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의 남해대교 아래,

노량포구 동편에 위치하고 있는 남해 충렬사(忠烈祠)를 찾았습니다.

 

충렬사(忠烈祠)를 찾아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나면,

충렬사 관리소가 자리해 있고,

 

 

 

 

관리소 앞바다에는 거북선을 볼수 있어,

옛기록을 참고로해서 1980년에서 해군에서 재현 하였고,

1999년 지금의 자리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거북선의 관람료는 어른, 아이 단체 할것없이,

일괄적으로 500원이며,

 

 

 

 

실물 크기로 재현해 둔 거북선의 내부로 들어오면,

수장으로 보이는 갑옷입은 장군을 볼수 있으며,

 

 

 

 

내부에는 천자, 지자, 현자총통 등 을 비롯한 각종 무기류와 당시의 모습을 재현한 모형들이 갖춰져 있어,

역사 체험장으로서의 역할을 할수 있습니다.

 

 

 

거북선은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전투함이며,

세계 최초의 철갑선으로 정식 명칭은 "귀선(龜船)"으로,

 

 

 

조선 수군의 주력 전선인 판옥선(板屋船) 위에 거북 등 모양의 지붕과 갑판을 얹어 제작한 돌격 전함으로,

앞에는 용머리를 두어 화염을 뿜었고 옆에는 화포 구멍이 있어 대포를 장착 했으며,

철갑선으로서 세계적 선구인 거북선은 임진왜란 초반의 해전에서 돌격선의 위력을 남김없이 발휘 하였습니다.

 

 

 

 

거북선은 임진왜란 초반의 잇따른 해전에서,

함대의 선봉이 되어 돌격선의 위력을 남김없이 발휘 하였으나,

이순신의 투옥과 더불어, 또는 그의 전몰 이후에는 거북선의 실용이 저하 되는데,

 

 

 

 

임진왜란 후 거북선은 시대에 따라 당초의 제도를 상실하고 변모하면서 조선 말기까지 각 수영에 존재 하였으나,

가장 큰 관심의 대상이 된 거북선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에 의하여 창작, 구사된 거북선이라 할수 있으며,

 

 

 

 

거북선의 크기는 선체높이 6-6.5m, 선체길이 26-28m, 선체너비 9-10m로,

역사적 고증을 거쳐 복원 하였는데,

거북선에는 격군(格軍)과 사수를 합쳐 125명이 승선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거북선 내부 한쪽에는 장군복을 비치해두어,

이곳에서 기념사진을 남길수 있도록 해 두었습니다.

 

 

 

 

거북선은 원래 판옥선에서 개량한 것이기에,

1층 갑판에는 한국식 노를 설치하여 격군들이 노를 젓는 노역 공간이 있고,

2층은 각종 화포를 장착한 전투 공간으로 되어 있어,

 

 

 

 

남해의 충렬사를 찾으시면,

앞바다에 떠있는 거북선도 함께 돌아보시면 좋을듯 합니다.

 

 

 

 

충렬사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경상남도의 문화재자료 제266호로 지정된 "남해 척화비(南海 斥和碑)"가 있어,

척화비는 조선말 흥선대원군이 서양 세력의 침략을 경계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 세운것으로,

큰 글씨로 새겨진 글자는 "양이침범비전즉화주화매국(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니,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뜻이며,

 

 

 

 

"자암 김구 비(自庵 金絿 碑)"도 볼수 있어,

김구(金絿,1488~1534)는 인수체라는 필법으로 선조 4대 명필 중 한분으로 일컬어지는 대학자로,

조선 중종 시대의 문신으로 자는 대유, 호는 자암(自庵)과 삼일재, 시호는 문의, 본관은 광산(光山)이며,

조선의 4대 명필로 손꼽힌 사람으로, 김구가 인수방에 살았으므로 김구가 쓴 필체는 '인수체'라고 불렸는데,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투옥된 뒤 개령으로 유배되고 해, 임피 등으로 이배되었다가 1533년에 풀려났으며,

이후 고향인 예산에서 여생을 보내었으나 1534년, 풀려난 지 1년 만에 사망 하였는데,

유배때 남해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화전별곡"이라는 경기체가를 남겼습니다.

 

 

 

 

옆에는 빗돌 위쪽에 용머리 조각을 새긴 비가 있어,

"가선대부 삼도통제사 이태상비(嘉善大夫 三道統制使 李泰祥碑)"로,

이태상(李泰祥)은 조선 영조 4년(1728) 무신년 별시 병과에 급제한 무관으로,

진주병마사로 재직중인 영조 36년(1760)에 이곳 충렬사를 참배하고 청해루를 세웠으며,

이 비는 1882년 전 판관 문경일의 감독하에 건립된 것으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전공을 기리고 백성의 세금을 탕감해 준 선정을 칭송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적 제233호인 남해 충렬사(南海 忠烈祠)는 "노량 충렬사" 라고도 하며,

임진왜란이 끝나던 해 마지막 해전인 1598. 11. 19의 "노량해전((露梁海戰)"에서 순국한,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의 충의와 넋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으로,

 

 

 

 

외삼문을 들어서기 전 오른쪽에 한글로 쓴 비가 보이는데,

1948년에 위당 정인보가 쓴 "충열사비"라고 하며,

 

 

 

 

외삼문에는 "충렬사(忠烈祠)"의 현판이 올려져 있고,

 

 

안으로 들어서면 재실로 보이는 건물이 있어,

 

 

 

 

"청해루(​淸海樓)"는 순국하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5대손인 이태상(李泰祥)이,

진주병마사로 재직중인 영조 36년(1760)에 이곳 충렬사를 참배하고 청해루를 세웠다고 하며,

 

 

 

 

청해루의 쪽마루 위에는 많은 편액들이 올려져 있어,

 

 

 

 

박정희 전대통령 참배 기념글을 비롯한 많은 편액들이 있습니다.

 

 

 

 

재실로 보이는 청해루는,

제를 올리거나 준비하는 곳으로 헌관들이 사용하던 곳으로 여겨지며,

 

 

 

 

뒤쪽에는 낮은 계단과 함께 내삼문이 있어,

 

 

 

 

내삼문을 들어서자마자 제법 큰 비각이 있어,

"충무이공묘비(忠武李公廟碑)"로,

 

 

 

 

전각에는 "보천욕일(補天浴日)"의 현판이 있어,

1965년 당시 대통령 박정희(朴正熙)의 글씨라 하며,

 

 

 

 

비각 내에는,

"유명조선국삼도수군통제사 증시충무이공 묘비(有明朝鮮國三道水軍統制使贈諡忠武李公 廟碑)"라는 비는,

1660년에 숭록대부 의정부 우찬성 송시열이 짓고, 정헌대부 의정부 좌참찬 송준길이 썻으며,

비문에는 이순신 장군의 전공과 나라와 백성에게 끼친 덕을 칭송한 글이 있습니다.

 

 

 

 

안쪽에는 아담한 규모의 사당인 충렬사(忠烈祠)가 자리하고 있어,

이곳 충렬사는 1663년(현종 4)에 충무 충렬사와 함께 "충렬사"라는 사액(賜額)을 받았으며,

1965년에 당시 대통령 박정희(朴正熙)가 "충렬사(忠烈祠)"의 현판을 다시 썼고,

 

 

 

 

당시 노량은 전라남도 여수를 떠나 충무로 가려면 거쳐야 하는 연안수로(沿岸水路)의 요충지 였으며.

1598년(선조 31) 이순신이 관음포 앞바다에서 순국하자 처음에는 이 곳에 유구(遺軀)를 안치 하였는데,

이순신의 유구는 이 곳에 가장(假葬)되었다가 이듬해인 1599년 2월 11일 충청남도 아산으로 이장을 했고,

이후 가분묘(假墳墓)만 남게 되었는데,

 

 

 

 

노량해전에서 순국한 충무공의 시신은 이락사에 최초로 안치되었다가,

그해 이곳 남해 충렬사로 이장, 안치 되었는데,

시신을 충청남도 아산으로 운구하기 전에 3개월간 이곳 가묘자리에 안치 했다고 하며,

1599년 2월 11일 유해가 충렬사에서 군영지인 전라도 고금도를 거쳐 아산 현충사로 운구되어 안장 되었습니다.

 

 

 

 

충렬사 건립은 충무공의 순국을 슬프게 느낀 남해사람 김여빈과 고승후가,

충무공 사당 건립을 주장하면서 시작 되었는데,

두 사람은 1633년(인조 10)에 한 칸짜리 초가 사당을 건립하고 위패를 봉안하여 처음으로 제사를 지냈는데,

이것이 충렬사의 시작이며,

남해현령 이정건은 이 사당 앞에 충민공비(忠愍公碑)를 세웠고,

 

 

 

 

충렬사에는 1604년에서야

선무공신 1등으로 서훈되고 덕풍부원군, 좌의정의 직위가 내려지고,

1613년에는 영의정으로 책봉된 충무공의 구국충정의 얼이 서려 있는 곳으로,

조정에서는 1643년에 이순신에게 "충무공"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1658년(효종 9)에 초사를 헐고 비로소 사당을 건립하여 봄ㆍ가을로 제향을 지냈습니다.

 

 

 

 

1726년에는 이곳에 노량서원을 세웠는데,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서원은 철거 되었다가,

일제강점기인 1922년 향사 윤기섭과 고준홍 등이 모여 조직한 "보존회"의 기금으로 사우를 건립 했으며,

이들이 사재를 털어 모은 자금으로 사당을 새로 짓고 제사를 지내게 되어 오다가,

1973년 6월 사적으로 지정되면서 보수, 정화 되었습니다.

 

 

 

 

"노량 충렬사" 라고도 불리며,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의 충의와 넋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며,

그의 행적과 나라를 위한 생을 돌아 볼수 있으며,

복원된 거북선이 있어 함께 돌아 볼수 있는 곳으로,

경남 남해의 "충렬사(南海 忠烈祠)"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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