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3호 이며,

경상남도 진주시 대평면 대평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자인 "고산정(孤山亭)"을 찾았습니다.

 

고산정(孤山亭)은 조선중기의 학자 학포(學圃) 정훤(鄭暄)이 숨어 지내며 남은 삶을 보내던 곳으로,

정훤은 광해군의 포악한 정치에 휩쓸리기 싫어서 이곳에 내려와 1866년에 정자를 지어 고산정이라 불렀는데,

건물은 앞면 4칸·옆면 2칸의 규모로,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며,

앞뒤에 퇴칸을 두었고 좌우 양쪽에 대청을 두었다고,

뒤를 제외한 정면과 좌우3면에 계자난간(鷄子欄干)을 둘렀습니다.

 

고산정(孤山亭)은 진주지역에 전통있는 조선시대 정자이며 서원이기도 한데,

이 서원은 조선중기의 학자 학포(學圃) 정훤(鄭暄)이 말년까지 매우 외롭게 은거하며 여생을 마쳤던 곳으로,

바닥을 높게 띄워 올리고 5량 구조 팔작지붕을 한 소로수장(小櫨修粧) 집이며,

 

학포(學圃) 정훤(鄭暄)은 1588년(선조 16년)에 합천 종간리의 영일 정씨 집안에서 태어나,

정몽주의 후손임을 자긍심으로 삼았으며 호를 "학포"라 지은 것도 포은을 배우고 따르겠다는 의미라 하며,

35세 때 선대 때부터 살아온 단성으로 이주하여 10년 정도 살다가,

44세 때 진주 고산(孤山)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고 "학포재"를 지었는데,

지금의 명칭이 "고산정"이라 한 것은 이곳의 그 당시 지명이 고산이었기 때문이며,

 

학포의 뛰어난 문장력과 덕행은 전국에 널리 알려져 53세(인조) 때 활인서 별제를 제수하였으나 사퇴하였고,

56세 때 조정에서 다시 영산현감을 제수 했으나,

학포는 분수에 넘치는 은혜라고 생각하여 이를 사양하고 돌아왔다고 하며,

학포는 이처럼 명예를 탐하지 않았으며 부귀영화를 추구하지 않으면서,

요양차 학포재를 찾아온 친구를 죽을 때까지 돌보았던 우정이 깊은 인물였으며,

인근의 문인들과 교류하기를 좋아하면서 학문에 정진하다가 고산정에서 6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학포(學圃) 정훤(鄭暄)의 삶을 돌아 볼수있는곳으로,

경남 진주의 문화재인, "고산정(孤山亭)"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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