다.

 

 

 

사랑채 옆에는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이 있어 2칸통으로, 

보통 문을 1칸으로 잡는 것과 차이를 보인 특색이며 문 좌측도 역시 2칸통의 2칸이며 방과 보일러실이 자리해 있습니다.

 

 

 

중문의 보일러실 북측으로 다락이 있는 부엌이 있고 안방으로 이어지는데,

안방의 아래 칸을 조지훈의 태실(胎室)이라 하며,

조선 말기의 의병장이던 조승기(趙承基)와 6·25 때 자결한 조부 조인석(趙寅錫)이 이 방에서 태어났다고 하나,

 

 

 

안채에는 후손이 거주하고 있는지 개방을 하고있지 않아 들여다 볼수없는 아쉬움이 있으며,

 

 

 

시인이자 국문학자인 조지훈(趙芝薰,1920∼1968)의 본명은 조동탁(趙東卓)이며 경상북도 영양(英陽) 출신으로,

어려서 할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운 뒤 3년간 영양보통학교를 다녔고,

서울로 올라와 1939년 혜화전문학교(지금의 동국대학교) 문과에 입학해 "백지" 동인으로 참여했고 조연현 등과 친하게 지냈으며,

1941년 대학을 졸업하고 일제의 탄압을 피해 오대산 월정사에서 불교전문강원 강사로 있으면서,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화엄경 등의 불교서적과 노장사상을 즐겨 읽었다고 하며,

1942년 조선어학회 "큰사전" 편찬위원으로 참여했고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신문을 받았고,

이듬해 고향으로 내려가 지내다 8·15해방이 되자 다시 서울로 와서 명륜전문학교·경기여자고등학교에서 재직 했으며,

1946년 전국문필가협회 중앙위원 및 조선청년문학가협회 고전문학부장을 역임했고 1947년 동국대학교 강사를 거쳐 고려대학교 교수가 되었고,

6·25전쟁 때는 문총구국대 기획위원장으로 중부전선에서 종군했고 1961년 벨기에에서 열린 국제시인회의에 한국대표로 참가 했습니다.

1963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초대 소장이 되면서 시쓰기보다 "한국문화사대계"를 기획하고 추진하는 데 힘썼고,

1965년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편찬위원, 1966년 민족문화추진위원회 편집위원, 1968년 한국시인협회 회장 등을 역임 했으며,

1968년 토혈로 사망하여 경기도 양주군 마석리에 안장되었고 1972년 서울 남산에 시비가 세워 졌습니다.

 

 

 

조지훈(趙芝薰)은 청록파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며 전통적 생활에 깃든 미의식을 노래 했는데,

작품 활동은 1939년 4월 "문장(文章)"지에 시(詩) "고풍의상(古風衣裳)"이 추천되면서부터 시작 되었고,

1939년 11월 "승무(僧舞)", 1940년에 "봉황수(鳳凰愁)"를 발표함으로써 추천이 완료 되었습니다.

이 추천 작품들은 한국의 역사적 연면성(連綿性)을 의식하고 고전적인 미의 세계를 찬양한 내용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

고풍의상(古風衣裳) 에서는 전아한 한국의 여인상을 표현하였고,

승무(僧舞)에서는 승무의 동작과 분위기가 융합된 고전적인 경지를 노래 하였으며,

기타 저서로는 1964년의 시집 여운(餘韻)과 1956년에 수상록 "창에 기대어"이 있고,

1959년에는 시론집 "시의 원리"와 수필집 "시와 인생"이 있으며 번역서인 "채근담(菜根譚)" 등이 있습니다.

 

 

 

안채는 들여다 보지 못하고 사랑채 오른쪽 뒤편에 있는 사당만 들여다 보고,

조지훈의 생가인 호은종택(壺隱宗宅)을 나옵니다.

 

 

 

호은종택을 나와,

종택의 뒤쪽 마을안에 있는 조지훈의 본가인 방우산장(放牛山莊)을 찾아 봅니다.

 

 

 

조지훈이 유년시절을 보냈곳으로 알려진 곳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사주문 위에는 "방우산장(放牛山莊)"의 현판이 있고,

현판의 글씨는 조지훈의 아들인 조광렬의 글씨이며,

 

 

 

2010년 복원된 방우산장(放牛山莊)은 조지훈이 유년시절부터 결혼 할때까지 살았던 본가로,

1936년 부친을 따라 상경 할때까지 성장기를 보낸 곳이라 하며,

"조지훈의 수필집 방우산장기(放牛山莊記)에서,

"방우산장은 내가 거처하고 있는 이른바 '나의 집' 에다 스스로 붙인 집 이름이다" 라는 내용을 찾을수 있어 방우산장(放牛山莊)이라 명명하였다고 하며,

 

 

 

정면 4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의 구조로,

"一"자형의 가옥으로 양반가의 가옥으로는 그리 큰 규모는 아닙니다.

 

 

 

마을의 동쪽 끝에는 "지훈 문학관"이 자리해 있어 들러볼만하고,

 

 

 

마을옆 골짜기를 따라 조성되어 있는 "지훈 시공원"을 찾아 봅니다.

 

 

 

주실마을 옆 산아래를 따라 조성되어 있는 지훈 시공원은 나무데크로 다니기 편하게 해두었고,

길을 따라 곳곳에 시비를 세워두어,

 

 

 

조지훈의 시 "묘망(渺茫)"으로,

내 오늘밤 한오리 갈댓잎에 몸을 실어 이 아득한 바다 속 창망(蒼茫)한

물구비에 씻기는 한점 바위에 누웠나니

생(生)은 갈사록 고달프고 나의 몸둘 곳은 아무데도 없다 파도는 몰려와

몸부림치며 바위를 물어뜯고 넘쳐나는데 내 귀가 듣는것은 마즈막

물결소리 먼 해일(海溢)에 젖어 오는 그 목소리뿐


아픈 가슴을 어쩌란 말이냐 虛空에 던져진것은 나만이 아닌데

하늘에 달이 그렇거니 수많은 별들이 다 그렇거니 이 광대무변(廣大無邊)한

우주(宇宙)의 한알 모래인 地球의 둘레를 찰랑이는 접시물 아아 바다여

너 또한 그렇거니


내 오늘 바다 속 한점 바위에 누워 하늘을 덮는 나의 사념(思念)이

이다지도 작음을 깨닫는다.

이 시는 자신의 내면을 밤바다와 바위라는 소재를 동원하여 풍경화하고 자신의 정서를 직접 표출하는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어,

암담한 현실 속의 자신을 밤바다와 바위라는 상징물을 통해 형상화하여 내면을 표출하기 위한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조지훈의 시 "코스모스"로 일부를 가져오면,

차가운 계절을 제 스스로의 피로써

애닯게 피어있는 코스모스는

方向(방향) 없는 그리움으로

발돋움하고다시 鶴(학)처럼

슬픈 모가지를 빼고 있다.

 붉은 心臟(심장)을 뽑아 머리에 이고

가녀린 손길을 젓고 있다.

 

 

 

길다란 나무데크의 길을 따르면 소공원이 자리하고 있어,

 

 

 

지훈 시공원(芝薰 詩 公園)에서 볼수있는 조형물인 조지훈의 봉황수(鳳凰愁)로,

정일품에서 종구품 벼슬아치들과 함께 나라살림을 이끄는 봉황(임금)의 우수(憂愁)를 읊은 시로,

퇴락한 고궁의 모습을 보면서 느끼는 망국(亡國)의 한(恨)을 산문적으로 다루고 있는 조지훈의 작품을 표현해 두었고,

 

 

 

틈틈히 쉬어가며 즐길수 있도록 육각정자가 자리해 있으며,

 

 

 

지훈 시공원(芝薰 詩 公園)에는 다양한 모습으로 조지훈의 시를 감상할구 있게 해두어,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돌아보면 좋은곳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조지훈의 시 "승무(僧舞)"로,

"승무(僧舞)"라는 춤을 통해 세속적인 번뇌를 종교적으로 승화시키는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으로,

4음보의 율격이나 소재면에서 전통성을 드러내고 있으며 전체 9연의 이 시는 춤을 추는 동작의 순서에 따라 시상을 전개하고 있어,

별을 바라보는 여승의 모습을 통해 세속적 번뇌의 종교적 승화를 기원하는 여승의 내면세계를 드러내고 있는 등,

고전적인 분위기와 세속적 번뇌의 승화라는 주제 의식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지훈 시공원(芝薰 詩 公園) 한쪽에는,

시인 조지훈(趙芝薰)의 동상이 자리해 있어,

동상을 바라 보는것으로 주실마을 에서의 탐방을 마무리 합니다.

 

 

 

경북 영양을 여행하며 찾은 곳으로,

한국 시단(詩壇)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조지훈(趙芝薰)의 생을 돌아보고,

그의 삶과 시문(詩文)을 살펴볼수 있는 곳으로,

영양 일월면 주곡리 주실마을에 있는 조지훈 생가(趙芝薰生家)와 지훈 시공원(芝薰 詩 公園)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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