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수촌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건축물인 "월회당(月會堂)"을 찾았습니다.

 

월회당(月會堂)은 경상북도 시도기념물 제48호로 지정 되었으며,

 

 

 

 

월회당 앞에는 작은 규모이지만,

소공원 인듯 아담하게 꾸며둔 공원이 있고,

게운지 오래지 않아 보이는 "원정 여선생 유적비(圓亭 呂先生 遺跡碑)"가 있으며,

 

 

 

 

월회당(月會堂)의 대문은 닫혀 있지만,

대문에 관람이 필요하면 알릴수 있게 연락처를 두어,

후손께서 일부러 나오셔서 안내문과 함께 문을 열어 주십니다.

 

 

 

 

월회당의 3칸 대문채에는 "어모문(禦侮門) "의 현판이 있어,

"업신여김을 막는 문"이란 특이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어모문(禦侮門)을 들어서면 전면에 "월회당(月會堂)"의전경이 들어와,

동과 서측에 작은 건물이 있고 전면에는 큰 건물인 월회당이 강당 처럼 서있어,

마치 서원으로도 들어온듯한 느낌이 드는데,

 

 

 

 

문을 들어서면 왼쪽에는 정면 4칸 측면 1칸 규모로 맞배지붕의 "교직사(交織祠)"가 있어,

 

 

 

 

관리사인 교직사(交織祠)는 동향의 4칸 "一"자 건물로,
중앙 2칸은 통칸 온돌방을 두고 우측에는 마루 1칸을 좌측에는 1칸의 부엌을 두었으며,

 

 

 

 

오른쪽에는 교직사를 마주하고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로 맞배지붕의 "전사청(典祀廳)"이 있어,

 

 

 

 

전사청은 서향의 3칸 "一"자 건물로,

중앙 마루 1칸을 중심으로 좌측에 마루방을 두고 책방 1칸과 우측에 온돌방 1칸으로 꾸몄으며,

 

 

 

 

전사청(典祀廳)은 제례에 올릴 제사 음식을 장만하고,

제물, 제기 등 제사에 필요한 여러 가지 도구들을 보관하던 곳 입니다.

 

 

 

 

마당 중앙에 월회당(月會堂)이 자리하고 있어,

월회당은 1516년(중종 11)에 원정(圓亭)여희림(呂希臨)이,

향토제자들에게 여씨향약(呂氏鄕約)을 강론하기 위해 창건한 것으로,

1664년(현종 5)에 현손인 성암(聖巖)효증(孝曾)이 이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여씨 향약은 중국 송나라때 향촌의 백성들을 교화하기 위해서 만들었던 자치 규약으로,

그것을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이곳 성주 벽진 월회당에서 시작 했다고 하며,

 

 

 

 

조 정암(趙 靜菴)이 이러한 여희림(呂希臨)의 여씨향약(呂氏鄕約) 알고는 임금께 주청해서,

1517년(중종12년)에 전국 팔도에 여씨향약(呂氏鄕約)을 시행 하라는 왕명이 내려졌고,

여씨향약 이란 주자(朱子)가 남전향약을 보고 남전향약에 더 보태기도 하고 덜기도 하여 여씨향약 이라 하였는데,

 

 

 

남전향약이란 중원땅 송나라 때 남전리에 도학군자 네 형제가 살았었는데,

그들의 이름이 여대중(呂大中) 대방(大防) 대약(大約) 대림(大臨)으로,

네 형제가 의논하여 네 가지의 조약을 만들었는데 바로 그 네 가지는,

덕업상권(德業相勸).과실상규(過失相規).예속상교(禮俗相交).환란상휼(患難相恤).이라는 덕목으로,

이 조약 이름을 남전향약 이라 하였습니다.

 

 

 

 

월회당(月會堂)의 마루에는 많은 편액들이 있어,

 

 

 

 

월회당(月會堂)의 현판이 있고,

 

 

 

또하나의 다른 월회당(月會堂)의 현판이 있어,

월회(月會)라고 지은것은 "월일강회(月一講會)"라는 넉자에서 따온것으로,

"한달에 한번씩 이라도 모여서 향약강회를 가져야 한다"는 훈계조로 만든 이름이며,

 

 

 

 

마루 위에는 향약의 자치 규약이 걸려 있어,

여씨향약(呂氏鄕約)

1덕업상권(德業相勸) 좋은 일은 서로 권장한다.

1.과실상규(過失相規) 잘못은 서로 고쳐준다.

1.예속상교(禮俗相規) 서로 사귐에 있어서는 예의를 지킨다.

1.환난상휼(患難相恤) 환난을 당하면 서로 구제한다.

 

 

 

 

또한 한편의 원운(原韻) 시판(詩板)에,

남의 지은 시의 운자를 따서 지은 차운시(次韻詩)의 시액(詩額)들을 볼수 있습니다.

 

 

 

 

여씨향약(呂氏鄕約)의 시초인 여희림(呂希臨,1481~1553)은,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천지(天之), 호는 원정(圓亭)으로 성주 출생이며,

성종 때 원종공신이며 감역인 여우창(呂遇昌)의 아들로,

18세에 용봉산(龍鳳山)에 있는 절에 들어가 도형(都衡)·이광(李光) 등과 함께 학문을 닦았는데,

그 해 무오사화가 일어나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 등이 화를 당하자,

이에 과거볼 생각을 단념하고 사림(士林)으로서 지냈는데,


당시 여희림은 도학과 문장으로 크게 명성이 나 있었으며,

김안국(金安國)·소세양(蘇世讓)·정사룡(鄭士龍) 등과 교우관계를 가졌으며,

1507년(중종 2)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 등과 도의로 교우를 맺었으며,

1510년에는 서경덕(徐敬德)을 찾아가 변역(變易)·소장(消長)의 이치에 관해 문답, 서로 계합한 바 있고,

1516년에는 고향에 내려가 주자(朱子)가 가감, 증보한 "여씨향약(呂氏鄕約)"을 시행하였습니다.


그 이듬 해 정광필(鄭光弼)의 추천에 의해 불차탁용(不次擢用)으로 복성군(福城君)의 사부가 되었고,

1519년 현량과(賢良科)가 설치되자 여희림의 형 여희단(呂希端)과 함께 천거되었으나,

응시를 거절하여 조광조(趙光祖)의 기묘사화(己卯士禍)에 화를 면하였으며,

1533년 김안로(金安老)가 경빈박씨(敬嬪朴氏)를 폐하고 복성군을 연일(延日)로 귀양보낼 때,

전일에 사부를 지냈다는 이유로 기장(機張)에 유배되었다가 함평에 이배 후 풀려 났으며,

1538년 다시 등용되어 지평에 이르렀습니다.

사후 성주의 천곡사(川谷祠)에 제향 되었고 여희림의 사적 등을 수록한 "원정실기(圓亭實紀)"가 있습니다.

 

 

 

 

월회당은 정면 7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으로,

\중앙부 3칸은 대청으로 우물마루를 깔았고,

대청 좌우에는 각각 2통칸의 온돌방을 두었으며,

자연석 막돌 허튼층쌓기한 기단에 자연석 초석을 놓았으며,

기둥은 대청의 전후열만 원주이고 나머지는 각주를 세우고 주상에는 초익공으로 꾸몄으며,

 

 

 

 

월회당의 전체 모습은,

방형 대지 주위에 토석담장을 쌓고,

남측 중앙에 솟을대문을 세운 대문채를 들어서면 넓은 마당을 두고 북측에 남향하여 월회당이 있고,

그 전면의 좌·우에 전사청(典祀廳)과 관리사인 교직사(交織祠)가 대향하고 있어 전체적으로 튼 "ㅁ"자를 이루고 있으며,

 

 

 

 

월회당 옆면의 박공 부분의 휘어진 "S"형의 나무를,

있는 그대로 보의 위치에 올려두어 자연미를 더하는 느낌을 줍니다.

 

 

 

 

우리나라의 여씨향약(呂氏鄕約)이 시작된 곳으로,

여씨향약에 대해 알아볼수 있고,

원정(圓亭)여희림(呂希臨)의 생을 되돌아 볼수 있는 곳으로,

경북 성주의 문화재인 "월회당(月會堂)"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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