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 으로의 문화재 탐방에서,

전라남도 장흥군 장흥읍 송암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자인 "사인정(舍人亭)'을 찾았습니다.

 

사인정(舍人亭)은 탐진강과 금강천이 만나는 합수지점이 보이는,

산 언저리에 자리해 있는데,

정자로 오르는 초입에는 사인정과 관련한 비석들을 만날수 있고,

 

 

 

 

차를 주차할수 있는 곳인 비석에서 50m 정도를 오르면,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55호이며,

설암(雪巖) 김필(金㻶,1426∼1470)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정자인 "사인정(舍人亭)'을 만나게 되는데,

 

 

 

 

정자 뒤편에는 이끼가 끼어있는 바위들이 있고,

바위에는 글씨가 암각되어 있어,

 

 

 

 

글자는 이끼 때문에 모두 보이지는 않지만,

이바위에는 강산(江山)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바위에 새겨진 "제일강산(第一江山)"이란 글씨는 백범(白凡) 김구(金九)의 친필로 전해오고 있으며,

백범(白凡)이 상해로 망명 하기전 일경을 피해 이곳에 묵으셨는데,

1948년 해방후 총선거 유세차 장흥을 찾았을때 그때를 회상하고 남긴 글씨라고 합니다.

 

 

 

 

단종(재위 1452∼1455) 때 홍문관 부제학과 이조참판을 지낸 김필(金㻶,1426∼1470)은,

1453년 단종때에 계유정란(癸酉靖亂)으로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장흥에 내려와 숨어 살다가 이곳 강가에서 북쪽을 바라보며,

임금을 그리는 뜻으로 겨울이면 설암벽에 단종의 진영을 그리면서,

그 옆에 정자를 짓고 후학들을 교육 시켰다고 하며,

 

 

 

 

사인정(舍人亭)의 현판으로,

김필(金㻶)이 이곳에서 여생을 마치자,

후손들은 그를 추모하기 위하여 "사인(舍人)"이란 벼슬이름을 따서 사인정이라 명명 하였습니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으로,

가운데 1칸의 방을 들이고 사방으로 마루를 둔 전형적인 호남의 정자 형태이며,

북쪽을 제외한 삼면에는 넌출문인 삼분합문(三分閤門)을 달아 개방성을 높였으며,

 

 

 

 

가운데에 있는 온돌방도 들여다 봅니다.

 

 

 

사인정의 마루 위에는 많은 편액들이 올려져 있어,

 

 

 

 

문화재 지정과 관련한 편엑이 있고,

 

 

 

 

많은 시문 현판들이 올려져 있어,

옛 시인 묵객들이 모여 앉아 제목을 지어 시를 짓고 읊은 제영시(題詠詩)의 시판(詩板)들과,

 

 

 

 

상량문(上樑文)의 기문(記文)도 올려져 있는데,

"숭정후 3년 병오 초봄(崇禎後三丙午暮春)"이라 기록되어 있어,

이로 보아 그간 많은 개보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현재의 건물은 아마 위 연대인 정조 10년(1786)에 중건된 것으로 보입니다.

 

 

 

 

사인정(舍人亭)의 내력을 알수 있는,

"사인정기(舍人亭記)"의 기문(記文)도 찾을수 있고,

 

 

 

 

정자를 고쳐 짓거나 다시세우고 기록한 기문(記文)인,

사인정중수기(舍人亭重修記)의 편액도 2기가 올려져 있습니다.

 

 

 

 

사인정(舍人亭)의 마루 에서는,

탐진강과 금강천이 만나는 합수지점을 내려다 보이고,

 

 

 

 

나무사이로 탐진강과 주변의 너른 들판도 눈에 들어 옵니다.

 

 

 

 

사인정(舍人亭)의 뒷면에는 큰 암벽이 있는 산이 둘러 있고,

전면에는 강물이 흐르고 있어 자연경관을 잘 이용한 정자 이기도 합니다.

 

 

 

 

정자 주변의 동백나무에도 눈이 내렸지만,

 

 

 

 

눈바람을 이기고 피어나는 동백꽃이 더욱 붉게 여겨집니다.

 

 

 

 

정자 뒤편에는 사인정(舍人亭)의 주인인 김필(金㻶)을 모시는 사당이 있어,

안내문에 의하면 "제일강산이라는 김구 선생의 글씨가 음각되어 있는 윗쪽에,

설암선생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는데 세월이 오래되면서 풍화작용으로 마모되어,

보존이 어렵게 될 것을 우려하여 설암 선생의 영정을 이곳에 모신다"는 내용이 있고,

 

 

 

 

문위에는 "참판공 영정각(參判公 影幀閣)"의 현판이 있고,

 

 

 

 

내부에는 "가선대부 이조참판 김필지상(嘉善大夫 吏曹參判 金㻶之像)"의 영정이 모셔져 있어,

 

김필(金㻶,1426∼1470)의 자는 화보(和甫) 또는 필옥(筆玉), 호는 설암(雪巖)이며,

1447년(세종29) 22세 때 생원시에 입격하고 그해 식년시 문과급제 하여 예문관봉교로 관직을 시작 하였고

1452년 편수관 봉훈랑, 1453년 이조좌랑, 1454년 의정부사인, 1455년 평안도 귀성경차관 부정,

1456년 직수문전, 1457년(세조3) 32세 때 당사관 시험인 중시(重試)에 급제하고,

1458년 사헌부집의, 1459년 경차관판군자감사, 지형조사를 지냈으며,

1464년 호조참의, 1465년 이조참의를 지냈고,

1466년 경기도관찰사에 이어 1468년 경상감사를 거쳐,

1469년 중추부동지사 재임 때 예종이 승하하자 국장도감제조에 제수 되었으며,

 

 

 

 

이후 이조참판을 거쳐,

1470년 가선대부 충청도관찰사겸 수군절도사로 재임 중에 병환으로 사임하고,

장흥에 귀향하여 별세 하여 생을 마쳤는데,


특히 1453년 단종(재위 1452~1455)때 계유정란이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잠시 장흥에 내려와 은거하면서 정자를 짓고 후학들을 교육 시켰으며,

그 후 복직되어 17년 간 여러 관직을 지내다가 45세에 병환으로 고향에서 여생을 마쳤습니다.

 

 

 

 

 

정자에서 내려와,

정사인정(舍人亭) 뒤편에는 우뚝 솟아있는 암봉이 있어 눈길이 갑니다.

 

 

 

 

계유정란(癸酉靖亂)이 일어나자,

단종을 향한 불사이군 (不事二君)의 충절로 이곳에 은거하면서,

후학들을 교육하였던 설암(雪巖) 김필(金㻶,1426∼1470의 생을 돌아볼수 있는 곳으로,

전남 장흥의 정자 문화재인 "사인정(舍人亭)" 입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