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의 진전사지에 있는,

진전사지 삼층석탑(陳田寺址三層石塔)과 진전사지 도의선사탑(陳田寺址道義禪師塔)을 찾았습니다.

 

옛 진전사(陳田寺)는 도의선사(道義禪師)가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경에 창건한 사찰로 알려져 있으며,

설악산 대청봉 동편에 있는 둔전계곡에 자리한 진전사지에 이르면 삼층석탑인 진전사지 삼층석탑(陳田寺址三層石塔)을 먼저 만나게 되는데,

 

 

 

양양 진전사지 삼층석탑(襄陽陳田寺址三層石塔)은 국보 제12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 석탑은 둔전리 마을의 서북편에 솟은 관산(冠山) 남쪽 기슭 진전사지의 원위치에 서 있으며,

신라식 일반형으로 2층기단을 갖추었고,

상륜부(相輪部)는 탑의 최상부 옥개석 위에 놓아 복발·앙화·상륜 등을 받치는 장식인 노반석(露盤石)까지만 남아 있고 그 이상은 없어 졌으며,

균형이 잘 잡혀 있는 단아한 자태와 더불어 하층기단에서부터 차례로 새겨진 비천상, 팔부신중, 사방불 조각은,

통일신라 조각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도의선사(道義禪師)가 주석했을 당시 진전사(陳田寺)의 화려했던 모습을 엿볼수 있습니다.

 

 

 

 

진전사지 삼층석탑(陳田寺址三層石塔)은 높이 504㎝의 크기로,

탑신부의 체감률과 비례는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석탑 형식을 따랐으나,

기단부와 1층 탑신에 조각을 하는 방식은 신라 하대에 유행한 석탑 형식의 일면을 반영 하였으며,

지대석 위에 있는 하층기단은 4매의 장대석으로 짜여져 있으며,

양쪽에 우주를 새기고 가운데에는 탱주를 새겨 2등분한 면에 각각 1구씩 모두 8구의 비천상을 조각 하였고,

상층기단도 하층기단과 마찬가지로 탱주로 면을 2등분하고 8부중상을 입체적인 고부조로 조각 했으며,

8부중상은 구름 위에 앉아 있는데 신체의 균형이 잘 잡혀 있고,

갑옷과 천의 및 각종 장식이 섬세하고 미려하여 조각가의 뛰어난 기량을 엿볼 수 있어,

이 3층석탑의 8부중상과 동일한 양식을 보여주는 예는 선림원지3층석탑과 보원사지5층석탑 등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기단은 8매의 장대석(長臺石)으로 구성된 지대석(地臺石) 위에 기단부가 형성 되었는데,

하층기단은 4매의 장대석으로 결구된 대석 위에 면석(面石)을 놓았고,

동·남·북면은 1매석씩이나 서면만 2매로 조립되어 5매석으로 짜여진 면석의 각 면에는 양쪽에 우주(隅柱)가 각출되었으며,

중앙의 받침기둥인 1탱주(撑柱)로 양분하여 한 면에 각 2좌(坐)씩의 천인좌상(天人坐像)을 돋을 새김 하였으며,

 

 

 

 

갑석은 4매석으로 결구되었는데 하면에 너비 1㎝, 깊이 0.7㎝의 낙수홈을 오목새김하여 세밀한 의장을 보이고 있고,

갑석 상면에는 원호(圓弧)와 각형(角形)의 굄을 마련하여 그 위에 상층기단을 받치고 있으며,

이들 천인상은 다같이 연화좌 위에 앉아 있는데 이중의 둥근 두신광(頭身光)을 구비 하였고,

천의(天衣)를 날리고 있으며 수인(手印)은 합장을 하거나 혹은 천의를 잡고 있는 등 각각 다른 형태로,

이 조각들은 각 천인의 상호(相好)가 원만미려(圓滿美麗)하며 유려한 천의자락이 잘 어울려서 당대의 빼어난 작품으로 알려져 있으며,

 

 

 

 

상층기단 면석은 한 면 2매씩 8매석으로 조립 되었는데,

양쪽에 우주가 각출되었고 중앙의 1탱주로 양분하여 팔부신중(八部神衆)을 조각 하였으며,

이들 팔부중은 모두 운문(雲文) 위에 앉아 있고 무기를 가지고 있어 각 면의 조각은 부조(浮彫)가 강하여 입체적이며 웅건한 조각수법을 보이고 있습니다.

 

 

 

 

상층기단 갑석은 3매의 판석으로 결구되었는데,

하면에 너비 3.5㎝, 깊이 0.5㎝의 낙수홈이 오목새김되었고 탑 기단의 갑석 하부에 두른 쇠시리인 부연(副椽)이 마련 되었고,

상면에는 원호와 각형의 굄대를 마련하여 탑신부를 받치고 있습니다.

 

 

 

탑신부는 탑신(塔身)과 옥개석(屋蓋石)이 각기 1석씩으로 조성되었는데,

각 층의 탑신석에는 양쪽에 우주가 정연하며 초층에는 사방에 사방불(四方佛)이 돋을 새김 되어있고,

모두 앙련좌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하고 이중의 둥근 두신광을 구비하였으며 나발(螺髮)에 육계(肉?)가 큼직한 여래상으로,

각 좌상의 앙련좌는 단엽5판인데 각 판내(瓣內)는 큼직한 자방 주변에 꽃문양이 장식 되었으며,

원만한 상호와 목에 돌려진 삼도(三道)가 어깨 위까지 길게 늘어진 양쪽 귀와 잘 어울려서 위엄과 자비가 넘치며,

그 풍려한 존용(尊容)과 의문(衣文)의 조각수법이 유려하며,

 

 

 

동면은 통견법의(通肩法衣)가 양쪽 팔에 걸쳐 무릎을 덮었고 왼쪽 손은 가슴 앞에서 약합을 들고 있는 점으로 보아 약사여래(藥師如來)이며,

서면은 서방극락세계의 아미타불(阿彌陀佛)로서 통견법의가 양쪽 팔에 걸쳐 무릎을 덮었으나 양쪽 발은 노출되었고,

수인은 양손을 가슴 앞에 들어 설법인(說法印)을 취하고 있고,

남면 여래상의 법의는 우견편단(右肩偏袒)이며,

오른쪽 손은 무릎 위에 놓고 왼쪽 손은 어깨까지 들어 외장(外掌)하여 중지와 무지를 잡았고 약지도 꼬부리고 있으며,

북면의 좌상도 우견편단하였으며 수인은 오른쪽 손을 가슴까지 올리고 왼쪽 손은 밑으로 내리고 있습니다.

 

 

 

탑의 상륜부는 노반만 남아 있어,

노반은 2매석으로 구성되었고 중앙에는 지름 11㎝의 찰주원공이 관통 되었는데,

그 원공의 크기가 고르지 않고 상경(上徑)은 11㎝이나 중경은 9㎝, 하경은 13㎝이며,

진전사지 삼층석탑(陳田寺址三層石塔)은 1968년에 해체, 보수 되었습니다.

 

 

 

약간 파손된 부분이 있어서 명확하지 않지만 천(天)·야차·건달바·아수라·가루라·긴나라·마후라가 및 용(龍)의 불타8부중을 조각한 것으로 여겨지며,

1층 옥신의 윗면 중앙에는 사각형의 사리공이 있고 4면에는 앙련의 연화좌 위에 결가부좌한 4방불이 조각 되었으며.

1층 옥신에 조각된 4방불은 밀교의 5방불로부터 영향을 받은 조상으로 짐작되며,

우리나라의 4방불 조성은 삼국통일 이전에 이미 이루어졌지만 이처럼 탑신에 등장한 것은 신라 하대의 일로서 흔히 볼 수 있는 예는 아니어서,

석탑의 기단과 1층 옥신에 8부중상과 4방불을 새긴 것은 신라 하대에 새로이 대두된 종교적 조형이념을 반영한 것으로 그 가치가 높습니다.

 

 

 

3층 석탑이 있는 진전사지(陳田寺址)에서 길을 따라 오르면 설악 저수지에 이르게 되고,

길의 끝에는 새로지은 진전사(陳田寺)가 자리해 있어,

 

 

 

다시세운 진전사(陳田寺)앞 설악산 대청봉 아래의 관모산에는 3월말에 눈이 내려와 있고,

 

 

 

진전사(陳田寺) 앞마당에는 영지(影池)로 보이는 작은 연못이 있으며,

 

 

 

 

 

옛 진전사(陳田寺)는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경에 도의선사(道義禪師)가 창건한 사찰로 알려져 있으며,

도의선사는 당나라에서 선종을 공부하고 821년(헌덕왕 13) 귀국하여 신라에 선종을 전하였으나,

당시에는 교종만을 숭상하던 때였으므로 선법을 익히려고 하지 않았기에 이곳에 들어와서 40년 동안 수도하다가 입적 하였으며,

그의 선법은은 염거(廉居)화상과 보조(普照)선사 체징(體澄)에게로 전해져 구산선문 중 가지산문(迦智山門)을 열었습니다.

 

 

 

진전사(陳田寺) 고려 중기의 슬려인 일연(一然)이 진전사의 장로(長老)였던 대웅(大雄)의 제자가 되었던 것으로 보아,

그 당시까지는 존립 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1530년에 편찬한 지리서이자 관찬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진전사(陳田寺)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조선 초기 이후에 폐사가 된 것으로 추정되며 지금의 진전사는 2005년에 복원 되었다고 합니다.

 

 

 

 

사찰의 오른쪽에 안내문이 있어 오솔길을 따라가면,

 

 

 

보물 제439호인 "양양 진전사지 도의선사탑(襄陽陳田寺址道義禪師塔)"을 만나게 되며,

진전사지 도의선사탑(陳田寺址道義禪師塔)은 신라 선종(禪宗)의 초조(初祖)인 도의선사(道義禪師)의 묘탑으로 추정되며,

9세기 중반경에 세워진 묘탑으로 한국 석조부도탑의 시원을 이루는 가장 오래된 부도로 알려져 있으며,

 

 

 

높이 3.17m로 신라시대 일반형 석탑의 통례인 사각형의 2층기단 위에 앙련(仰蓮) 굄 1석을 놓고,

8각 탑신석(塔身石)과 옥개석(屋蓋石)을 쌓은 양식으로,

6매의 장대석(長臺石)으로 지대가 구성되었고 그 윗면에는 원호(圓弧)와 각형(角形) 1단씩의 받침이 마련되어 기단부(基壇部)를 받고 있으며,

하층기단은 4매석으로 이루어졌는데 면석(面石)과 대석이 같은 돌이고,

각 면 좌우의 우주(隅柱: 모서리기둥)와 중앙의 받침기둥인 1개 탱주(撑柱)가 정연하며,

하층기단 갑석(甲石) 윗면에는 원호와 각형 1단씩의 받침이 마련되어 상층기단을 받고 있습니다.

 

 

 

상층기단 면석은 하층기단과 같이 각 면 양쪽에 우주가 1개씩 중앙에 탱주가 1개씩이 표현 되었고,

갑석은 2매석으로 형성되었는데 아랫면에 기단의 갑석 하부에 두른 쇠시리인 부연(副椽)이 마련되어 있고,

윗면에는 8각으로 4분원의 굄과 낮은 각형의 반전형(反轉形) 굄이 조출 되었고,

그 위에 또 하나의 높은 각형 굄이 각출되어 전부 3단으로서 연화(蓮花) 굄석 1매를 받치고 있으며,

 

 

 

 

사리공에 대한 조사는 1968년 4월 복원공사 때 이루어 졌는데,

26.5×29㎝, 깊이 9.5㎝의 사리공의 형태는 구연(口緣)이 뚜렷한 사각형으로서,

가장자리에 너비 1㎝, 깊이 0.5㎝의 홈이 오목새김 되었고 밑면은 안으로 굽어 졌으며,

연화대석 자체가 높지 않으므로 사리공도 깊지는 못하나 너비는 넓은 편으로,

8각 탑신석에는 명문이나 조식(彫飾), 우주 등의 표현이 하나도 없으며 남쪽 1면에만 문비(門扉)와 같은 전액(篆額)이 있을 뿐이며,

 

 

 

 

연화대는 8각으로 된 단엽(單葉) 16판(瓣)의 앙련좌인데,

각 연판 안에는 원형의 자방(子房) 주변에 5엽의 화판이 조식 되었고,

윗면에는 낮은 각형 1단이 있고 그 위에 높은 4분원의 테두리장식과 각형 1단이 마련되어 팔각 탑신을 받고 있으며,

윗면 중앙에는 네모난 사리공(舍利孔)이 자리해 있어,

연화좌를 별개의 돌로 조성하여 안치한 것은 이 사리공을 시설하기 위한 것으로,

석조부도에서 이러한 장치를 시설한 유례는 아직까지 알려진 바가 없다고 합니다.

 

 

 

 

도의선사(道義禪師) 부도는 진전사지 삼층석탑과 함께 무너져 있던 것을,

1968년에 다시 세웠으며, 이때 상륜부의 보주도 찾아 복원 하였는데,

탑신과 옥개석은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묘탑 양식인 8각원당형을 따르고 있지만,

2중의 기단과 기단부 위에 사리를 봉안하는 방식은 일반 석탑의 형식을 따른 것으로,

이 부도는 진전사(陳田寺)를 창건한 도의선사(道義禪師)의 묘탑으로 추정되고 있어,

 

 

 

 

도의선사(道義禪師)는 신라의 승려로 속성은 왕씨(王氏) 법호는 원적(元寂)이며,

북한군(北漢郡) 출생으로 어머니가 임신한지 39개월 만에 낳았다고 전하며,

784년(선덕왕 5) 바다를 건너 당나라 오대산으로 가서 공중으로부터 종소리를 듣는 등 문수보살의 감응을 얻었고,

광부(廣府) 보단사(寶壇寺)에서 비구계를 받고 조계(曹溪)로 가서 혜능(慧能)을 모신 조사당(祖師堂)을 참배하였는데,

이 때 조사당의 문이 저절로 열렸다고 하며 강서의 개원사(開元寺)에서 지장(智藏)에게 법을 물어 의혹을 풀고 지장의 법맥을 이어 받았으며,

백장산(百丈山)의 회해(懷海)를 찾아가 법요(法要)를 강의 받았는데,

회해는 “강서의 선맥(禪脈)이 모두 동국승(東國僧)에게 속하게 되었구나.” 하고 칭찬 하였다고 하며,

37년 동안 당나라에 머무르다 821년(헌덕왕 13) 귀국하여 선법(禪法)을 펴고자 하였으나,

당시 사람들이 교학(敎學)만을 숭상하고 무위법(無爲法)을 믿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하여,

아직 시기가 오지 않았음을 깨닫고 설악산 진전사(陳田寺)로 들어가 40년 동안 수도하다가 제자 염거(廉居)에게 남종선(南宗禪)을 전 하였습니다.

염거의 제자 체징(體澄)은 전라남도 장흥의 가지산에 가지산파(迦智山派)를 세워 크게 선풍을 떨쳤으며,

신라에는 북선(北禪)과 함께 2계통의 선(禪)이 있게 되었고 도의(道義)는 가지산파(迦智山派)의 개조가 되었습니다.

 

 

 

설악산 동쪽에 자리했던 사찰로,

교종불교가 절대적이었던 신라에 선종을 알린 도의선사(道義禪師)가 오랫동안 은거하던 곳으로,

염거(廉居)화상과 보조(普照)선사 체징(體澄)과 같은 고승들이 배출 되었고,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지은 일연(一然)스님도 수행 했다고 전해지는 곳으로,

최근 복원이 되었으며 국보 제122호인 삼층석탑(三層石塔)과 보물 제439호 도의선사탑(道義禪師塔)이 남아 있어,

우리나라의 선맥(禪脈)의 싹을 틔운 사찰로 당시의 위상과 상징이 남아있는 곳으로,

강원도 양양의 "진전사지(陳田寺址)"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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