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영양군 입암면 신구리에 있는,

약산당(約山堂)과 신구리 삼층석탑(新邱里 三層石塔)을 찾았습니다.

 

약산당(約山堂)과 신구리 삼층석탑(新邱里 三層石塔)은 서로 떨어져 있지 않고,

바로 곁에 있어 함께 돌아 볼만 하며,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81호인 "약산당(約山堂)"은,

장례원(掌隷院) 판결사(判決事) 조광의(趙光義,1543∼1608)가 학문을 연구하던 곳으로,

조선 인조(仁祖) 때 세운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문이 닫혀있어 들어가지는 못하고,

담장을 따라서 돌면서 들여다 볼수밖에 없습니다.

 

 

 

 

약산당은 정면 3칸에 측면 2칸 규모의 건물로,

원기둥과 사각기둥을 사용한 팔작지붕 목조건물이며,

건물의 안쪽 구조가 매우 섬세하며 조선 중기 건축 양식을 보여 주는 건축물로 알려져 있으며,

 

 

 

 

정면의 처마 아래에는 "지산서당(芝山書堂)"의 현판이 올려져 있고,

 

 

 

 

조선 중기 건축 양식이 남아 있는 "약산당"이지만,

들어기지 못하여 담장 너머로 기웃거리며 보아야 해서 아쉽기만 합니다.

 

 

 

 

약산당 (藥山堂)의 주인 조광의(趙光義,1543∼160)는,

한양 조씨 증참판(贈?判) 조량(趙凉)의 둘째 아들로 1543년(中宗 38) 원당리(元塘里)에서 태어 났으며,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께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광인(光人), 광의(光義)형제의 우애는 소문이 날 정도로 독실하였고,

풍모가 엄정하고 국향이 넓고 학식이 일찍이 깨쳐 졌었으며,

젊을 적에 음사(蔭仕)로 수의부위(修義副慰)를 지나 분순위(奮順位)와 적순위(迪順位)를 거쳐,

1582년에 내금위(內禁慰)로 옮기니 옛날 궁내삼처(宮內三處)는 문벌과 재예(才藝)를 봄으로써 피선된 것이며,

1577년(宣祖 10) 청계 김진(淸溪 金璡)과 더불어 영산서당(英山書堂)을 창설할 때에 형제가 함께 참가하였고,

1592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나라에 군량이 넉넉지 못함을 걱정하여,

자진(自進)해서 다량(多量)의 곡물(穀物)을 보급했으며,

1593년 군자감판관(軍資監判官)을 제수(除授)하더니 통전대부에 오른고 장악원판결사(掌樂院判決事)를 제수하였고,

만년(晩年)에는 자택에 약산당(約山堂)이라 현판(懸板)을 붙이고 거처(居處)하여,

빈객과 더불어 잔을 들고 시를 읊으며 유유자적(悠悠自適)하다가 1608년(宣祖 41) 66세로 별세 하였습니다.

 

 

 

 

약산당 옆에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84호인,

"영양 신구리 삼층석탑(英陽 新邱里 三層石塔)"을 찾을수 있어,

 

 

 

 

신구리 삼층석탑(新邱里 三層石塔)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석탑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옥신괴임은 보이지 않으나 옥개(屋蓋)의 층단받침이 4단으로 되어 있는 모습을 볼수 있으며,

1999년 석탑을 잘 보존하기 위해 해체 복원하였습니다.

 

 

 

 

삼층석탑 앞에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는 석불좌상을 볼수 있어,

항마촉지인은 좌선할 때의 손 모양에서 오른손을 풀어서 오른쪽 무릎에 얹고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는 손 모양으로,

이는 석가모니가 수행을 방해하는 모든 악마를 항복시키고,

성취한 정각(正覺)을 지신(地神)이 증명하였음을 상징 한다고 하며,

석불은 훼손이 심한데다 보수의 흔적마저 보입니다.

 

 

 

 

높이는 2.55m의 석탑은,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소박한 모습이며,

3층 옥신과 상층기단 면석 1매, 그리고 상륜부(相輪部)의 대부분을 잃었으나,

다른 부분은 원형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경북 영양군 입암면 신구리에서 찾은 문화재로,

조광의(趙光義,1543∼1608)의 생을 뒤돌아볼수 있고,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석탑을 함께 볼수 있는곳으로,

영양의 문화재인 "약산당(約山堂)"과 "신구리 삼층석탑(新邱里 三層石塔)"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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