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광덕리에 있는,

조선 중기의 정사인 옥연정사(玉淵精舍)를 찾았습니다.

 

국가민속문화재 제88호로 지정된 옥연정사(玉淵精舍)는,

하회마을 건너 부용대 아래 자리하고 있어,

하회마을에서 가려면 배를타고 강을 건너거나 섶다리를 이용해야 하는데,

강을 건널수 없을 때에는 차량으로 이동하여 풍천면 소재지를 거쳐야 갈수 있으며,

 

 

 

 

옥연정사 입구에는 화천서원(花川書院)이 자리하고 있어,

 

 

 

 

서원으로 들어가는 문은 굳게 닫혀있어 들어갈수 없으며,

 

 

 

 

화천서원(花川書院)은 유성룡(柳成龍)의 형인 유운룡(柳雲龍)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으로,

유운룡이 1601년(선조 34) 향년 6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1786년(정조 10)에 건립 위패를 봉안 하였으며,

1803(순조3년)에는 제자인 김윤안(金允安)과 종손자인 유원지(柳元之)을 배향시켜 향사를 지내오다가,

1871년(고종 8)에 서원철폐령으로 훼철 되었다가,

후손들이 1966년부터 기금을 모아 사림들의 공론으로 1996년에 복설 고유를 거행 했습니다.

 

 

 

 

화천서원을 지나 조금 들어가면 "옥연정사(玉淵精舍)"를 만날수 있어,

대문채는 동남향하여 정면 6칸 측면 1칸 크기로 초가와 기와가 잇대어 있는데,

측간(厠間)과 광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대문채를 들어서면 안채가 있어,

 

 

 

 

안채는 동서향으로 정면 4칸, 측면 2칸의 크기로 자리 잡고 있는데,

"ㅡ"자형 평면 가운데 부엌을 두고 좌우로 방을 배치한 특이한 구성으로,

영남 북부지역의 양반집에서는 보기 드문 예라고 하며,

 

 

 

 

안채 옆에 있는 일각문을 들어서게 되는데,

 

 

 

 

일각문을 들어서면 노거수 소나무와 함께,

사랑채와 별당채가 마당을 두고 자리해 있어,

 

 

 

 

마당의 소나무는 470여년 된 노거수로,

안동시의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으며,

 

 

 

 

일각문을 들어서면 안채의 뒷부분이 보이는데,

이 집은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1542∼1607)이 평소 가깝게 지내던 탄홍스님의 도움을 받아,

학문 연구와 제자를 키우기 위해 조선 선조 19년(1586)에 세운 것으로,

안채는 서애(西厓)를 위해 10년 시주로 이곳을 지어준 탄홍스님이 기거하며 공부하던 곳이라 하며,

 

 

 

 

안채의 마루 앞에는 "완심재(玩心齋)"의 현판이 있어,

"마음을 즐거이 노니는 곳" 이라는 의미라 하며,

 

 

 

 

안채의 뒤편에는 별당채가 자리하고 있어,

별당채는 안채 바로 뒤편으로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아담한 크기이며,

규모가 제일 작은 건물로 온돌방과 2칸 대청을 두었는데,

별당채는 유성룡(柳成龍)이 국보 제132호인 "징비록(懲毖錄)"을 집필한 곳으로 전하는 곳으로,

 

 

 

 

별당은 동쪽에 대청을 두고,

서쪽에 2칸 크기의 온돌방을 두었으며,

그리고 전면에 개방된 반 칸 폭의 툇마루를 두었는데,

 

 

 

 

마루는 판벽이 아닌 벽으로 되어 있고,

2칸의 크기로 아담하며,

 

 

 

 

마루 안쪽에는 "원락재(遠樂齋)"의 현판이 있어,

"친구가 있어 멀리서 찾아오면 어찌 즐겁지 아니하겠는가"하고 친구의 내방을 기다린다'는 뜻을 지녔으며,

논어에서 "유붕이 자원방래하면 불역낙호(有朋이 自遠訪來하면 不易樂好)"라는 구절에서 가져왔습니다.

 

 

 

 

서쪽으로 2칸의 온돌방이 연이어 있고,

마루쪽 으로는 마루나 방 앞에 설치하여 접어서 들어 열수있게 만든 사분합문(四分閤門)을 두어,

필요시 방과 마루사이의 확장성을 더한 모습이며,

 

 

 

 

유성룡은 주로 이곳에서 집필하였다고 하며,

이곳에서 탄생한 징비록(懲毖錄)의 "징비(懲毖)"는,

"시경"의 "지난 일을 경계하여 후환을 삼간다"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징비록(懲毖錄)은 임진왜란의 원인과 상황과 군국정무에 관한 문서와 기록을 비롯하여,

류성룡 자신이 해결한 정책적 문제와 자신의 시절 논평으로 구성되어 있고,

다양한 문서기록과 필자의 객관적인 기술과 논평이 수록되어 있어,

임진왜란에 대한 사료적 가치가 대단히 높게 평가받아 국보로 지정 되었습니다.

 

 

 

 

정사의 맨 안쪽에는 사랑채이자 서당채인 "세심재(洗心齋)"가 있어,

"一"자 형의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 크기로,

동쪽부터 방 1칸, 대청 2칸, 방 1칸을 두고, 앞뒤로 반 칸 폭의 퇴를 두었는데,

 

 

 

 

사랑채의 구조는 모두 홑처마의 팔작집으로 방주(方柱)와 납도리로 결구 되었고,

방에는 띠살창호를 달고, 대청 옆과 뒤쪽에는 판문을 달았습니다.

 

 

 

 

정면에는 "옥연서당(玉淵書堂)"의 현판이 올려져 있고,

 

 

 

 

마루를 들여다 보니 고택체험을 하는곳여서,

병풍을 비롯한 도구들이 보이고,

 

 

 

 

왼쪽 방문 위에는 "감록헌(瞰綠軒)"의 현판이 있어,

감록헌(瞰綠軒)은 왕휘지의 "우러러 푸른 하늘을 보며 아래론 푸른 물구비 바라보네"라는,

어구에서 가져온 것 이라 하며,

 

 

 

 

마루 위에는 "광풍제월(光風霽月)"의 현판이 있어,

광풍제월은 비가 갠 뒤의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을 뜻하는 의미이며,

 

 

 

 

오른쪽 방문 위에는 마음을 닦고 씻는 곳을 뜻하는 "세심재(洗心齋)"의 현판이 있어,

세심재(洗心齋)는 "여기에 마음을 두어 만에 하나라도 이루기를 바란다"라는 의미 담고 있는데,

주역계사편 중 "의혹종사어사 이서기만일이(意或從事於斯 以庶幾萬一爾)"에서 따온 것이라고 하며,

 

 

 

 

정사의 내력을 알려주는 "옥연서당기(玉淵書堂記)"의 기문(記文)도 볼수있고,

 

 

 

 

후손이 남긴 현액시(懸額詩)도 찾아 볼수 있니다.

 

 

 

 

사랑채 옆에는 "대나무를 보는 문"이라는 뜻의 간죽문(看竹門)이 있어,

 

 

 

 

협문을 나서면 또다른 풍경이 펼쳐지게 되어,

 

 

 

 

막다른 강가에는 한그루의 소나무가 있고 절벽이 나타 나는데,

 

 

 

 

이곳의 암반에는 "운송대(雲松臺)"라 암각되어 있으며,

 

 

 

 

옥연정사에서 부용대와 겸암정사로 가는 층길의 오른쪽에는,

"달관대(達觀臺)"의 모습을 볼수있다고 하는데,

위험한 오르막길여서 오르지 못하게 통제를 하고 있어,

이 길을 통하여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은 형인 유운룡(柳雲龍)이 있는 겸암정사로 다녔다고 하며,

 

 

 

 

강 너머로는 하회마을의 전경이 손에 잡힐듯 다가 옵니다.

 

 

 

예전에는 하회마을의 화천(花川) 북쪽 부용대(芙蓉臺)의 동쪽 강가에 자리 잡고 있어,

나룻배로 마을을 드나들게 되어 있었다고 하는곳으로,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정사(精舍)이며 "징비록(懲毖錄)"을 집필한 곳으로,

경북 안동의 하회마을에서 찾았던 "옥연정사(玉淵精舍)"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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