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영양군 영양읍 감천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고택(古宅)인 학초정(鶴憔亭)및 정침(正寢)을 찾았습니다.

 

영양 학초정(鶴憔亭)및 정침(正寢)은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64호로 지정 되었으며,

입암에서 선바위를 지나 영양읍으로 향하는 31번 국도변의 반변천을 건너면 만날수 있어,

 

대문간채는 단간통(單間通)의 4칸 규모로 그 중에 소슬대문이 1칸이며,

맞배지붕이며 바깥벽은 화방벽인데 근래 수리하면서 화방벽에 분벽(粉壁) 하였고,

산석(山石)으로 쌓은 댓돌이 일부를 차지하고 나머지는 누하주(樓下柱)를 세워 다락집 처럼 보이는데,

 

 

 

 

학초정(鶴憔亭)및 정침(正寢)은 조선 효종 때의 인물인,

삼수당(三秀堂) 조규(趙頍,1630∼1679)가 지은 살림집과 정자로,

처음 정자는 삼수당(三秀堂)이라 했다가,

1910년경에 소유주가 밀양 박씨로 바뀌면서 학초정(鶴樵亭)으로 이름이 바뀌 었으며,

현재는 대문간채, 학초정과 안채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뒤에는 갓등산이 둘러있고 앞에는 반변천이 흐르는 곳에 서남향으로 자리 잡은 학초정(鶴憔亭)및 정침(正寢)은,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왼쪽 앞쪽에 정자가 있고 그 안쪽에 살림집이 있어,

 

 

 

학초정(鶴憔亭)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구성 되었는데,

홑처마의 팔작지붕이며 건물 앞에 소박한 계자난간을 설치 하였고,

좌측 협간에 2칸으로 방을 들였고 나머지는 우물마루를 두었으며,

 

 

 

 

학초정은 누마루를 통하여 들어가게 되어 있어,

돌계단을 통하여 오르면,

 

 

 

 

4칸은 대청을 두고 2칸은 온돌방을 왼쪽에 들였으며,

정자의 건축양식은 일반적인 조선 중기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데,

 

 

 

 

정자의 마루 위에는 많은 편액들이 올려져 있어,

 

 

 

 

정면의 처마 아래에는 "학초정(鶴憔亭)"의 현판이 있고,

 

 

 

 

영지동천(英芝洞天)의 현판은 옆면의 처마 아래에 있으며,

 

 

 

 

옆에는 수성인하(壽城烟霞)의 현판도 볼수 있으며,

 

 

 

 

마루 위에는 또다른 글씨체의 "학초정(鶴憔亭)" 현판이 있고,

 

 

 

 

용초(蓉樵) 조병일(趙秉馹)의 "몽증학초정주인(夢贈鶴樵亭主人)"을 비롯하여,

"학초정창운계원록(鶴樵亭唱韻契員綠)"등 많은 기문(記文)과 시판(詩板)이 편액(扁額)되어 있습니다.

 

 

 

 

학초정 이전의 삼수당(三秀堂)을 처음 세운 조규(趙頍,1630∼1679)는,

인조 8년인 1630년에 영양 입암면 연당리 임천동에서 태어 났으며,

할아버지는 호은(壺隱) 조전(趙佺) 아버지는 석문(石門) 조정환(趙廷)으로,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특했던 그는 학문을 좋아해 한번 읽은 내용은 곧장 외웠다고 하며,

현종 1년인 1660년 생원시에 합격해 성균관에서 공부했는데,

여러 생도들이 그의 학문과 인품을 존경하여 ‘남주거사(南州居士)’라 불렀다고 하며,

 

 

 

 

조규는 중년에 감천리 "가짓들"로 이거하여,

정자를 짓고 "삼수당(三秀堂)"이라 편액하고 자신의 호로 삼았는데,

삼수당이라 이름 지은 것은 "이곳의 잔디가 빛이 나서 1년에 세 번 아름답다"는 의미라고 하며,

조규는 삼수당에서 말년을 보냈고 집 문간에는 언제나 찾아드는 이가 끊이지 않았다 합니다.

 

 

 

 

학초정은 "잔디가 빛이 나서 1년에 세 번 아름답다"는 뜻을 지닌 삼수당을,

박학래가 인수한 뒤 새로 이름을 붙인 정자이기도 합니다.

 

 

 

 

정자 앞에는 장방형의 작은 연못이 있어,

"하늘은 둥굴고 땅은 모났다는 도교사상"을 표현한 "천원지방(天圓地方)"을 의미하는 듯 하며,

 

 

 

 

학초정(鶴憔亭)에서 내려와 정침쪽을 향합니다.

 

 

 

 

정침은 정면 9칸, 측면 6칸 규모의 "ㅁ"자형 건물로,

좌측에는 사랑 공간을 배치 하였고,

평문은 중문칸을 중심으로 우측에 고방과 외양간과 온돌방을 두었고,

전면의 좌측과 우측 2칸은 좌우로 돌출하여 양날개집(兩翼舍)의 형상을 이루었으며,

 

 

 

 

작은 사랑은 3칸 규모의 맞배지붕의 구조이며,

한칸반의 마루방과 한칸반의 온돌방을 두었으며,

 

 

 

 

중문을 들어서면,

영남 북부지역의 전형적인 가옥 구조인 "ㅁ"자형의 안채가 들어오고,

 

 

 

 

안채는 정면 3칸에 측면 2칸 규모의 6칸 대청을 중심으로,

우측에는 건너방과 웃방을 두고 좌측에는 안방과 웃방을 두었는데,

 

 

 

 

안방의 전면에 부엌을 연접시켜 좌익사를 이루게 하였고,

 

 

 

 

건너방과 웃방을 두고 우익사가 자리해 있으며,

 

 

 

 

안대청은 개방된 구조로 정면 3칸이 안마당 폭과 같으며 우물마루를 깔았고,

중문칸 우측에는 반 칸 크기의 통로가 설치되어 부엌과 앞마당을 직접 연결 하였는데,

이러한 출입구는 독특한 구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익사로 연결되는 2칸의 건너방이며,

 

 

 

 

2칸이 하나로 트여 있는 건너방의 모습이며,

 

 

 

 

우익사로 연결되는 곳에는 안채의 주인이 거처하는 안방이 있어,

 

 

 

 

3칸이 하나로 트여있는 안방은 너른편이고,

 

 

 

 

안방의 작은 문을 통해,

부엌위에 조성되어 있는 다락도 들여다 봅니다.

 

삼수당을 인수한 학초(鶴樵) 박학래(朴鶴來,1864~1942)는 구한말 동학의 지도자로,

자(字)는 중화(仲化)이고 호(號)는 학초(鶴樵)이며,

집안은 원래 권문세가의 높은 지위에 있었으나,

광해군 때 영의정을 지낸 박승종(朴承宗)이 인조반정으로 자결한 이후 완전히 몰락하게 되어,

철종 대에와서 가문의 지위와 명예는 회복되었지만 여러 대가 관직에서 멀어졌고,

가난은 극복될 수 없었기에 예천군 호명면 산합리에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 났는데,

마지막 과거시험인 1894년(고종 31)에 사마시에 합격하기도 한 문장가이기도 했던 그는,

갑오동학농민운동 당시 예천에서 수천 명의 동학도를 이끄는 접주로 활동 하였으며,

 

 

 

 

일제의 동학군 토벌이 강화되자 예천을 떠나 경주와 청송, 영천 등지로 옮겨 다니며 살다가,

1910년경 영양 감천리 지평에 안착 하였으며,

그는 자신이 겪은 일을 대화체 형식으로 기록한 "학초실긔" 3권을 남겼는데,

당시에는 보기 드물게 자신을 3인칭 주인공으로 한 한글체 소설로 구성하여 기록 하였으며,

학초실긔의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여 당시 갑오동학농민운동에서 자신이 겪은 활동을 기술 하였는데,

왜군이나 관군이 아닌 동학농민군에 직접 가담하여,

동학농민군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기록한 것은 처음으로 발견 된 것이라 동학사에 있어서 귀중하게 평가되고 있습니다.

 

 

 

 

경북 영양에서 찾은 조선 후기의 고택(古宅)으로,

잘 지어진 조선 후기의 살림살이를 살필수 있었지만,

부분적으로 수리를 하여 관리를 한듯 하지만,

사람의 손길이 많이 필요해 보이는 모습을 보여준 곳으로,

영양의 문화재, "학초정(鶴憔亭)및 정침(正寢)"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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