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영양군 입암면 산해리 중심부에 있는,

문해마을에 위치하고 있는 정자 문화재인 남경대(英陽 攬景臺)를 찾았습니다.

 

남경대(攬景臺)는 반변천과 동산천의 두 냇물이 합쳐지는 경치 좋은곳에 세워진 정자로,

언덕 밑에 흐르는 반변천의 아름다운 풍광은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데,

 

 

 

 

남경대가 있는 문해마을은 물이 많아 바다와 같다고 해서 "바다와 같은 내"라는 뜻을 가진 지명이며,

유학이 일찍 들어 와서 "학문이 바다처럼 흐르는 마을"이란 뜻으로 문해(文海)라고도 불리어 졌다고도 하는곳으로,

 

 

 

 

하천쪽에서 정자로 오르는 길목에는 남경대(攬景臺)의 표지석이 서있고,

 

 

 

 

돌계단을 따라 조금 오르다 보면,

 

 

 

 

소나무 숲에 앉아있는 남경대(攬景臺)를 만나게 되어,

 

 

 

 

앞에 연못을 두고 서있는 영양 남경대(英陽 攬景臺)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645호로 지정 되었으며,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팔작기와집이며,

평면은 마루방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 1칸을 연접시킨 중당협실형(中堂挾室形)의 구조로,

하층은 모두 개방시켰으며, 상층에는 통칸으로 처리 하였습니다.

 

 

 

 

정자 앞 마당에서 내려다보면,

반변천과 동산천이 합수하는 지점의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어,

반변천변의 수려한 풍광이 한눈이 들어오며,

 

 

 

 

정자의 전후좌우로는 송림이 둘러싸고 있어,

풍취 또한 수려한 곳으로,

 

 

 

 

정자의 전면에는 반 칸 규모의 퇴칸인 우물마루를 두었고,

퇴칸의 주위에는 계자난간(鷄子欄干)을 둘렀으며,

기단 위에 다듬돌 주초를 놓은 후 12본의 원주를 세웠으며,

기둥 위에는 초익공으로 장식하였는데 오량가구의 홑처마집으로,

 

 

 

 

마루방의 앞에는 문짝 네개가 죽 잇달아 달린 사분합문(四分閤門)을 두어 확장성을 더 했으며,

 

 

 

정면의 처마 아래에는 "남경대(攬景臺)"의 현판이 있고,

 

 

 

들여다 본 남경대 마루방의 모습이며,

 

 

 

 

온돌방도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어,

이곳을 관리 하시는 분이 별도로 있는듯 하며,

 

 

 

 

전반적으로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어 내부도 밝게 여겨집니다.

 

 

 

 

마루 위에서는 "영모당(永慕堂)"의 현판이 있고,

 

 

 

 

"산택재(山澤齋)"의 현판도 있어,

1684년(숙종10)에 남경대를 중건한 권태시(權泰時,1635~1719)는,

이곳이 반변천에 위치하여 경치와 지형이 "주역(周易)"의 산택손괘(山澤損卦)와 같다고 하여,

남경대에 산택재라고 편액(扁額) 하였다고 하며,

 

 

 

 

종후생(宗後生) 권재강(權載綱)이 쓴 시문 시판(詩板)을 비롯하여,

많은 차운시(次韻詩)들이 올려져 있어,

 

 

 

 

이동표(李東標), 권두경(權斗經), 민정중(閔鼎重), 권상하(權尙夏) 등,

당대의 명현들이 찾아와 권태시가 지은 "산택재 원운(山澤齋原韻)"에 차운하면서,

수려한 산천의 풍광을 격찬 하였으며,

 

 

 

 

기문(記文)으로는 "남경대기(攬景臺記)"의 편액을 볼수 있습니다.

 

 

 

 

정자 앞에는 교적 우주론의 반영한 장방형의 연못인 "천원지방(天圓地方)"이 있어,

천원지방(天圓地方)은 과거의 도교사상(道敎思想)으로 궁궐을 비롯한 우리나라 건축물에 나타난 기본 개념으로,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의미는,

"하늘의 덕성은 원만하고 땅의 덕성은 방정하다"는 뜻이며,

그뿌리는 삼한시대 이전으로 5,000년이 넘는 뿌리를 가지고 있는 고유의 사상입니다.

 

 

 

 

남경대(攬景臺)는 안동권씨 용담(龍潭) 권지(權誌,1567~1637)가,

영해도호부사 장곡(藏谷) 권태일(權泰一, 1569~1631)의 권유와 건축비 부담으로,

반변천 강안 남경대 절벽 위에 대지를 마련하여 정자를 지었는데,

좌우 산수의 풍경이 아름답다고 하여 남경대(攬景臺)라 명명 하였으며,

 

 

 

 

아들인 번곡(樊谷) 권창업(權昌業,1600~1663)이 물려받아 별서(別墅)로 삼았으며,

손자 산택재(山澤齋) 권태시(權泰時,1635~1719)가 무너진 건물을 중건하여,

학문 연구와 후학을 양성하는 강학처로 삼았습니다.

 

 

 

 

그 후 남경대는 다시 폐허로 변하였다가,

1916년에 중당협실형(中堂挾室形) 정자로 중건 되었는데,

중건된 남경대는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의 혼란기를 거치면서 또 크게 퇴락 하였으나,

지금은 1993년에 중건한 정면 3칸 측면 1.5칸의 중당협실형 건물이 세워져 있어,

 

 

 

 

1993년 중건된 남경대는 세부구성에서는 부분적으로 이전의 것과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으나,

규모 및 위치, 주변 공간의 구성과 관계 등은 1916년 중건 때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그 이름이 보여주듯이 주변 풍광이 매우 수려한 훌륭한 입지를 지니고 있는데,

 

 

 

 

특히 권창업(權昌業)과 권태시(權泰時) 부자는,

퇴계학통에 연결되는 영남학파의 일원으로서 남경대를 유수한 영남사림과 교유하는 장소로 이용 하였는데,

“약계”를 조직하여 유력 향중 인사들과 함께 남경대에서 계회를 개최하는 활동도 하였으며,

 

 

 

 

반변천과 동산천이 합수하는 지점의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으며,

전후좌우로는 송림이 둘러싸고 있어 풍경이 아름답고,

학문을 닦고, 후학을 기르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 되었던 정자 입니다.

 

 

 

 

풍광 수려한 반변천변의 나지막한 구릉 위에 세워진 정자로,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 하는데 힘썻던,

용담(龍潭) 권지(權誌)이하 삼대에 걸친 삶을 되돌아 볼수 있는 곳이며,

국보 제187호인 봉감모전오층석탑(鳳甘模塼五層石塔)을 인근에서 찾을수 있어,

함께 찾아볼 만한 곳으로 경북 영양의 문화재인 "남경대(攬景臺)"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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