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사리에 있는,

조선전기의 학자 조식과 관련안 유적인 "조식 유적(曺植遺跡) "을 찾았습니다.

 

조식 유적(曺植遺跡)은 사적 제30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조식의 유적은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원리 유적과 시천면 사리 유적 등 두 곳에 나뉘어 있는데,

 

 

 

 

"원리 유적"은 최영경(崔永慶)·하항(河沆) 등의 제자들이 스승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1576년(선조 9) 창건한 덕천서원(德川書院)이 있는 곳이며,

"사리 유적"은 조식이 후학을 가르치며 학문을 정진하던 산천재(山天齋)와 별묘(別廟)및,

조식의 묘소, 신도비 및 재실 등이 남아 있는 곳으로,

이번에는 사리유적 위주로 돌아 보기로 합니다.

 

 

 

 

사리의 남명(南冥) 조식(曹植)유적을 찾으면,

주차시설과 함께 "남명기념관(南冥記念館)"이 있어,

 

 

 

 

앞에는 커다란 비석이 있어,

비의 내용을 간략하게나마 설명해둔 또다른 비가 같이있어 이해에 도움이 되고,

 

 

 

 

남명(南冥) 조식(曹植)과 관련한 비석이 여러기 세워져 있고,

 

 

 

"남명조식선생지상(南冥曹植先生之像)"이라 명명 되어있는,

동상이 세워져 있으며,

 

 

 

 

2003년에 개관 했다는 남명기념관(南冥記念館)부터 찾아 봅니다.

 

 

 

 

남명기념관(南冥記念館)은 남명(南冥)의 학덕을 기리고 유물을 보존하기 위해,

남명(南冥) 탄신일 500주년에 설립 하였으며,

 

 

 

 

남명과 관련된 유물과 서책을 비롯한 유품들을 전시하고 있어,

 

 

 

 

"뇌룡정(雷龍亭)"의 모형이 있어,

뇌룡정(雷龍亭)은 남명 조식이 48세에 합천에 지은 정자로,

학문을 연구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친 곳이며,

 

 

 

 

남명(南冥)이 후학을 가르치는 모습도 모형으로 재현해 두었습니다.

 

 

 

 

전시관을 돌아보다 보면,

남명(南冥)과 관련한 유물등과 함께 모형도 볼수있어,

 

 

 

 

"남명 사적지"의 전경을 모형으로 조성해둔 모습도 들어와,

이곳에서 찾아 보아야 할곳도 미리 볼수 있습니다.

 

 

 

 

조식(曹植, 1501~1572)의 본관은 창녕(昌寧), 호는 남명(南冥)이며,

1501년(연산7년)에 경상도 삼가현에서 태어나,

벼슬길에 나아간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이주 하였다가,

그 후 의령, 김해, 삼가 등지에서 거주 하였으며,

성리학의 대가로 일생동안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을 닦고 제자를 기르며 살았는데,

 

 

 

 

퇴계 이황(李滉), 성수침(成守琛)과 교유하였으며,

남명은 영남의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룰 만큼 호남 학파의 수장으로,

평생 벼슬에 나가지 않았지만 죽어서 사간원(司諫院)과 대사간(大司諫)에 이어 영의정에 추서 되었으며,

그의 문하에서 정인홍(鄭仁弘), 곽재우(郭再祐), 김우옹(金宇顒), 정구,(鄭逑) 등 수백 명의 인물이 배출되었고,

이들은 대부분 북인(北人) 세력을 형성 하였습니다.

 

 

 

 

남명기념관 안쪽에는 또다른 건물이 있어,

 

 

 

 

담장을 두른 건물과 앞에 있는 두개의 건물이 있어,

 

 

 

 

이곳은 "여재실(如在室)"의 제사를 준비하는 곳인 재실로 보이며,

 

 

 

 

담장을 두르고 있는 건물의 일각문을 들어서면,

 

 

 

 

3칸 규모의 전퇴가 있는 사당인 "여재실(如在室)"로,

 

 

 

가묘(家廟)인 여재실(如在室)에는,

남명과 정경부인, 숙부인의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낮은 동산 아래에,

묘소 근처에 자리한 여재실(如在室)의 전경을 담아 봅니다.

 

 

 

 

한쪽에는 담장을 두른 또하나의 공간이 있어,

 

 

 

 

조식이 학문을 닦고 연구하던 "산천재(山天齋)"이며,

 

 

 

 

산천재(山天齋) 앞에는 남명 조식(曺植, 1501~1572)이,

61세이던 명종 16년(1561)에 손수 심은 매화나무인 "남명매(南冥梅)"가 있어,

남명(南冥)은 뜰에 매화나무를 손수 심고 해마다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이 매화나무에 애정을 쏟았다고 하며,

산천재의 뜰에 있는 이 남명매는 산천재를 건립할 당시에 심었다면 440여년의 연륜을 헤아릴 정도이며,

 

 

 

 

남명매(南冥梅)는,

밑에서부터 크게 세 갈래로 갈라진 줄기는 뒤틀려서 위로 뻗어 올랐는데,

윗부분의 가지는 일부 말라 죽었으나 새로운 가지가 섬세하게 자라나 비교적 건강한 편이며,

해마다 3월 말이면 연한 분홍빛이 도는 반겹 꽃이 가득히 피는데,

그 향기가 지극히 맑다고 합니다.

 

 

 

 

산천재 옆에는 건물을 관리하는곳인,

"고직사(庫直舍)"로 보이는 건물이 자리해 있고,

 

 

 

 

산천재(山天齋)는 조식이 학문을 닦고 연구하던 곳으로,

61세때 처음 이곳으로 옮겨오던 명종 16년(1561)에 세웠고,

1584년(선조 17)에 화재로 소실 되었다가 1818년(순조 18)에 다시 세워 졌으며,

산천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건물로 구들과 마루가 높은 것이 특징으로,

 

 

 

 

산천재(山天齋)에는 글씨체가 다른 2기의 현판이 있어,

 

 

 

 

"산천(山天)" 이란 말은 주역 "대축괘(大畜卦)"의 “강건하고 독실하게 수양해,

안으로 덕을 쌓아 밖으로 빛을 드러내서 날마다 그 덕을 새롭게 한다"는 말에서 뜻을 취한 것으로,

강건한 기상과 독실한 자세로 세상에 나아가지 않고 깊숙이 묻혀 심성을 도야하고,

올바른 수양을 하는 것이 학자의 길임을 천명한 것이라 합니다.

 

 

 

 

산천재의 내부가 궁굼 하였으나,

문이 닫혀 있어 안을 볼수는 없었으며,

 

 

 

 

산천재(山天齋)는 남명 조식이 생의 후반부를 보내며 살았던 곳으로,

그는 61세 때 산청 지역에 정착하여 서북쪽에 지리산 천왕봉(智異山 天王峯)이 바라보이는 곳에,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후학을 양성하며 노년을 보냈습니다.

 

 

 

 

산천재의 고직사 안쪽에는 "장판각(藏板閣)"이 있어,

경남유형문화재164호인 남명의 문집 목판을 보관하는곳이 있습니다.

 

 

 

실천유학의 대가이며,

성리학의 대가로 평생을 관직에 몸담지 않았으나,

사후에 영의정에 추서될 정도로 학식이 높았으며,

많은 이름난 후학양성에 힘써서 호남 학파의 수장으로 오른,

남명(南冥) 조식(曹植)의 생을 돌아 볼수있는 곳으로,

경남 산청의 "조식 유적(曺植遺跡)"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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