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월림리 화림동(花林洞)에 있는,

함양 최고의 풍치를 자랑하는 정자인 "농월정(弄月亭)"을 찾았습니다.

 

농월정(弄月亭) 앞으로는 맑은 물이 급한 굴곡을 이루는 곳에 커다란 반석이 펼쳐져 있어,

반석 위를 흐르는 물이 달빛을 받으면 "농월정(弄月亭)" 이름 그대로 달을 희롱하는 듯 한곳으로,

많은 휴양객들이 찾는 함양의 이름난 명소로 알려져 있으며,

 

 

 

안의 삼동(安義 三洞)이라 하여 옛 안의현에 세개의 계곡이 있어 "안의 삼동"이라 불렸는데,

용추폭포(龍秋瀑布)의 심진동(尋眞洞)과 수승대(搜勝臺)가 있는 원학동(猿鶴洞) 그리고 이곳 화림동(花林洞)으로 세 곳의 빼어난 절경을 가리키며,

안의 삼동 중에서 화려한 자연의 미를 간직한 곳이 화림동(花林洞)으로,

화림계곡은 8정8담(八亭八潭)이라 하여 8개의 담에 8개의 정자가 있었다고 전해 지는곳으로,

현재 남아있는 정자로는 거연정(居然亭)과 군자정(君子亭), 동호정(東胡亭)과 농월정(弄月亭) 4곳만 남아 있습니다.

 

 

 

농월정(弄月亭)은 화림동(花林洞) 계곡의 하류에 자리하고 있으며,

이곳은 "농월정 국민관광지"로 개발이 되어 편의시설은 1993년부터 조성되기 시작 하였으며, 

2,000여 평의 야영장은 모래땅 위에 조성되어 있어 배수가 잘 되어 비오는 날에도 야영이 가능하며,

주변에는 위락시설 등이 들어서 있어 더덕구이와 백숙, 메기 매운탕이 별미로 알려져 있습니다.

 

 

 

농월정(弄月亭) 주변의 너럭바위에는,

화림동(花林洞)과 월연암(月淵岩)이라 쓰여진 오래되어 보이는 암각서가 있고,

 

 

 

농월정(弄月亭)은 조선중기 관찰사와 예조참판을 지낸 지족당(知足堂) 박명부(朴明傅,1571~1639)가,

광해군이 영창대군의 죽음과 인목대비의 유배에 대한 부당함을 직간하다 파직되자 고향에 돌아와 은거생활을 하면서 1637년에 세운 정자로, 

지족당(知足堂)은 인조 반정 후 예조참판과 강릉 도호부사 등을 지냈으며,

말년에는 왕이 불러도 벼슬길에 나가지를 않고 1637년에 농월정(弄月亭)을 짓고 후학을 가르쳤던 곳으로,

박명부(朴明傅)를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새로 지은 정자로 몇 차례 중수를 거쳐 1899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건립되어 남아 있었으나,

아쉽게도 2003년 화재로 인하여 전소되어 오랫동안 터만 남아 있다가 2015년 9월 12일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옛 모습대로 복원되어 있는 농월정(弄月亭)의 모습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에 뒷면 중앙 1칸에 판방을 두었으며 네 귀퉁이에 활주를 세웠으며,

누각의 아랫부분은 자연암반 위에 돌기둥의 초석을 두고 윗부분은 나무기둥을 세웠는데,

1986년경 화재로 소실 되기전에 이곳을 찾았을때의 모습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으며,

소실된후 이곳을 찾았을때 사라져 없어진 농월정 주변의 모습에 아쉬움이 컷었는데 복원된 모습을 대하니 되찾은 듯하여 다행입니다.

 

 

 

농월정(弄月亭) 윗쪽 옆 바위에는,

지족당 장구지소((知足堂 杖구之所)의 암각서가 크게 쓰여져 있어,

"지족당(知足堂) 박명부(朴明傅)가 소요하며 산책하던 곳" 이라는 의미의 글귀가 있으며,

 

 

 

농월정(弄月亭)의 주인 박명부(朴明傅,1571~1639)의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여승(汝昇) 호는 지족당(知足堂)으로,

1590년(선조 23)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교서관 부정자(校書館副正字)에 보직되었다가 이듬 해에는 저작(著作)에 제수 되었고,

임진왜란 때는 김성일(金誠一)·곽재우(郭再佑) 군막에 왕래하면서 군무(軍務)에 많이 협찬 했으며,

1593년에는 의주(義州)로 호종(扈從)하였다가 환도(還都) 후 박사(博士)를 제수 받았고,

그 뒤에 호조좌랑(戶曹佐郞)·해주판관(海州判官)·예빈시첨정(禮賓寺僉正)·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거쳐 합천군수(陜川郡守)로 나갔는데,

당시 합천에 정인홍(鄭仁弘)이 있었으나 그의 집에는 출입하지 않았다고 하며,

1614년(광해군 6)에 이이첨(李爾瞻), 정인홍 등이 광해군을 종용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살해하고 인목대비(仁穆大妃)도 유폐 시키자,

그는 직언으로 항소하다가 관직을 삭탈 당하고 축출 되었으며,

1623년 인조반정 후 부수찬(副修撰)으로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자 그 해 여름에는 대구부사(大邱府使)로 임명되었고,

그 뒤에 죽산부사(竹山府使)·형조참의(形曹參議)·좌부승지(左副承旨)·공청도관찰사(公淸道觀察使) 등을 역임하다,

예조참판(禮曹參判)으로 재임 중에 병자호란을 당해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강화(講和)를 반대하였으나,

끝내 성하지맹(城下之盟)이 맺어지자 그는 벼슬을 버리고 물러나 농월정(弄月亭)을 짓고 은거(隱居)하다가,

1638년(인조 16)에 예조참판(禮曹參判)·한성좌윤(漢城左尹)·도승지(都承旨) 등에 연이어 제수 되었습니다.

저서로는 지족당문집(知足堂文集) 3책이 있습니다.

 

 

 

농월정(弄月亭)의 현판으로,

원래 중국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썼으나 불에 타 없어진 것을 새로 쓴 것으로,

주지번이 어떤 연유로 이 편액을 썼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농월정(弄月亭) 이라는 명칭은 "달 밝은 고요한 밤에 암반 위의 냇물에 비친 달빛은 한잔의 술로 달을 희롱한다"라는,

조선의 옛 선비들의 풍류와 멋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정자 옆면에 나있는 나무계단을 통하여 마루로 올라보면,

 

 

 

화재로 소실되어 다시 지어서 인지 단청이 말끔하며,

 

 

 

정자의 중앙에 있는 1칸 짜리의 마루방인 판방도 들여다 봅니다.

 

 

 

농월정(弄月亭)의 마루 위에는,

청룡과 황룡이 마주 보고 있는 형상을 볼수있어,

화림동(花林洞)의 8정8담(八亭八潭)의 정자 가운데 남아있는 4곳중 "동호정(東湖亭)"에서와 같은 모습이며,

 

 

 

농월정(弄月亭)의 마루에서 정자 앞을 내려다 보면,

화림동(花林洞)의 계곡물은 안의면 금천리에 이르면 비단 금(錦)자를 써서 금천(錦川) 으로도 불리는 맑은물이 들어오고,

 

 

 

농월정 앞에 넓게 자리하고 있는 반석을 달바위(月淵巖)라 부르는데,

바위 면적이 정자를 중심으로 1,000여 평이 된다고 하며 달바위로도 불리는 월연암(月淵岩)의 너럭바위와,

옥구슬 구르듯이 암반을 타고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와 함께 달과 같이 둥근 소(沼)가 형성되어 이를 월연담(月淵潭)으로 부르고 있어,

 

 

 

농월정(弄月亭)의 마루에서는 "암반 위의 냇물에 비친 달빛은 한잔의 술로 달을 희롱한다" 라고 하는,

옛 선비들의 정취를 보름달이 뜨는 달밤이 아니어도 짐작할만 합니다.

 

 

 

농월정(弄月亭)의 마루위에는 여러 그림들을 볼수있어,

이곳 맑은 계곡물에서 족욕을 즐기는 선비의 모습이 있고,

 

 

 

정자에 앉아 농월정(弄月亭)의 정취를 즐기는 모습도 묘사되어 있습니다.

 

 

 

농월정(弄月亭)은 온돌방은 들이지 않고 1칸의 마루방을 들여 여름형의 정자로 보여지며,

기둥을 높이둔 누각형의 정자로 먼곳까지 관망을 위함으로 여겨지는데,

가운데 방을 들이고 삼면에 마루를 둔 평면의 형식은 호남지역의 정자와 닮아 있는데,

농월정(弄月亭)은 빼어난 경치로 많은 시인묵객들이 거쳐간 곳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정자에서 내려와 농월정(弄月亭)앞의 월연담(月淵潭) 주변을 돌아 봅니다.

 

 

 

월연암(月淵岩) 앞으로는,

힘찬 물소리를 내며 맑은 계곡물이 흘러 내리고,

 

 

농월정(弄月亭)의 주변에는 여러곳에 작은 물 웅덩이가 있어,

보름달이 뜨면 여러개의 달이 물에 비치었을것으로 여겨 집니다.

 

 

 


농월정(弄月亭) 주변에는 수많은 너럭바위와 수려한 경치로 이름나 있으며,

식당과 방가로등의 위락시설과 주차장 등의 편의 시설도 잘되어 있는편 입니다.

 

 

 

함양 화림동(花林洞)의  8정8담(八亭八潭) 정자중 하나이며,

화재로 소실되어 한동안 볼수 없었던 정자 였으나,

다행이 원래의 모습으로 다시 복원되어 옛 정취를 되살릴수 있는 곳으로,

경남 함양 지족당(知足堂) 박명부(朴明傅)의 정자인 "농월정(弄月亭)"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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