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고도 경주를 여행하다보면,

크고 수많은 왕릉급의 무덤들을 대하게 되는데,

삼국시대와 통일 신라시대를 이어오면서,

거대한 규모의 무덤들이 많은곳이 경주이다 보니 많은 왕릉급의 무덤들을 대하게 됩니다.


문화재의 보고인 경주에서,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에 위치하고 있는,

사적 제26호로 지정되어 있는 경주 "원성왕릉(元聖王陵)"을 찾아 봅니다.


원성왕릉(元聖王陵)은 초기에 괘릉이라 불렀는데,

괘릉이라는 이름은 왕릉이 조성되기 이전에 원래 작은 연못이 있어,

연못의 원형을 변경하지 않고 왕의 유해를 수면 상에 걸어 안장하였다는 속설에 따라 붙여진 이름입니다.


능은 외형상 원형토분(圓形土墳)으로 규모는 지름 약 23m, 높이 약 6m이며,

봉분 아래에는 봉토(封土)를 보호하기 위한 호석(護石)이 설치되어 있고,

호석은 목조건축의 석조기단(石造基壇)과 같이 지대석(地臺石) 위에,

높이 95㎝, 길이 120㎝ 크기의 판석(板石)으로 된 면석(面石)을 놓고 그 위에 갑석(甲石)을 올렸는데,

통일신라시대의 가장 완비된 능묘제도를 보여주고 있는 왕릉이기도 합니다.


원성왕(元聖王)은 신라 제38대 왕(재위 785∼798년)으로,

성은 김(金), 이름은 경신(敬信, 敬愼, 敬則)이며,

내물왕의 12대손으로 780년 김지정의 난을 뒤에 선덕왕이 된 김양상과 같이 평정한 뒤 상대등이 되었고,

선덕왕이 후사 없이 죽자 왕위에 올랐습니다.

 

괘릉은 신라 제38대 원성왕元聖王의 능이라는 견해가 유력한데,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는 원성왕이 재위 14년에 죽으니 유해를 봉덕사(奉德寺) 남쪽에서 화장했다고 하였고,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원성왕릉이 토함산 동곡사(洞鵠寺)에 있으며,

동곡사는 당시의 숭복사(崇福寺)라 하고 최치원(崔致遠)이 비문을 쓴 비석이 있다고 하였는데,

지금 괘릉에 비석은 남아 있지 않으나 인근에 숭복사 터가 있어 괘릉이 원성왕의 능이라는 견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통일신라 왕릉의 대표격인 이 괘릉의 능묘제도는,

당나라와의 문물교류를 통하여 그 능묘제도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것으로,

힘이 넘치는 모습의 무인석은 서역인의 얼굴을 하고 있어 주목 되는데 페르시아 무인상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경주를 여행하면서 찾은 곳으로,

신라의 왕릉중 통일 신라시대의 능묘제도를 살필수 있는 곳으로,

경북 경주의 "원성왕릉(元聖王陵)"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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