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하회마을에 있는,

조선 중기의 주택 충효당(忠孝堂)을 찾았습니다.

 

 

 

우리나라를 대표 할만한 민속마을인 하회마을의 안내문에서,

충효당(忠孝堂)의 위치를 미리 보아 둡니다.

 

 

 

안동 하회 충효당(安東河回忠孝堂)은 보물 제41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충효당(忠孝堂)의 대문앞 마당에는,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방문기념식수가 있어,

1994년 4월 21일 하회마을 방문을 기념하기위해 심은 구상나무로,

구상나무는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우리나라의 고유 수종이라고 합니다.

 

 

 

안동 하회마을의 남촌을 대표하는 충효당(忠孝堂)으로,

건너편에는 풍산류씨 대종가인 양진당(養眞堂)이 있고 원지산의 경관을 한눈에 볼 수 있게 서향으로 자리해 있으며,

 

 

 

충효당(忠孝堂)은 조선 선조 때의 문신인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생가로 비교적 원래의 모습을 잘 남기고 있어,

사랑채와 안채는 손자인  졸재(拙齋) 류원지(柳元之, 1598~1674)가 짓고,

증손자인 눌재(訥齋) 류의하(柳宜河, 1616~1698)가 외당을 완성하고 확장 수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행랑채는 8대손 일우 류상조(柳相祚,1763∼1838)가 지은 건물로 대문과 방과 광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랑채는 4칸 크기의 사랑 대청을 가운데 두고 좌측에는 사랑방과 침방을 앞뒤에 놓고,

우측에는 작은 마루와 방을 앞뒤로 두었으며,

작은 마루는 우측만 개방하고 앞쪽과 좌측은 각기 골판문(骨板門)과 굽널띠살문을 달아 막았는데,

이는 서향인 집에 여름날 오후 따가운 햇볕이 드는 것을 막고 겨울에 들이치는 북서풍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 하며,

 

 

 

사랑채인 충효당(忠孝堂)의 너른 대청에는,

 

 

 

충효당(忠孝堂)의 현판이 걸려 있어,

조선후기 성균관제조, 이조판서, 우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명필가였던 미수(眉叟) 허목(許穆,1595∼1682)의 글씨라 하며,

 

 

 

충효당(忠孝堂)의 구조는 보수 때의 개작으로 보이는 견치석쌓기에 장대석으로 마무리한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웠으며,

기둥 위에는 주두없이 납도리를 받치고 기둥 사이의 창방 위에 소로를 두어 납도리의 장여를 받친 민도리소로수장집으로,

 

 

 

사랑채의 계자난간(鷄子欄干)으로,

난간동자를 닭의 발 모양으로 바깥쪽으로 구부정하게 하여 화초 무늬나 덩굴무늬를 새겨 만들고,

돌난대를 밖으로 내밀어 걸친 난간의 모습으로 충효당(忠孝堂)의 격을 보여 주는듯 합니다.

 

 

 

솟을대문이 서있는 12칸 줄행랑채는 광과 방으로 연이어 구성되어 있고,

행랑채는 8대손인 일우 류상조(柳相祚,1763∼1838)가 지었다고 하며,

 

 

 

행랑채의 대문 옆에는 말이나 소를 키웠던 외양간도 자리해 있으며,

 

 

 

사랑채는 남자주인이 생활하면서 손님들을 접대하는 공간으로,

왼쪽에서부터 사랑방, 대청마루, 방, 마루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구는 오량이며 홑처마에 팔작지붕을 이루고 있고 사랑방과 대청의 전면과 측면에는 계자 난간을 설치 하였고,

 

 

 

대부분 원주를 세우고 부분적으로 주두를 얹은 5량가의 소로수장집으로,

작은 마루와 방 사이에 시설된 조그마한 들창과 대청과 방 사이에 나 있는 아주 낮은 외여닫이창도 방풍을 위한 것이며,

사랑 대청 배면 좌측 칸에 머름 없이 키 큰 굽널띠살문을 내어 안채와 뒤뜰을 드나들 수 있게 한 것도 흔치 않은 예라고 하며,

전면과 우측면에는 계자각(鷄子脚) 난간을 돌려 건물의 격을 높였습니다.

 

 

 

사랑채의 마루 아래에는 온돌방에 불을 넣었던 아궁이의 모습도 보이고,

 

 

 

사랑채의 뒤편으로는 "口"자 형태의 안채가 자리해 있어,

"一"자 모양의 사랑채와 연이어 있는 모습이 들어오며 안채는 후손이 거주하는듯 개방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랑채의 가구는 5량가로,

종보 위에는 첨차(?遮)와 소로를 짜 넣은 파련대공(波蓮臺工)을 세워 종도리를 받게 하였고,

대청·방·상부 다락 등 여러 곳에 충효당의 건립 연대를 가늠할 수 있는 고식(古式)의 영쌍창이 시설되어 있습니다.

 

 

 

사랑채의 뒤편인 동쪽에는 따로 쌓은 담장 속에 사당이 자리하고 있어,

 

 

 

주로 종택(宗宅)에서 볼수있는 사당은,

앞쪽에 삼문(三門)을 내고 서향인 본채와는 달리 남향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사당앞에서 유물전시관인 영모각(永慕閣)으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만지송(萬枝松)이라 불리는 소나무를 볼수있어, 

가지가 많이 벌어진 것이 특징인 이 소나무는 자손번창을 기원하는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충효당(忠孝堂)의 유물전시관인 영모각(永慕閣)은 "ㄱ"자 형으로 콘크리트 건물로 지어져 있으며,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유물 등을 진열·보관하고 있는 유물전시관인 영모각(永慕閣)으로,

 

 

 

영모각(永慕閣)에 진열된 유물중 일부로,

보물 460호로 지정된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종가 유물은 류성룡(柳成龍)이 직접 사용했던 갓, 홀, 신발 등과,

그의 어머니가 자식들에게 재산을 분배한 기록인 분재기, 조정에서 내린 녹권, 교지 등의 문서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류성룡(柳成龍)의 개인사와 가족사, 사회상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들이라고 하며 그중 일부를 살펴 보면,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이 평상시에 썻다고 하는,

조선시대 성인 남자가 머리에 쓰던 관모(冠帽)인 "갓"이 전시되어 있고,

 

 

 

류성룡(柳成龍)이 조복위에 착용하였던 "허리띠"가 있으며,

 

 

 

류성룡(柳成龍)이 평상시에 신었던 "가죽신"으로,

신발은 한눈에 보기에도 커보여 장대한 체구였슴을 미루어 짐작할수 있습니다.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이 책상을 앞에 두고있는 모습을 모형으로 재현해 두었고,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과 관련한 보물 160호 류성룡 종가문적의 "선조제문" 등과,

보물460호 류성룡 종가유물의 "부의기"와 "광국원종공신녹권"을 비롯하여 "중원부원군 교지"와 그외 여러 문서들이 진열되어 있으며,

 

 

 

국보 132호로 지정된 "징비록(懲毖錄)"으로,

임진왜란 극복과정을 손수 기록한 16권 7책의 목판본으로,

조선 중기의 문신 유성룡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대해 자신의 경험과 사실을 기록한 책으로,

"징비(懲毖)"란 시경(詩經) "소비편(小毖篇)"의 “내가 징계해서 후환을 경계한다(予其懲而毖後患)”는 구절에서 따온 말이며,

1592년(선조 25)에서 1598년(선조 31)까지 7년간의 기사로 임진왜란이 끝난 뒤 벼슬에서 물러나 있을 때 저술한 것으로,

외손 조수익(趙壽益)이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 손자가 조수익에게 부탁해 1647년(인조 25)에 간행 했으며,

내용은 전쟁의 원인과 상황, 군국정무에 관한 문서와 기록, 류성룡 자신이 해결한 정책적 문제와 자신의 시절 논평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다양한 문서기록과 필자의 객관적인 기술과 논평이 수록되어 있어 임진왜란에 대한 사료적 가치가 대단히 높게 평가 하고있는 저술 입니다.

 

 

 

대종가인 양진당(養眞堂)과 더불어 안동 하회마을에서 대표되는 종택으로,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은 여러 벼슬을 두루 거치고,

임진왜란 때에는 영의정으로 전쟁의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는데 많은 공헌을 한 인물로,

그가 쓴 "징비록(懲毖錄)"과"서애집(西厓集)"은 임진왜란사 연구에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자료로도 평가 받고 있으며,

원래 류성룡은 낙향하여 이곳에서 작은 초가를 짓고 살면서,

번잡한 마을에서 벗어나 낙동강 건너편 부용대 아래에 작은 정자인 옥연정사를 짓고 그곳에서 징비록을 비롯하여 많은 저술을 남긴 곳이며,

증손자인 눌재(訥齋) 류의하(柳宜河)에의해 17세기에 크게 중건하여 지은 조선 중기의 고택인,

경북 안동의 회회마을에서 찾은 충효당(忠孝堂)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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