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오산시 지곶동에 있는 백제시대 산성인,

독산성(禿山城)과 세마대지(洗馬臺址)를 찾았습니다.

 

오산 독산성과 세마대지(烏山禿山城─洗馬臺址)는 사적 제14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독성산성(禿城山城) 이라고도 불리는 독산성(禿山城)은 서문과 동문으로 오를 수 있는데,

동문 아래에 있는 보적사 주차장에 차를 두고 보적사 방향으로 오릅니다.

 

 

 

주차장에서 성곽을 따라서 조금 올라가면 독산성(禿山城)의 동문이 나오고,

석문인 동문에는 "해탈의 문"이라 되어있어 사찰의 해탈문(解脫門)을 겸하고 있는듯 하고,

 

 

 

동문을 들어서면 성곽 안에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인 보적사(寶積寺)가 자리하고 있어,

독산성 축조와 같은 시기에 전승을 기원하고자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사찰로 401년(백제 아신왕10년)에 나라에서 창건 했다고도 하며,

삼국시대에 백제가 산꼭대기에 성을 쌓고 그 안에 사찰을 만들어 승전을 기원했다는 곳으로,

전쟁터의 사기 앙양과 원혼을 달래주던 호국사찰로 남아 있습니다.

 

 

 

보적사(寶積寺)의 대웅전으로,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2칸의 규모에 맞배지붕으로 아담한 규모이며,

 

 

 

대웅전에는 석가여래불을 주불로 모시고 있는데,

원래는 약사여래를 모신 약사전을 정전으로 하여 독산성의 역사와 함께 오랜 세월을 같이 했으나,

1990년 도광정운(道光正云)스님의 불사 때 중창정전이 건립되면서 대웅전으로 명칭이 변경 되었습니다.

 

 

 

약사전을 정전으로하는 보적사(寶積寺)가 석가여래불을 주불로 모시는 대웅전으로 바뀌었지만,

정전 옆에는 "석조약사여래불좌상"을 볼수있어,

 

 

 

손에 약병을 들고 있는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은,

중생의 질병을 치료하고 재앙에서 구원해 준다는 부처님 입니다.

 

 

 

대웅전 아래 계단 옆에는 포대화상(布袋和尙)이 자리해 있어,

포대화상(布袋和尙)은 중국 후량(後梁)의 고승으로 법명은 계차(契此)로 정웅대사(定應大師)라고 하며,

배가 튀어나오고 포대를 걸머진 뚱뚱한 몸집에 항상 웃으며 배는 풍선처럼 늘어져 괴상한 모습으로,

지팡이 끝에다 커다란 자루를 메고 다녔는데,

그 자루 속에는 별별 것이 다 들어있어서 무엇이든 중생이 원하는 대로 다 내어주어서 포대스님 이라고 불렸으며,

기이한 행적을 수없이 남겼으며 사람들의 길흉화복이나 날씨 등을 예언하여 맞지 않는 일이 없었다고 하며,

세간에는 미륵보살(彌勒菩薩)의 화신(化身)으로도 알려진 고승 입니다.

 

 

 

보적사(寶積寺)라는 사찰이름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고 있어,

어느 옛날에 보릿고개로 끼니조차 잇기 어려운 노부부가 있었는데,

먹을 것이라고는 겨우 쌀 두되만이 남아 있었고 식량을 구할 방법도 없어 굶어 죽을 지경에 처하게 되자,

노부부는 밥 한술 먹고 며칠을 더 사느니 차라리 이 쌀을 부처님께 공양하여 좋은 일이라도 하고 죽자고 결심 하였고,

쌀을 부처님께 바치고 집에 돌아와 보니 비어있던 곳간에 쌀이 가득 차 있는 것이 었습니다.

노부부는 이것을 나한님의 신통력이라 여기고 더욱 치성을 올리게 되었고 이후로 보적사란 이름이 붙었다는 전설입니다.

 

 

 

동문으로 다시 나와서 성곽을 따라 남문 방향으로 길을 잡습니다.

 

 

 

독산성(禿山城) 돌로 쌓은 산성으로 둘레는 약 3.6㎞인데 현재 약 400m 정도의 성벽과 성문 4곳이 남아 있어,

쌓은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하였으므로 한강 하류에 도성을 두었던 백제시대에 축조 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독산성(禿山城)은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를 거쳐 임진왜란 때까지 계속 사용 되었는데,

1593년(선조 26) 7월에 전라도관찰사 겸 순변사였던 권율(權慄)이 근왕병 2만 명을 모아 북상하다가 이곳에 진을 치고서 왜적을 물리쳤고,

이듬해인 1593년에는 9월 11일~14일에는 백성들이 힘을 모아 불과 4일 만에 고쳐 쌓았다고 하며,

이러한 과정은 주변에 알려져 금지산성(衿之山城) 에서도 군량을 모으고 병사를 훈련시켰으며,

월계산성(月溪山城)과 파사산성(婆娑山城)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으며,

1595년에는 포루(砲樓) 시설을 갖추었고 1597년 2월에는 왜병이 쏜 조총의 피해를 막기 위해서 성벽 안쪽에 평평한 집을 지었으며,

석차(石車)와 함께 투석용으로 쓰던 포차(抛車)를 배치하면서 성 밖에 목책을 세우려고 계획하기도 하였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도 독산성(禿山城)은 전략적 위상이 계속 중시되어,

1602년(선조 35)에 부사 변응성(邊應星)이 성을 수리하여 쌓았고,

1796년(정조 20)에 수원성 축조와 함께 고쳐 쌓아 오늘에 이르는데 당시 성의 둘레는 1,800보이고 성문 4곳이 있었다고 하며,

한일합방 후 일본인들이 과거 자신들의 아픈 역사의 보복차원에서 독산성과 세마대의 누각, 무기창고를 부셔 버렸는데,

1957년 세마대(洗馬臺) 옛터에 다시 누각을 복원하고 현판을  써서 달았습니다.

 

 

 

성벽위를 따라 남쪽으로 향 하다가,

오른쪽으로 나있는 길을 따라 조금 오르면,

 

 

 

물 대신 쌀로 말을 목욕시킨 세마대(洗馬臺)의 모습이 들어와,

 

 

 

독산성(禿山城)은 많은 군사들이 주둔하기에는 물이 부족한 편으로 이러한 여건이 세마대(洗馬臺)을 낳게 되었는데,

1593년 임진왜란때 전라도 관찰사 겸 순변사였던 권율(權慄)이 이곳에 주둔 하였을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끈 왜군 3만 명이 산성아래서 장기간 포위한 채,

우리 군이 투항하기만 기다리며 산에 물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는 물 한 지게를 산 위로 올려보내며 조롱 하였고,

권율은 물이 많은 것처럼 보이기 위해 백마를 산 위로 끌어 올리고서 목욕시키는 것처럼 흰 쌀을 끼얹게 하였는데, 

이를 본 왜장은 말을 씻길 만큼 산 꼭대기에 물이 풍부하다고 생각하고는 공격을 포기한 채 퇴각하게 되었고, 

이때를 기다린 권율(權慄)장군은 기습공격으로 수많은 왜군들을 살육 했다는 이야기가 세마대지(洗馬臺址)에 남아 있습니다.

 

 

 

1957년에 복원 하였다는 세마대(洗馬臺)의 현판으로,

남쪽에 있는 현판은 이대통령각하(李大統嶺閣下) 휘호(揮毫)라고 쓰여있어,

복원후 이승만 전 대통령이 직접 글씨를 쓴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정조대왕은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활쏘기를 했던 이곳 독산성에 백성들을 이주시켜,

아침저녁으로 생솔가지를 피워 그 연기를  향 연기로 삼아 사도세자를 위로했다고 전하고 있는데,

그리하여 독산성을 향로봉(香爐峰)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누각의 북쪽에도 또다른 세마대(洗馬臺)의 현판을 볼수있고,

 

 

 

세마대(洗馬臺)의 마루에서는 오산 주변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와,

삼국시대 이후 중요한 군사 요충지임을 알수있게 합니다.

 

 

 

임진왜란 때 권율(權慄)장군이 폈던 진묘(眞妙)한 병법전략에 연유해,

세마대첩으로도 불리는 "독산성대첩"을 이루었는데 물 대신 쌀로 말을 목욕시킨 세마대(洗馬臺) 전략으로,

왜군은 5일간 독산성을 공격하다 실패하자 과천을 거쳐 한양으로 퇴각 하게 되는데,

이때를 놓치지 않고 적의 퇴로를 기습하여 수많은 적병을 살상 하였는데 봉담면의 "삼천병마골전투"는 이때의 전승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1977년 간행된 전국문화유적총람에 의하면,

독산성(禿山城) 및 세마대지(洗馬臺址)의 연혁에 대해 백제때 축성된 고성이었고,

통일신라나 고려시대에도 군사상 중요한 요지로 되어 왔으며 임진왜란 때 권율(權慄)장군이 주둔 했었고,

조선 중기의 문신인 변이중(邊以中)으로 하여금 화포를 발명, 제작케 하여 행주대첩에서 승전케 하였으며,

임란후 조정에서 독산성에 세마대를 장엄하게 세우고 병기창을 두어 무예연습을 하게 하였으며,

정조16년(1792년)에 독산성과 세마대를 중수 하였다고 합니다.

 

 

 

세마대지에서 독산성(禿山城)의 서편으로 나오면 수원의 남서쪽인 서오산이 들어오며,

산성 아래로는 황구지천이 흐르고 있어 산책삼아 천전히 돌아 보기에도 좋습니다. 

 

 

 

오산 독산성(禿山城)은 2019년부터 복원공사가 단계적으로 추진 된다고 하며,

복원 공사는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인 여장과 4대 문루를 비롯하여 운주당 등,

당시 군사들이 주둔하던 건물과 식량과 무기창고 등 각종 시설물을 다시 세우는 작업으로 공사기간만 7∼10년 걸릴 것으로 예상 된다고 합니다.

 

 

 

백제가 쌓은 고성이었고 신라통일기나 고려시대에서도 군사상 요지로 되어 왔으며,

조선조에 와서 위치적 특성이 용인 인근의 고성과 남한산성이 기각지세를 이루어,

왕도의 문호를 굳게 한다는 군사 전략상의 이점이 있는 곳으로 중요한 곳이었음을 알수 있으며,

임진왜란때 권율(權慄)장군의 세마대(洗馬臺) 전략 독산성대첩을 이루었던 곳으로,

경기도 오산의 독산성(禿山城)과 세마대지(洗馬臺址)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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