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광덕리에 있는,

조선 중기의 정사인 "안동 하회마을 겸암정사(安東 河回, 謙菴精舍)"를 찾았습니다.

 

"안동 하회마을 겸암정사(安東 河回, 謙菴精舍)"는,

국가민속문화재 제8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하회마을 에서는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있어 바로 갈수는 없으며,

도보로는 하회마을에서 나룻배를 타고 건너 "옥연정사"를 거쳐서 찾거나,

차량으로 이동을 하여 풍천면 소재지를 거쳐서 오는 방법이 있습니다.

 

 

 

 

겸암정사(謙菴精舍)는 유성룡(柳成龍)의 맏형인 유운룡(柳雲龍)이 1564년(명종 19)에 지었다고 하며,

위치는 하회마을 북쪽 화천(花川)을 끼고 우뚝 솟은 부용대(芙蓉臺)의 서쪽,

옥연정사(玉淵精舍) 맞은편에 자리 잡고 있으며,

 

 

 

 

안채 건물에서 유일하게 담 밖에서 보이는 누마루에는,

"겸암정강수계(謙菴亭講修契)"의 현판이 있어,

"도리를 강론하고 덕을 닦는다"는 강도수덕(講道修德)

"믿음을 강론하고 의리를 닦는다"는 강신수의(講信修義)

"친족의 도리를 강론하고 우의를 닦는다"는 강척수의(講戚修誼)를 볼수 있으며,

 

 

 

 

정사 앞의 나무위에는 딱다구리 한마리가,

호젓한 이곳에 찾은 이방인은 신경 쓰이지 않는지,

자기 일 에만 열중인 모습이고,

 

 

 

 

강가 전면에 자리한 정사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크기로 "一"자형 평면을 이루면서 자리 잡고 있으며,

뒤쪽에는 살림채가 "ㄱ"자형 평면을 이루면서 자리 잡고 있는데,

정사는 막돌초석 위에 두리기둥을 세워 굴도리로 결구 하였는데,

기둥 윗몸에 익공모양의 부재를 내었으나 주두가 없는 홑처마의 팔작지붕이며,

 

 

 

 

겸암정(謙菴亭)의 현판으로,

류운룡의 스승인 퇴계 이황(1501~1507의 글씨라 하며,

 

 

 

 

정사의 몸체는 누(樓)의 형식을 갖추어서,

동쪽 면 누마루 밑으로 정사 마당에 출입할 수 있는데,

정사의 온돌방과 대청에의 출입은 살림채와의 사이에 세운 대문을 들어가,

정사 몸체의 대청 뒷벽에 단 문을 통하여만 가능하며,

 

 

 

 

오른쪽 방의 문위에는 "조용히 갈고 닦는 곳" 이라는 의미의 "각수재(閣修齋)"의 편액이 있고,

 

 

 

 

각수재(閣修齋)라 명명되어 있는 방을 들여다 봅니다.

 

 

 

 

정사는 중앙에 우물 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방을 둔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의 구조로,

마루 오른쪽에는 "각수재"를 두고 왼쪽의 방을 강습재라 하였으며,

 

 

 

 

마루 위에는 여려 편액들이 올려져 있어,

 

 

 

 

"겸암정사(謙嵓精舍)" 현판으로 명필 원진해(元振海)가 9살 때 쓴 것을,

양진당의 6대손 류영이 찾아 걸었다고 하며,

 

 

 

 

겸암정사의 내력을 알수 있는 기문(記文)이 있고,

 

 

 

 

퇴계 이황과 권호문 그리고 서애 유성용이 남긴 시판(詩板)이 있습니다.

 

 

 

 

각수재 맞은 편에도 방이 있어,

 

 

 

방문 위에는 "강습재(講習齋)"의 편이 있어,

강습재는 "강설하고 익히는 곳" 이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강습재라 명명 되어있는 방도 들여다 보면,

전반적으로 관리가 잘 되어 있는것을 알수 있습니다.

 

 

 

 

정사의 마루에서 앞을 내어다 보면,

강 건너의 하회마을이 손에 잡힐듯 들어오고,

부용대 아랫쪽의 강물과 함께 건너편의 만송정 숲의 일부도 들어와,

겸암정사가 풍광 뛰어난곳에 자리하고 있슴을 알게 됩니다.

 

 

 

 

류성룡의 시(詩) 39쪽에서,

보출하상 선도입암 숙겸암정사(步出河上 船渡立巖 宿謙巖精舍),

"걸어서 강가로 나와 배를 타고 입암으로 건너가, 겸암정사에서 묵다"를 가져와 봅니다.

曳杖行沙岸(예장행사안) 지팡이 짚고 걸어서 모래언덕에 나와,

呼船過水村(호선과수촌) 배를 불러 타고 강 건너 마을로 갔네.

薄雲巖際宿(백운암제숙) 엷은 구름 휘감긴 암벽 곁에 묵는데,

孤月浪中翻(고월낭중번) 외로운 달이 물결 속에서 일렁이네,

煙樹千家靜(연수천가정) 안개 깔린 수목 속에 온 동네가 조용한데,

秋蟲四壁喧(추충사벽훤) 가을벌레 울음소리 사방에서 요란하네,

獨來無晤語(독래무오어) 홀로 와서 말 건넬 사람 없으니,

愁思滿江軒(수사만강헌) 가을시름이 강변 난간에 가득하네.

 

 

 

 

 

정사의 뒤편에는 안채가 자리하고 있어,

 

 

 

 

정사 몸체 뒤쪽은 대청에 여닫이문만 두고,

모두 벽체를 쳐서 살림채가 들여다보이지 않게 하였는데,

 

 

 

 

살림채는 두리기둥 위에 주두를 얹고,

익공모양의 부재를 내어 퇴보를 받치며,

창방 위에 소로를 놓아 도리 밑 장여를 받치고 있는 홑처마의 팔작지붕으로,

서쪽 끝에 1칸 반 크기의 부엌, 다음 2칸×1칸의 온돌방을 두고,

다시 2칸×2칸의 대청을 두었는데 전면에는 반 칸 폭의 툇마루를 달았으며,

전형적인 영남 북부지방의 가옥구조를 볼수 있으며,

 

 

 

 

대청 앞에는 "허수료(虛受寮)"의 편액이 있어,

허수료는 "돈을받지않고 가르쳐준다"는 의미이며,

겸암정사는 일반적인 정자와는 달리 서당의 구실도 했다고 합니다.

 

 

 

 

겸암정사를 세운 유운룡(柳雲龍, 1539~1601)의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응현(應見), 호는 겸암(謙菴)이며,

유성룡(柳成龍)의 형으로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 하였고,

어릴 때부터 총명해 모든 경사(經史)를 통독함으로써 사문의 촉망을 받았으며,

1572년(선조 5) 친명(親命)으로 음사(蔭仕)를 받아 전함사별좌(典艦司別坐)가 된 뒤,

이듬 해 의금부도사로 추배되었으나 사퇴 하였고,

 

 

 

 

다시 사포서별제가 된 뒤 금부예천(禁府例遷)·풍저창직장(豊儲倉直長) 등을 역임하면서,

청렴하고 철저한 임무 수행 능력을 인정받아 내자시주부로 승진해, 진보현감 등을 지냈으나,

어머니의 신병 때문에 사퇴하였다가 다시 인동현감으로 추배 되었고,

길재(吉再)의 묘역을 정화하고 사우(祠宇)와 서원을 지어 유학의 진흥책을 도모해,

그를 칭송하는 송덕비가 세워지기도 하였으며,

광흥창주부·한성부판관·평시서령·사복시첨정 등을 두루 역임 하였습니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생인 영의정 유성룡이 선조에게 유운룡을 해직시켜 어머니를 구출하도록 읍소하니,

이 건의가 받아들여져 유운룡은 어머니를 비롯한 온 가족이 모두 무사하도록 하여 모두가 그의 효심을 칭찬 하였으며,

 

 

 

 

그 해 가을에 풍기가군수(豊基假郡守)가 되었으며,

전란의 어려움에도 조공을 평시와 같이 함으로써 얼마 뒤 다시 정군수(正郡守)가 되어,

왜적들의 위협을 받고 있는 백성들의 생업을 보호하는 데 힘썼으며,

그 뒤 원주목사로 승진되었으나 어버이의 노쇠함을 핑계하여 사퇴 하였습니다.

 

 

 

 

또한 군국기무(軍國機務)에 관한 소를 올려 선조로부터 인정을 받아 조의(朝議)에서 화제가 되기도 하였는데,

학문에서는 이기설이나 사칠논변(四七論辨)은 이황의 이기이원론에 근거를 두고 변증을 시도하려 하였으며,

저서로는 "겸암집(謙菴集)"이 있으며 안동의 화천서원(花川書院)에 제향되어 있습니다.

 

 

 

 

겸암정사의 협문에서 나오면 고즈넠한 길이 나오며,

 

 

 

 

길이 끝나는 지점에는 "능파대(凌波臺)"의 표지석이 있어,

"강물이 물결쳐도 이르지 못한다"는 의미이며,

 

 

 

 

 

아래에는 형제바위로 불리는 바위를 볼수 있으며,

 

 

 

 

하회마을의 만송정 숲이 한눈에 들어 옵니다.

 

 

 

 

부기장부를 만든 행정의 달인으로,

벼슬을 그리 가까이 하지않아,

동생인 유성룡(柳成龍)에 비해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효심과 더불어 후학 양성에 힘썻던 유운룡(柳雲龍)의 생을 돌아볼수 있는 곳으로,

경북 안동의 유적으로 하회마을의 "겸암정사(謙菴精舍)"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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