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 있는,

"산청 목면시배 유지(山淸 木棉始培 遺址)"를 찾았습니다.

 

사적 제108호로 지정된 '산청 목면시배 유지(山淸 木棉始培 遺址)"는,

고려 후기에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면화를 재배한 곳으로,

 

 

 

 

목면시배 유지(木棉始培 遺址)를 찾으면 2기의 비석이 나란이 서있어,

 

 

 

 

문익점의 면화시배지 임을 알려주는,

"삼우당선생면화시배사적비(三憂堂先生棉花始培事蹟碑)"가 세워져 있으며,

 

 

 

 

세운지 오래지 않아 보이는 비석으로,

"고려국 중현대부좌사의대부우문관제학 증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 시충선봉강성군 부민후

(高麗國 中顯大夫左司議大夫右文館提學 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 諡忠宣封江城君 富民侯)"

"삼우당 문익점선생 유허비(三憂堂 文益漸先生 遺墟碑)"가 긴 비명으로 서있습니다.

 

 

 

 

이곳에는 1997년 6월에 건립된 "목면시배 유지 전시관"이 있어,

반드시 들러 보아야 할곳이며,

 

 

 

 

예전에는 유료 였으나,

이제는 입장료가 무료로 바뀌었습니다.

 

 

 

 

전시관은 제1전시관과 제2전시관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제1전시관은 의류의 역사와 세계 목화 생산지,

그리고 목화의 성장과정이 모형과 그림 사진으로 전시되어 있어,

 

 

 

 

전시관에서 가장 눈에 들어 오는것은,

"무명베 짜기"로 솜에서 무명베가 되는 전과정을 재현둔 곳이 있어,

 

 

 

 

목화꽃에서 목화씨와 솜을 분리하는 "씨아기" 작업으로,

목화를 재배, 수확하여 건조한 솜을 먼저 씨아에 넣어 씨를 빼 내는것으로 시작하여,

 

 

 

씨에서 분리한 솜을 뭉게뭉게 부풀게 하는 "활타기 작업"으로,

솜을 부풀려 일정하고 부드럽게 하는 과정이며 활끝의 진동에 따라 솜이 뭉게 뭉게 부푼다고 하며,

남아있는 씨앗껍질을 깨끗이 떨어뜨리는 작업 입니다.

 

 

 

 

다음 공정은 솜에서 실을 뽑아내기 전 짧은 섬유가 서로 엉키게 하는 "고치말기" 작업으로,

말판 위에 5×20㎝ 넓이의 솜을 펴놓고,

수수깡 또는 참대의 말대를 밖으로 내밀어 비비면서 고치말기를 한다고 하며,

 

 

 

 

둥글게 만 고치솜에서 물레를 이용 실을 뽑는 "실뽑기" 과정으로,

"실잣기" 라고도 하며 물레로 실을 뽑아내는 과정이며,

물레바퀴와 물레고동이 연결되게 물렛줄을 매어놓고,

물레 앞에 앉아 왼손에 고치를 잡고 오른손으로 물레손을 잡아 물레를 회전시켜서 실을 뽑는데,

이 과정의 손놀림의 섬세도에 의하여 실의 가늘기와 균제도가 좌우 된다고 하며,

뽑은 실은 가락에 감는데 가락옷에 감긴 실뭉치를 "뎅이"라고 하고,

한 달림의 고치로 열 개의 뎅이를 만듭니다.

 

 

 

 

베메기 하기 전 날실이 될 실들을 가지런히 모으는 "무명 날기"로,

실의 굵기에 의하여 정하여진 무명의 승수(升數)와 한필의 길이에 맞추어서 무명날기를 하는데,

무명날기는 10개의 실끝을 10개의 구멍이 뚫린 고무래구멍에 통과시켜 한데 모아 날틀과 걸틀을 사용하여 날며,

 

 

 

 

이번작업은 베 찌기를 할 때 실의 강도를 높이고 엉킹을 방지하는 "베매기"로,

"무명매기" 라고도 하며 무명날기가 끝난 날실을 승수에 맞는 바디에 끼워 고끝을 도투마리에 매는데,

도투마리는 들말에 걸어 고정시키고 날실의 다른 한끝은 끄싱게에 매고 날실다발을 끄싱게에 감은 다음,

도투마리와 끄싱게 사이를 일정하게 놓고 날실을 펴서 일정한 장력으로 고정 시키는데,

도투마리 쪽에 왕겨불을 피워 놓고 날실에 좁쌀풀을 풀솔로 먹여 말이고,

사침대로 경사가 서로 붙지 않게 날실의 우수와 기수를 분리시켜 말리며, 마른 것은 도투마리에 감는습니다.

이 과정을 반복하여 날실의 도투마리에 다 감기면 베매기가 끝나게 되며,

 

 

 

 

베매기 과정이 끝난 실을 베틀에 올려놓고 옷감을 만드는 "베짜기" 작업으로,

옛날의 무명은 너비가 36㎝ 정도였으나 점점 줄어 오늘날에는 32㎝ 정도가 되었으며,

짜여진 무명은 빨고 다시 풀하고 만져 다려서 사용을 합니다.

 

 

 

 

목화솜에서 시작하여 면포로도 불리었던,

무명베를 만드는 과정이 설명과 함께 재현을 해두어 살펴 보기에 편하였고,

 

 

 

 

고려말에 들어와 조선시대에 널리 퍼진 목화솜으로 만드는 무명베 또는 면포는,

기존의 삼베나 모시로는 해결할수 없었던 겨울철에 솜을 넣은 옷 등을 만들기도 하여,

한국의 전통직물로서 의복, 침구, 기타 생활용품에 가장 많이 쓰였습니다.

 

 

 

 

제2전시관은 생활 속의 목화로,

아동 또는 청소년들이 생활에서의 목화 쓰임을 이해할 수 있는곳과,

애니메이션 영상실로 구성되어 있으며,

 

 

 

 

현대에 와서도 꾸준히 쓰이고 있는,

침구류와 생활한복 등에 관한 전시도 하고 있습니다.

 

 

 

 

전시관의 안쪽에는 문익점의 업적을 기리는 "부민각(富民閣)"이 있어,

정면 7칸 측면 두칸반의 팔작 지붕으로 규모가 있는 건물로,

 

 

 

 

목화가 들어와 백성들의 의생활이 개선되고,

면포의 생산으로 가내수공업이 시작되어 백성들의 수익이 나고 국가 경제가 나아졌기에,

세종대왕은 목화를 들여온 문익점의 공이 지극히 크고 높음을 기리어,

백성을 부유하게 만든 이라는 "부민후"로 추봉(사후에 내리는 관직) 하였고,

이 뜻을 오래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집을 짓고 "부민각"이라 이름 하였다고 하며,

 

 

 

 

공민왕 12년(1363) 문익점은 중국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올 때,

밭을 지키던 노인이 말리는 것을 무릅쓰고 목화 몇 송이를 따서 그 씨앗을 붓통에 넣어가지고 왔으며,

장인 정천익과 함께 시험재배를 하였는데,

처음에는 재배기술을 몰라 한 그루만을 겨우 살릴 수 있었지만,

3년간의 노력 끝에 드디어 성공하여 전국에 목화재배를 널리 퍼지게 하였습니다.

 

 

 

 

부민각의 마루 위에는,

남의 지은 시의 운자를 따서 지은시인 차운시(次韻詩)로,

율곡(栗谷) 이이(李珥,1536~1584)가 남긴 "부민각차운(富民閣次韻)"의 시판(詩板)이 있고,

 

 

 

 

그 외, "부민각상량문(富民閣上樑文)"의 기문(記文)이 있으며,

 

 

 

 

부민각의 내력을 알려주는 기문(記文)인 "부민각기(富民閣記)"의 편액이 있습니다.

 

 

 

 

문익점(文益漸, 1331~1400)의 본관은 남평(南平)이며,

자는 일신(日新), 호는 삼우당(三憂堂)으로 강성현(江城縣: 지금의 경상남도 산청) 출생으로,

1360년(공민왕 9) 문과에 급제하여 김해부사록金海府司錄)과 순유박사(諄諭博士) 등을 지냈고,

1363년 사간원 좌정언(司諫院左正言)으로 있을 때 서장관이 되어,

계품사(啓禀使) 이공수(李公遂)를 따라 원나라에 갔는데,

때마침 원나라에서 벼슬을 하고 있던 고려 사람 최유(崔濡)가,

원나라에 와 있던 충선왕의 셋째 아들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옹립하고,

공민왕을 몰아내려 하고 있었는데,

실제로 원나라는 덕흥군을 고려왕으로 봉 하였고,

최유는 원나라의 군사 1만 명을 얻어 요동(遼東)까지 진군해 왔으나,

1364년 1월 최영(崔瑩) 등에게 패하였으며,

 

 

 

 

"고려사"열전 문익점전에 의하면,

정치적 격동기에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문익점은,

원에 체류한 채 덕흥군 편에 붙었으나 덕흥군이 패배하자 고려로 귀국 하였는데,

문익점이 실제로 덕흥군을 지지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다소 논란이 있었습니다.


원나라에서 귀국할 때 그는 종자(從者) 김룡(金龍)을 시켜 밭을 지키던 노인이 막는 것을 무릅쓰고,

목화 몇 송이를 따서 그 종자를 붓대 속에 넣어 가지고 돌아와,

장인 정천익(鄭天益)에게 나누어 주고 함께 시험 재배를 하게 되었는데,

이처럼 문익점은 정천익과 더불어 목화 종자의 도입하여 시험재배에 성공하여,

종자의 전국적 보급하여 목화섬유를 이용한 의료제조 등 그 공로는 참으로 컸습니다.


공민왕이 죽고 우왕이 즉위하자 그는 곧 전의주부(典儀主簿)가 되었고,

창왕 때는 좌사의(左司議)로 왕 앞에서 강론을 하기도 하였는데,

이때 이준(李遵) 등이 사전(私田)을 다시 세우도록 함은 옳지 않다고 상소한 바 있는데,

문익점은 병을 핑계로 이에 가담하지 않았는데,

문익점은 이색(李穡)·이림(李琳)·우현보(禹玄寶) 등과 더불어,

사전 혁파를 비롯한 이성계(李成桂) 일파의 전제개혁을 반대했던 것인데,

문익점은 이 사건으로 조준(趙浚)의 탄핵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났습니다.

 

 

 

 

문익점(文益漸)은 사후 조선 태종 때 참지정부사(參知政府事) 강성군(江城君)에 추증(追贈) 되었고,

1440년(세종 22)에 영의정과 부민후(富民侯)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선공(忠宣公)이며,

그의 고향인 단성의 도천서원(道川書院)과 전라남도 장흥의 월천사우(月川祠宇)에 사당이 세워 졌습니다.

 

 

 

 

안쪽에는 담장을 두른 비각이 있어,

고려 우왕이 하사한 "효자리(孝子里)"의 비석을 보관한 비각으로,

 

 

 

 

문익점이 어머니 상을 당하여,

부모가 돌아가시면 그 서쪽에 여막을 짓고 상주가 3년 동안 사는 일인 "시묘" 중에,

왜구들이 침입하여 마을을 불태우고 사람들을 해쳐 마을 사람들은 모두 산속으로 피난 하였지만,

그는 뜻을 지켜 변함없이 여막을 지키고 움직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를 본 왜구들은 효성에 감복하여,

"효자를 해치지 말라" 라는 글을 쓴 말뚝을 세워놓고 물러갔고,

이 사실을 알게된 고려 우왕은 그 마을을 "효자리(孝子里)"라 정표했다고 하며,

이 비는 원래 배양마을 입구 길가에 있었는데,

목화밭이 국가사적으로 지정되자 지금의 자리로 이건 하였습니다.

 

 

 

 

유적지의 한쪽에는 목화밭이 있어,

1363년(고려 공민왕 12)에 문익점이 이곳에서 처음으로 목화를 재배 하였다는 곳으로,

1965년 당시 목화씨를 뿌렸던 300여 평의 밭을 사적지로 지정 하였고,

문익점이 태어난 곳인 배양마을은 지금까지도 목화재배의 역사를 간직해오고 있으며,

이곳에서는 지금도 문익점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옛터에 밭을 일구어 해마다 면화를 재배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면화를 재배한 곳이며,

목화를 가져온 문익점(文益漸)의 생을 돌아볼수 있고,

면포의 생산과정을 살펴볼수 있는 곳으로,

경남 산청의 유적지인 "목면시배 유지(木棉始培 遺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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