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세장리에서,

조선시대의 서당인 "백호서당(栢湖書堂)"을 만납니다.

 

청송의 "백호서당(栢湖書堂)"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81호로 지정되었으며,

임하댐으로 향하는 반변천 변의,

주사로 보이는 집 한 채를 앞에 세워두고 그 뒤에 높이 서 있어,

 

 

 

 

백호서당(栢湖書堂)은 조선후기 숙종 때의 학자로,

영남학파의 거두인 존재 이휘일(存齋 李徽逸1619~1672)의 유업(遺業)을 기리기 위하여,

영조(英祖) 33년(1757)에 현감(縣監) 조명협(曺命協)의 발의(發議)로 향중(鄕中)에서 건립(建立) 하였으며,

 

 

 

 

서당(書堂)은 정면(正面) 4칸, 측면(側面) 2칸반의 팔작(八作) 지붕으로,

자연석(自然石) 기단(基壇)위에 주초(柱礎)를 놓고 원주(圓柱)를 세워,

중앙(中央) 2칸에 우물마루를 깔아 좌(左)·우(右)에 온돌방(溫突房)을 둔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의 구조이며,

 

 

 

 

"백호서당(栢湖書堂)"의 현판으로,

이휘일의 동생인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의 친필이라고 하며,

"백호(栢湖)"는 잣나무와 호수를 뜻 하는데,

처음 건립될 때 주변에 잣나무들이 무성했고 반변천의 물줄기가 호수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4칸의 너른 마루를 중심으로 좌우로 2칸의 온돌방을 두었는데,

좌측의 온돌방으로,

 

 

 

 

2칸의방은 하나로 트여 있으며,

 

 

 

 

우측의 온돌방도 좌측과 대칭으로 마주하여 두었으며,

 

 

 

온돌방의 크기와 구조는 거의 비슷합니다.

 

 

 

 

백호서당은 영조(英祖)때 중수(中修) 하였고,

1928년 화재(火災)로 우물마루 일부(一部)가 피해(被害)를 입어 보수(補修)하였으며,

임하(臨河)댐의 수몰(水沒)로 1989년에 현위치(現位置)로 이건(移建) 하였는데,

70m 정도 이동한 것이라니 주변 경관에는 차이가 거의 없을 것이라 보이고,

 

 

 

 

서당의 마루위에는 여러기의 편액이 올려져 있어,

 

 

 

 

2기의 현판과 백호서당(栢湖書堂)의 내력을 알려주는 4기의 기문(記文) 편액(扁額)이 있습니다.

 

 

 

 

서당의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새 날개 모양의 익공 양식으로 꾸민 이익공(二翼工)으로,

전면(全面)에는 반 칸의 툇마루를 깔고 계자난간(鷄子欄杆)을 둘렀으며,

 

 

 

 

서당의 마루에서 앞을 내어다 보면,

 

 

 

 

반변천과 서시천이 만나는 합수지점과,

진보면 소재지 너머로 비봉산까지 한눈에 보이는 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휘일(李徽逸,1619~1672)은 영남학파의 학자로,

벼슬에 나가지 않고 농촌에서 학문에 몰두한 학자이며,

아버지는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이고 동생은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이고,

어머니는 퇴계의 학통을 이은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의 무남독녀 장계향(張桂香)으로,

여중군자로 칭송받았으며 최초의 한글 조리서인 "음식디미방"의 저자입니다.


이휘일은 조선 후기의 학자로,

일찍부터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사리를 깨달아 독립된 성리학의 한 유파를 이루었는데,

예를 존중하여 상제대요와 절목을 정리하여 예로부터 생활화된 폐단을 시정 하였으며,

저서로는 "존재집", "구인략", "홍범연의"가 있습니다.

 

 

 

 

서당(書堂)의 마루 아래에는,

보수를 하고 나온것으로 보이는 상량문이 적혀있는 목재도 눈에 들어오고,

 

 

 

 

백호서당(栢湖書堂)은 조선 후기 대표적인 성리학자이자 사대부로서,

자연과 더불어 일하는 농민의 기쁨을 노래했던,

이휘일(李徽逸)의 "행위 일체'의 의미가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조선 후기 대표적인 성리학자인,

존재(存齋) (이휘일 李徽逸)의 생을 뒤돌아 볼수있고,

풍광 좋은곳에 자리잡고 있어 찾아 볼만한 곳으로,

경북 영양의 문화재인 "백호서당(栢湖書堂)"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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