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청간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자 "청간정(淸澗亭)"을 찾았습니다.

 

청간정(淸澗亭)은 고성을 대표하는 정자 이지만,

이곳은 휴전선에 가까운 지역여서 군사보호지역으로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가,

2010년대에 해제가 되어 일반인 출입이 가능해진 곳으로 주차장 등의 정비가 잘되어 있으며,

 

 

 

주차장 옆 청간정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전시관이 자리해 있어,

 

 

 

입구에는 "청간정 자료 전시관"의 현판이 보이고,

 

 

 

"청간정 자료 전시관"은 작은 규모의 전시관 이지만,

청간정(淸澗亭)으로 들어가기전 미리 보아두고 가면 좀더 상세하게 청간정에 대해 알수 있도록 해두어,

 

 

 

청간정을 축소해서 재현해둔 모습을 볼수있고,

 

 

 

청간정(淸澗亭)의 엣 현판이 전시되어 있어,

지금의 정자에는 복제본이 걸려 있슴을 알게해 줍니다.

 

 

 

전시관에는 청간정(淸澗亭)과 관련한 여러점의 엣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어,

조선후기의 화가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겸재(謙齋) 정선(鄭敾)은,

1733년(영조9) 청하현감에 부임하여 삼척부사 이병연과 함께 청간정에 들러 회포를 풀면서 청간정도(淸澗亭圖)를 그렸는데,

이 그림은 5년 뒤인 1788년 제작한 "관동명승첩(關東名勝帖)"에 들어 갔습니다.

 

 

 

윗쪽의 그림은 18세기 조선 후기 화가 청류(淸流) 이의성(李義聲,1775~1883)의 그림으로,

해산도첩(海山圖帖)의 청간정도(淸澗亭圖)와,

아랫쪽은 작가미상의 금강산도병(金剛山圖屛)의 청간정으로 19세기 작품입니다.

 

 

 

왼쪽은 1746년 작가미상의 관동십경도첩(關東十景圖帖)의 청간정도(淸澗亭圖)로,

조선 영조 때 강원도 관찰사 도계(陶溪) 김상성(金尙星,1703∼1755)이,

1748년(영조 24) 삼척부사 체천(梯泉) 오수채(吳遂采,1692~1759)와 화원들을 데리고 관동지역을 돌았는데,

그 때 그린 도첩이 "관동십경도첩(關東十景圖帖)"이라고 하며,

오른쪽은 문인화가인 허필(許佖,1709~1761)의 관동팔경도(關東八景圖)에 있는 청간정도(淸澗亭圖) 입니다.

 

 

 

19세기의 작품으로,

김오헌(金廒軒)의 관동팔경도병(關東八景圖屛)에 수록된 청간정도(淸澗亭圖)이며,

 

 

 

조선후기인 18세기의 정충엽(鄭忠燁)의 진경산수화인 관동팔경도(關東八景圖)에 있는 청간정도(淸澗亭圖)의 모습으로,

 

 

 

전시관에서 볼수있는 청간정(淸澗亭)과 관련한 진경산수화의 옛 그림 들에서,

대부분의 청간정의 모습이 모형으로 보았던 "一"자형의 누각이 아닌 "ㄱ"자형 또는 "T"자형에 가까운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어,

옛날의 청간정(淸澗亭)은 정자만 있었던것이 아닌 부속 건물을 거느린 정자임을 알수 있으며,

정자를 이건하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변한듯 합니다.

 

 

 

전시관의 한쪽에는 청간정의 전경을 축소해서 표현해 두었고,

 

 

 

아담한 규모의 "청간정 자료 전시관"에서는 단순하게 정자의 자료 뿐만 아니라,

전시관에 상주하고 관리하시는 분에게서 청간정과 관련한 자세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도 들을수 있습니다.

 

 

 

전시관을 나와 청간정으로 들어가는 길을 잡으면,

 

 

 

강원도 최북단인 고성지역에는,

3월말임에도 불구하고 개나리가 활짝피어 있어 바닷바람의 영향인듯 합니다.

 

 

 

계단을 올라 얼마지 않으면 정자의 모습을 볼수있게 되고,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2호로 지정된 청간정(淸澗亭)으로,

정자의 창건연대와 건립자는 알 수 없으나 청간역(淸澗驛) 옆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며,

1520년(중종 15) 간성군수 최청(崔淸)이 중수한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의 중층 누각 건물인 청간정(淸澗亭)은,

그 뒤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 때 불타고 없어져 그대로 방치 되었다가,

1928년 토성면장 김용집(金鎔集)의 발기로 재건 하였고 1981년 최규하 전 대통령의 지시로 해체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정자로 오르는 입구에서 볼수있는 청간정(淸澗亭)의 현판으로,

독립운동가이자 서예가 였던 청파(靑坡) 김형윤(金亨胤,1895-1975)이 1928년에 쓴 글씨로 알려져 있으며,

 

 

 

청간정(淸澗亭) 아래의 돌기둥의 모습으로,

초석은 민흘림이 있는 8각 석주로써 전후면 8개 마루 귀틀을 받치는 1층 기둥으로 되어있고,

중앙부 초석 위에 팔각형의 동자기둥을 세워 누마루형식의 아래층 구조체를 형성하고 있는데,

양쪽의 기둥은 마루아래까지 길게 올려두었고 중앙의 기둥은 짧게하여 8각의 나무기둥을 받쳐둔 모습으로,

중간의 낮은 기둥은 이건을 하면서 원래의 것이 아닌 옆건물의 기둥으로 추측 하기도 합니다.

 

 

 

지붕 측면의 첫째와 둘째 기둥사이에 정자 위로 올라오는 나무계단을 설치되어 있어,

청간정(淸澗亭)의 누마루로 올라 봅니다.

 

 

 

정자의 누마루에 오르면 2층의 8개 기둥이 모두 원주이며,

기둥중심에서 외측으로 60Cm정도 띄어 사면을 모두 단층 궁판을 평난간으로 둘렀고,

바닥은 우물마루를 두었습니다.

 

 

 

청간정(淸澗亭)의 마루 위에는,

관동팔경의 제2경이며 일출 명소로도 옛부터 이름을 날렸던 명성에 비해,

그리 많지 않은 편액들이 걸려 있어 전란과 소실 등으로 모두 사라진듯 하며,

 

 

 

정자의 마루위에서 볼수있는 청간정(淸澗亭)의 현판으로,

1955년 중수 당시의 이승만 대통령이 쓴 것이라고 하며,

 

 

 

조선중기의 문신이었던 택당(澤堂) 이식(李植, 1584~1647)의 청간정(淸澗亭) 시문(詩文) 편액(扁額)이 있고,

 

 

 

기문(記文)으로 보이는 청간정(淸澗亭)의 편액(扁額)이 있으며,

 

 

 

1980년 최규하(崔圭夏) 전 대통령이 여름에 이곳에 들러 남긴 친필 시판(詩板)이 올려져 있고,

 

 

 

청간정(淸澗亭)의 변천사와 내력을 알려주는 기문(記文)인 청간정중수기(淸澗亭重修記)로,

1953년 5월 10일에 쓴 청파(靑坡) 김형윤(金亨胤)의 글 입니다.

 

 

 

2012년에도 또한번의 중수가 있었는지,

한글과 한문이 홍용되어 있는 청간정중수기(淸澗亭重修記)의 기문(記文)도 있습니다.

 

 

 

청간정(淸磵亭)의 누마루에서,

조선의 문신 봉래 양사언(蓬萊 楊士彦,1517~1584)의 시문(詩文)을 가져와 봅니다.

九霄笙鶴下珠樓(구소생학하주루)  하늘 높은 곳에서 신선이 아름다운 누각에 내려와

萬里空明灝氣收(만리공명호기수)  만리에 걸친 빈 하늘의 호방한 기운 거두어 모았네

靑海水從銀漢落(청해수종은한락)  푸른 바다 은하수 따라 떨어져 물이 되니

白雲天入玉山浮(백운천입옥산부)  흰구름 타고 신선이 옥 같은 산 위를 떠도네

長春桃李皆瓊蘂(장춘도리개경예)  사시사철 복사꽃 오얏꽃은 모두 옥 같은 잎새

千歲喬松盡黑頭(천세교송진흑두)  천년 묵은 소나무는 검은 머리 다 했네

滿酌紫霞留一醉(만작자하유일취)  세상 한가로운 시름 일어날 곳 없나네

 

 

 

청간정(淸澗亭)에서 바라이는 "죽도"의 전경으로,

청간정은 설악산 연봉(連峰)에서 발원한 천정천과 동해바다가 합류하는 야트막한 산위에 세워져 있으며,

아름다운 풍광으로 조선의 유명한 화가들은 모두 찾았던 곳으로 겸재 정선과 김홍도 강세황 등도 이곳에 들러 그림을 남겼으며,

수많은 시인 묵객이 찾았던 이곳은,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1580년(선조 13)에 지은 가사인 "관동별곡(關東別曲)"에도 청간정이  언급되어 있어,

“고성을 저만치 두고 삼일포를 찾아가니,

그 남쪽 봉우리 벼랑에 ‘영랑도 남석행’이라고 쓴 붉은 글씨가 뚜렷하게 남아 있는데

이곳을 유람한 사선(四仙)은 어디갔는가 여기서 사흘을 머무른 후에 또 머물렀는가

선유담, 영랑호 거기에 가 있는가 청간정 만경대 등 몇 군데 앉았던가"

 

 

 

1603년 가을에 교산(蛟山) 허균(許筠,1569~1618)이 조정에서 밀려난 후 청간정에서 지은 시(詩)로, 

淸磵亭晝睡  청간정에서 낮잠을 자다

楓岳曇無竭(풍악담무갈)    금강산 담무갈 보살이 그대라면

金門老歲星(금문노세성)    대궐의 뛰어난 신하는 나 아니겠나?

相逢雖恨晩(상봉수한만)    그대와의 만남이 한참 늦었으나

交契自忘形(교계자망형)    서로의 처지 잊고 절로 친해졌네.

暫別緣塵累(잠별연진루)    세상에 매인 몸이니 잠깐 떨어졌다가

幽期屬暮齡(유기속모령)    늙은 뒤에 호젓하게 다시 만나세.

高亭殘午夢(고정잔오몽)    높다란 정자에서 낮잠을 깨고 보니

天外萬峯靑(천외만봉청)    일만 봉우리 하늘 끝에 푸르구나

 

 

 

조선시대 대사헌, 형조판서, 예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인 택당(澤堂) 이식(李植)의 시(詩) 입니다.

天敎滄海無潮汐 (천교창해무조석)   하늘의 지시로 바다엔 밀물 썰물 없고

亭似方舟在渚涯 (정사방주재저애)  방주 같은 정자 하나 물가에 서 있네.

紅旭欲昇先射牗 (홍욱욕승선사유)  붉은 해 솟으려고 광선 먼저 창문을 쏘고

碧波纔動已吹衣 (벽파재동기취의)  푸른 물결 일렁이자 옷자락 벌써 나부끼네.

童男樓艓遭風引 (동남누접조풍인)  동남동녀(童男童女) 실은 배 순풍(順風)에 간다 해도

王母蟠桃着子遲 (왕모반도착자지)  왕모의 복숭아는 여는 시기 까마득하여라

怊悵仙蹤不可接 (초장선종불가접)  신선 자취 접하지 못한 아쉬움 속에

倚闌空望白鷗飛 (의란공망백구비)  난간에 기대서 나는 백구만 바라보노라

 

 

 

푸른 동해바다와 청간정(淸澗亭)에서의 옛 정취를 느껴보고 정자의 마루에서 내려 옵니다.

 

 

 

바닷가에 자리한 청간정(淸澗亭)은 원래의 위치에서 어떠한 연유로 언덕위로 이건 하였는지 자세히 알수는 없지만,

조선후기의 많은 화가들이 그렸던 그름에서도 보았듯 이건을 하면서 옛모습과 달라져 있어,

정자와 청간역(淸澗驛)이 함께 있었다면 역시 같은 모습으로 복원하여 옛모습을 되찾았으면 하는 개인적인 바램이 남았습니다.

 

 

 

관동팔경(關東八景)의 제2 경에 들정도로 빼어난 풍취를 자랑하는곳으로,

일출의 명소로 조선의 수많은 명사가 찾아 시를 남기고 즐긴 곳으로,

강원도 고성을 대표할만한 정자 문화재인 "청간정(淸澗亭)"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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