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의 태봉(胎峰) 정상에 있는,

세종의 왕자들의 태실인 "세종대왕자 태실(世宗大王子 胎室)"을 찾았습니다.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산 7-1에 위치하고 있는,

세종대왕자 태실을 찾으려면 주차장에 차를 두고서,

 

 

 

 

계단을 따라 조금 올라야 하는데,

그리 먼거리도 아닌데다 소나무 숲길로 되어있어 쉽게 오를수 있으며,

 

 

 

 

어느새 태실이 있는 정상에 오르게 됩니다.

 

 

 

 

사적 제444호인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星州 世宗大王子 胎室)"은,

1438년(세종 20)에서 1442년(세종 24) 사이에 조성된 태실로,

태실은 왕실에 왕자나 공주 등이 태어났을 때 그 태를 넣어두던 곳을 말하는데,

세종의 적서(嫡庶) 18왕자와 세손인 단종의 태실 1기를 합쳐 모두 19기로 조성 되었으며,

 

 

 

 

안내문에는 태실의 위치를 알수있게 사진으로 설명되어 있는데,

태실이 자리잡은 태봉은 당초 성주이씨의 중시조(中始祖)인 이장경(李長庚)의 묘가 있었던 곳으로,

왕실에서 이곳에 태실을 쓰면서 묘를 이장하도록 하고 태를 안치하였다 하며,

 

 

 

 

안내문에는 태실의 위치를 알기쉽게 배열해 두었는데,

조선조 세종대왕 왕자들의 태실로서 전열은 11기, 후열은 8기로 되어 있으며,

태실 앞에는 각각 왕자의 태실비가 세워져 있슴을 알려주고 있는데,

 

 

 

 

태실은 왕실에서 자손을 출산하면 그 태를 봉안하는 곳을 말하며,

예로부터 태는 태아의 생명력을 부여한 것이라고 인정하여,

태아가 출산된 뒤에도 함부로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다루었는데,

민간에서는 땅에 묻는 경우도 있었으나 많은 경우 출산 후 마당을 깨끗이 한 뒤,

왕겨에 태를 묻어 몽긋몽긋하에 태운 뒤에 재를 강물에 띄워 보내는 방법으로 처리 하였으나,

왕족의 경우에는 국운과 직접 관련이 있다고 여겨,

태를 항아리에 담아 전국의 명당에 안치시키는 방법으로 처리 하였는데,

이때 이를 주관하는 관상감에서 길지로 선정된 명산에 일정한 의식과 절차를 밟아 묻었으며,


이 의식과 절차를 거쳐 완성한 시설을 태실이라 불렀습니다.

 

 

 

 

가장 먼저 만나게 된 계양군(桂陽君) 이증(李璔,1427~1464)의 태실로,

계양군은 세종의 서자인 왕자로 수양대군의 편에 서서 세조 반정에 참여 이후 좌익공신 1등에 녹훈 되었는데,

학문을 좋아하고 글씨도 잘 썼으며 남을 대접함이 겸손하여 권세를 부리지 않았으나,

주색에 빠져 일찍 죽었다고 합니다.

 

 

 

 

조선 제7대 왕 세조(世祖, 재위 1455~1468년)의 태실도 있어,

이유(李瑈,1417~1468)는 세종의 제2왕자로 1428년에 수양대군에 봉해졌고,

1455년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정권을 잡은뒤 조카인 단종을 선위(禪位)시키고 왕위에 올랐는데,

 

 

 

 

수양대군은 왕위에 올라서 인지 다른 태실과는 다르게,

태실비 앞에 거북받침의 커다란 비석이 한기 더 서있슴을 볼수 있습니다.

 

 

 

세종대왕자 태실(世宗大王子 胎室)의 전체면적은 5,950㎡로,

19기 중 14기는 조성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나,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한 다섯 왕자의 태실은,

방형의 연엽대석(蓮葉臺石)을 제외한 석물이 파괴되어 남아 있지 않는데,

태실의 재질은 화강암이고, 형식·구조는 밑지름 102㎝, 높이 42㎝의 연엽형의 개첨석(蓋簷石)에,

높이 60㎝ 구형의 중동석(中童石) 석함(石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비운의 왕인 단종의 태실도 볼수 있어 표지석에는 "원손(단종) 태실"이라 적혀 있으며,

세종의 손자인 단종(재위,1452~1455)은 조선의 제6대 왕으로,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홍위(弘暐)이고,

1452년(문종 2)에 문종이 죽으면서 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나,

1453년(단종 1)에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일어나 이름뿐인 왕이 되었고,

1455년(단종 3)에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양위하고 상왕으로 불러났으나,

1457년(세조 3) 단종 복위 운동을 기화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 되었으며,

영월로 유배 되었다가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 계획이 사전에 발각됨에 따라 사약을 받았습니다.

 

 

 

 

연엽대석(蓮葉臺石)만 남아있고 석물이 없는 태실도 있어,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1418~1453)의 태실로,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시·글씨·그림에 모두 뛰어나 삼절이라 불렸으며 거문고에도 능했는데,

단종 즉위 후 둘째 형인 수양대군과 권력다툼을 벌였으나 계유정난으로 희생당한 인물로,

세종의 셋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소헌왕후이며 큰형은 문종이고 둘째 형이 세조이며,

1428년 안평대군에 봉해졌으며 1450년 문종이 즉위한 뒤 조정의 배후 실력자로 등장했는데,

1452년 단종 즉위 이후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황보인, 김종서 등 문신·학자 세력과 제휴하여,

수양대군과 권력을 다투었으나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황보인·김종서 등을 제거할 때,

안평대군도 반역을 도모했다 하여 강화도로 유배되었고 귀양지에서 죽었습니다.

 

 

 

 

금성대군(錦城大君) 이유(李瑜,1426~1457)의 태실도 있어,

세종의 여섯째 아들인 왕자로 어머니는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이고 단종의 숙부이며,

1433년(세종 15) 금성대군에 봉해지고 1437년 태조의 여덟번째 아들인 방석(芳碩)의 후사가 되었으며,

1452년 어린 조카인 단종이 즉위하자 형인 수양대군과 함께 좌우에서 보필할 것을 약속했으나,

수양대군이 정권탈취의 야심을 가지고 김종서 등을 제거하자, 형의 행동에 반대 했으며,

1455년(단종 3)에 모반혐의로 삭녕에 유배되었고, 다시 광주로 옮겨졌는데,

1456년(세조 2) 성삼문·박팽년 등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이 실패하자,

이에 연루되어 경상도 순흥으로 유배지가 옮겨졌으며,

이곳에서 부사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고을 군사와 향리를 모으고 도내의 사족들에게 격문을 돌려서,

의병을 일으켜 단종복위를 계획했으나 거사 전에 관노의 고발로 실패하여 반역죄로 처형 당했습니다.

 

 

 

 

이곳의 태실 대부분은 세종 20년(1438)에서부터 세종 24년 사이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이 중에는 비석이 닳아 판독하기 어려운 것들이 많으며,

판독할 수 있는 태실비의 대표적인 것은 평원대군, 영응대군, 의창군 등의 태실비이며,

1977년에 이곳을 보수, 정비하면서 금성대군, 화의군, 단종 등의 태실로 추정되는 자리에서,

토기, 태호, 분청인화문 대접, 분청상감 연화문 뚜껑 1식과, 명기가 있는 지석2점 등이 출토 되었는데,

현재 국립대구박물관, 경주박물관, 경북대학교 박물관 등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세종대왕자 태실에서의 전경도 수려한 편여서,

한참을 내려다 보며 감상에 빠지게 합니다.

 

 

 

 

전국에서 가장많은 태실이 집중되어 있는곳이며,

뛰어난 풍광이 있는 자리 좋은곳에 위치한 태실로,

태실을 수호하는 사찰이었던 선석사가 가까이 있어 함께 돌아 볼만한 곳으로,

경북 성주의 유적, 세종대왕자 태실(世宗大王子 胎室) 입니다.

 

 

다음검색

저작자 표시 컨텐츠변경 비영리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